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58
“괜찮군.”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가게에 들어선 순간부터 테오도르는 매우 흡족해했다.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점원, 여자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손님들, 화사함과 장식이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는 색상의 옷까지, 모두 그의 마음에 든 듯했다.
내게 맞는 옷을 찾는다고 말하는 인스트에게 무뚝뚝한 점원은 별말 없이 나를 힐끗 보더니, 안쪽으로 들어가서 몇 벌의 옷을 가지고 나왔다.
“이렇게 작은 건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옷을 건네며 점원은 중얼거렸다. 아마도 딴에는 옷이 나와 있지 않아서 미안하다는 표현을 한 것인 듯했다.
“괜찮군.”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나를 본 테오도르는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정확하게는 바위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으면 누가 바위고 어느 게 나인지 구분하지 못할 것 같은 셔츠와 잉크가 튀어도 걱정이 없을 검은색 바지를 입고 나온 것을 보고 지은 표정과 말이었다.
“이건 다 같은 치수인가?”
“네.”
“그럼 전부 사지.”
테오도르는 고개를 까닥여, 따라온 하인에게 계산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전부 다요?”
오히려 놀란 것은 나였다. 정확하게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셔츠가 열 장쯤은 되었고, 바지도 네다섯 벌 정도는 되었다.
내가 가진 사계절 옷들보다 더 많은 개수였다. 메이드복까지 합쳐도 말이다.
거기다가 아까 옷을 갈아입을 때 봤는데, 여기 옷들이 결코 저렴한 옷은 아니었다. 모양은 그리 예쁘지 않았지만, 기사들이 입는 옷답게 아주 편했고, 재질도 좋았다.
그야말로 심미성을 포기하고, 기능성만이 강조된 옷이었다.
“아까는 드레스 비싸다고,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달라는 제 농담에 미쳤냐고 하셔놓고선요? 이 옷들도 비싸던데 다 사신고요?”
나는 테오도르의 이중잣대에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왜요?”
“이건 필요하니까.”
테오도르의 답은 심플했고, 동시에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드레스는 너무 예뻐.”
뒤에 덧붙인 말은 빼고.
“네?”
“그래서 안 돼.”
“네?”
이건 또 무슨 말이람?
나는 쿨하게 계산하고 이미 밖으로 나가고 있는 테오도르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 * *
올 때와는 달리 마차 안에는 테오도르와 나뿐이었다. 인스트는 햇볕을 좀 쬐고 싶다며 마부석에 하인과 함께 앉았다.
나는 마차 안에서 무뚝뚝한 점원이 대충 개어서 담아준 옷을 다시 꺼내 보는 중이었다.
칙칙한 색의 펑퍼짐한 셔츠와 바지는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새 옷이라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거기다가 내 돈을 들이지 않은 공짜 옷이 이렇게 많이 생겼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은 안자?”
앞에 앉아 있던 테오도르가 갑자기 툭,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잠이요?”
부드러운 촉감에 자꾸 손이 가는 셔츠에서 눈을 떼고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는 내가 마차에서 잠이 들었었지? 저택에 도착했을 때, 내가 입을 벌리고 잔 걸 알고는 기겁을 했었지.
“아하하하. 오늘은 별로 잠이 오지 않네요.”
“그래?”
테오도르는 뭔가 아쉬운 표정이었다.
내가 자는 모습이 얼마나 웃겼길래, 구경하지 못해서 아쉬운 표정까지 짓는 거지? 내가 무슨 이상한 잠꼬대라도 한 건 아니겠지?
혹시 내가 소설이니, 남주니 하는 소리를 지껄인 건 아닌가 싶어서 식은땀이 쭉 날 것 같았지만, 나는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꺼냈던 옷을 다시 차곡차곡 개기 시작했다.
앞으로, 절대로, 테오도르 앞에서 잠드는 일은 없을 거다!
“아, 이것도 넣어 둬.”
테오도르는 품속으로 손을 넣더니 작은 꾸러미 하나를 꺼냈다.
“그게 뭔가요?”
“보면 알아.”
그렇게 말하며, 테오도르는 내 쪽으로 그것을 툭 던졌다. 정확하게 내 무릎에 안착한 그것은 예쁜 분홍색 포장지로 싸여 있었다.
‘뭐지?’
예쁜 포장지라 찢어질까 조심하며 위쪽을 뜯자, 안쪽으로 언뜻 노란색이 비쳤다.
“어?”
포장 봉투가 든 손을 기울이자, 내 무릎으로 예쁜 연노랑 색이 쏟아져 내렸다.
내가 처음 갔던 가게에서 보았던 색깔이 예쁘다고 했던 연노란색 승마바지와 똑같은 색이었다.
“리본이네요?”
조심스럽게 리본을 집어 들자 매끈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마차의 창문 너머로 햇볕에 비추자 은은한 광택이 반짝였다.
귀족 영애들이나 할법한, 그런 리본이었다.
아주 예쁘고, 그만큼 비쌀.
“이건 언제 사셨어요?”
“아까 첫 번째 가게에서. 그 정도는 훈련하는데 걸리적거리지 않을 테니까.”
“훈련할 때 머리에 묶기엔 너무 예쁜데요.”
“아까는 그 치렁치렁한 드레스도 입고하겠다더니?”
“아, 그거야…….”
진짜 그 드레스를 입겠다는 건 아니었다고요! 그냥 그 대사를 해보고 싶었을 뿐이었지!
뭐…… 진짜로 사주면 좋긴 했겠다. 아마 엄청 비쌀 테고, 몰래 몇 벌쯤 비싸게 팔아도 테오도르는 모를 테니까.
“헤헤.”
반짝거리는 광택이 예뻐서, 손에 닿는 매끈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좋아서, 나는 리본을 매만지며 배시시 웃었다.
참! 넋을 놓고 리본을 구경하는 것보다 먼저 할 일 있었다.
“감사합니다, 테오도르 님. 정말, 너무 예뻐요.”
나는 진심을 담아서 인사했다.
내가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던 것도, 나 모르게 이런 선물을 준비한 것도, 모두 고마웠다.
“그럼…….”
내 인사를 받은 테오도르가 기대고 있던 등을 떼어내고, 몸을 천천히 내 쪽으로 기울였다. 테오도르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자, 내 눈도 점점 커졌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나지 않았던 백단향이 은은하게 나를 감쌌다. 향수 파는 곳을 지나는 길인 걸까? 아니면 꽃집?
하지만 바깥에서 나는 향기라면 벌써 사라졌어야 할 백단향은 여전히 내 코끝에 머물고 있었다. 문득, 이 향기를 이전에도 맡아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언제더라?
“내 선물이 고맙다면…….”
느릿하게 테오도르가 입을 열었다. 조금 더 내 쪽으로 바싹 고개를 내밀며.
바람을 타고 넘실넘실, 다시 백단향이 풍겨왔다.
‘테오도르의 향기야.’
그제야 나는 백단향의 정체가 테오도르에게서 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전에 그 백단향을 어디서 맡았는지도.
“부탁이 있는데…….”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백단향의 공기를 맡으며, 아찔한 키스를 나누었던 그 입술이었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온몸에 열이 오르고, 거친 숨결과 가쁜 호흡만을 연신 내뿜었던 그때, 맞닿은 피부에서 느껴지던 그 향기였다.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바싹 들어가서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우습게도, 다리는 반대로 완전히 힘이 풀려버린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어두운 숲속에서 야생의 짐승과 마주친 기분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그저 어둠 속에서 빛나는 짐승의 눈동자만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는.
“레나티스.”
붉은 자색의 눈동자가 나를 불렀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준비만 하고 있었다. 지금 테오도르의 눈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러하리라.
그가 무슨 말을 하든 기꺼이 따르리라.
“좀 자지 그래?”
무슨 말이라도 기꺼이…… 네?
나는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거 같아서 되물었다. 자라고? 잠? 슬리핑?
지금 테오도르가 내게 좀 자라고 부탁한 건가?
저렇게 진지한 태도로, 저렇게 섹시한 입술로, 저렇게 좋은 냄새를 폴폴 풍기면서?
“정말 안자?”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테오도르는 내가 반응이 없자 불퉁한 표정까지 지으며, 다시 한번 물었다.
그제야 정신이 바싹 차려졌다.
꺼져! 이 음란 마귀야! 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데? 뭘 원했는데? 테오도르가 제정신인데 왜 네가 미쳐서 날뛰어?
그리고! 너 요즘 왜 이렇게 자주 나타나? 스무 살 되자마자 이러기야?
“자, 잠, 오지 않는데요.”
겨우겨우 부서진 멘탈을 주워 담으며 내가 대답하자, 테오도르는 불퉁한 표정으로 마차의 벽에 다시 등을 붙였다.
대체 지난번에 내가 마차에서 어떻게 잤길래, 테오도르가 이렇게 내가 자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어 하는 걸까?
이제는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
테오도르는 자지 않는 내가 재미없다는 듯, 어느새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차의 밖에서 바람이 불자, 다시 은은한 백단향이 났다.
오늘의 테오도르는 이상했다.
갑자기 옷을 사주지를 않나, 이상한 이유를 대며 옷을 다 탈락시키지를 않나, 잠도 오지 않는 사람에게 자꾸 자라고 강요를 하지 않나.
그리고, 갑자기 예쁜 리본을 선물하지 않나.
“…….”
아직 무릎에 있는 리본을 다시 매만졌다.
테오도르보다 더 이상한 것은 나였다. 나는 이상한 테오도르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은 걸지도…….’
부드러운 리본의 촉감, 덜컹대며 굴러가는 마차, 은은한 백단향.
그리고 테오도르.
이 순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