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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57화 (57/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57

테오도르의 말대로 여기엔 나밖에 없었고, 테오도르의 손을 잡을 사람도 나밖에 없긴했다.

“그렇긴 한데…….”

하지만 내가 마차에서 내리면서 저 손을 잡는 게 맞나 싶어서 나는 우물쭈물했다. 이건, 마치, 그러니까…….

“좀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제가 테오도르 님의 에스코트를 받는 게요. 차라리 테오도르 님이 다시 마차에 올라오시고, 제가 길에 엎드려서 계단을 만드는 게 더 자연스러울 것 같은데요.”

“길바닥에 엎드려서 계단을 만든다고?”

테오도르는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비싼 구두에 흙탕물이 튀지 않도록 하인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귀족도 있다고 들었거든요.”

“첫째, 내 구두가 비싸긴 하지만 이 정도는 수십 켤레는 있어. 둘째, 지금은 날씨가 굉장히 화창하고, 흙탕물 따위는 없어. 셋째, 나는 하인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인성 파탄자가 아니야.”

테오도르는 차분하게 설명하려는 것 같았지만, 내 눈에는 숫자가 늘어날수록 그러데이션으로 화를 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저 안에서 안 보는 척하지만, 보고 있는 점원이 보이지?”

고개를 들자, 테오도르의 말대로 가게 안에는 연신 고개를 흔들며 이쪽을 주목하고 있는 점원이 보였다.

“적어도 내 에스코트를 받아서 가면, 네 차림이 그렇더라도 어디 가난한 귀족 영애나 가정교사 정도는 되는 줄 알 테니 지난번 같은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거야.”

테오도르는 지난번에 내가 가게 점원에게 쫓겨날 뻔했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얼른 잡아.”

“넵!”

나는 얼른 테오도르의 손에 내 손을 얹었다. 더 실랑이하다가는 진짜 그가 화를 낼 수도 있었다.

“좋아.”

내가 순순히 말을 들자, 테오도르는 만족스러운 듯이 빙긋 웃었다.

“들어가 보실까요, 레이디?”

테오도르의 말에 놀라 눈이 동그랗게 뜰 새도 없이, 그의 손에 이끌려 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웃기게도 테오도르의 그 말 한마디에 괜히 내 걸음이 사뿐사뿐해졌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주 깍듯한 인사가 우리를 맞이했다. 나는 당연히 그것이 테오도르를 향한 인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부드럽게 테오도르에게 눈인사하고 나서, 똑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깍듯한 인사는 나를 향한 것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세상에?’

지난번 드레스샵에서 없어 보인다고 내쫓겼던 나였기에, 이런 환대가 당황스러웠다.

왜냐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없어 보일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냥 가난했다.

테오도르는 ‘봤지?’라는 듯, 내게 눈짓을 해왔다. 그의 말대로 에스코트가 엄청난 효과를 냈다.

“어떤 걸 찾으실까요? 귀여운 숙녀분께 어울릴 가을 드레스는 이쪽에 있답니다.”

세상에!! 나한테 귀여운 숙녀분이라고 했어!

수도의 드레스샵답게 아주 세련된 점원이 나를 그렇게 칭하자, 저절로 내 얼굴이 붉어졌다.

살면서 아스텔라 언니 말고 나한테 저런 말을 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아스텔라 언니도 나한테 귀엽다는 말은 했지만, 숙녀라고 말한 적은 없었는데!

“일단 좀 둘러보지.”

잘생기고 멋지다는 말을 살면서 대략 337,525번쯤 들어보았을 테오도르는 내가 이렇게 감동하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무뚝뚝하게 점원에게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가게 안을 쓱- 둘러보았다.

“골라봐.”

마치 이 가게를 통째로 사주기라도 할 것처럼 테오도르는 말했다. 카르오 대공가의 재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남주가 괜히 남주겠는가?

“정말 사주시는 건가요?”

“내가 한 입으로 두 말할 것 같아?”

물론, 아니었다. 피폐물 남주가 그런 가오 없는 짓을 할 리 없었다.

나는 몸을 돌려 화려한 드레스들을 보았다. 그리고 전생에서 내가 읽었던 소설 속에서 내가 기억하는 가장 아름다운 대사를 하기로 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전부! 로 하겠습니다.”

내 발언에 옆에 살짝 떨어져 있긴 했지만, 부르면 언제든 다가올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점원의 눈이 커졌다. 소설 속에서 점원들이 모두 그랬던 것처럼.

꺄하! 내가 이 대사를 할 수 있는 날이 오다니! 가난한 집에 여주 동생으로 태어나서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돈이 최고야! 짜릿해!

“…… 미쳤어?”

서늘한 목소리가 감격해하고 있는 내게 찬물을 쫙 끼얹었다.

“이 드레스들이 돈이 얼마인지 알아? 전에 자기 돈으로 고르라고 할 때는 극구 사양하더니 사준다고 하니까, 뭐? 여기에서부터 저기까지? 그런 졸부 같은 멘트는 어디서 배운 거야?”

아…… 전생에 책에서 배웠는데요…….

당연히 도끼눈을 뜬 테오도르에게 그렇게 대답하지는 못했다. 지금 이 대답을 했다가는 그따위 책을 다 불살라버리겠다고 말할 것 같았다.

“거기다가 훈련하기에 편한 옷을 사주겠다고 했는데, 저렇게 보기만 해도 몸에 꽉 끼어서 불편하고, 살에 닿으면 가려울 것 같은 레이스가 치렁치렁하게 달린 드레스를 골라?”

서늘한 테오도르의 눈초리와 그것보다 더 서늘한 목소리에 내 어깨는 한없이 좁아졌고, 시선은 오갈 데 없이 바닥을 향했다.

언뜻 보니 죄 없는 점원도 덩달아 나와 똑같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이 상황에서 유쾌해 보이는 것은 오직 테오도르의 뒤에서 열심히 웃음을 참느라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입술에 경련이라도 온 것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인스트뿐이었다.

남의 일이라 이거지!

“움직이기 좋은 옷이 필요한데?”

테오도르는 한참을 나를 노려보다가 겨우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나는 겨우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혹시 야외활동이라도 하시려는 건가요?”

“그래.”

“요즘 레이디들 사이에서 다이어트에도 좋고, 바른 자세를 만들어주는 승마가 유행이죠. 저희 매장에도 예쁜 승마복이 마련되어있습니다.”

점원은 활짝 미소를 띤 얼굴로 가게의 한쪽으로 안내했다. 가게를 가득 채운 색색의 드레스들 대신, 무채색 계열의 차분한 옷들이 걸려있는 공간이었다.

“요즘 잘나가는 신상은 바로 이거랍니다.”

나란히 걸려있는 많은 옷 중에서 꺼낸 하나는 빨간색의 바지였다. 전에 백작 뭐시깽이 영애가 지금 빨간색이 유행한다더니, 진짜인 모양이었다.

좀 색상이 과한 것 같긴 하지만, 유행이라니까 어디 한번?

“색이 너무 야하군.”

그 빨간 바지를 향해서 슬그머니 뻗어나가던 내 손은 테오도르의 한마디에 덜컹 공중에 멈춰서고 말았다.

“다른 건?”

아니, 잠시만요! 제가 입을 옷이잖아요? 제 의사는 참고하지 않으시나요?

……라기엔, 물주는 테오도르였다. 나는 조용히 뻗었던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럼 이런 스타일이 좋으실까요?”

그녀가 두 번째로 꺼낸 것은 고동색으로 색상은 매우 무난했다. 다만, 내가 입기에는 다소 타이트해보이는 바지였다.

“좀 작은 것 같은데?”

“지금은 이런 타이트한 승마복이 유행…….”

“다른 것.”

점원의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테오도르는 가차 없이 그 옷을 탈락시켰다. 이번에는 내가 손을 뻗기도 전이었다.

“그럼 이런 스타일은 어떠신가요?”

이번에 그녀가 꺼낸 것은 나한테 적당할 것 같은 사이즈의 연한 노란색 바지였다.

오! 이거라면 정말 괜찮을 것 같은데?

“색깔이 아주 예쁘네요. 입어볼까요?”

나는 테오도르가 또 거절해버리기 전에 얼른 점원에게서 옷을 낚아챘다.

슬쩍 앞에 대어보자, 색깔도 내 머리카락 색과 잘 어울렸고 그렇게 타이트하지도 않아서 편할 것 같았다.

“입어보고 올…….”

“안돼.”

나는 웃으며 테오도르에게 입어보고 오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이번에도 테오도르는 정색하며 안된다고 말했다.

“이건 왜요?”

“길이가 짧아.”

……네? 이게요?

나는 다시 한번 옷 위에 대어진 바지를 살펴보았다. 바지는 분명 긴바지였다. 허벅지도, 무릎도, 종아리도 다 가리는.

그런데 이게 짧다고?

“아, 원래 그런 디자인이랍니다. 9부 스타일로 발목이 보이는 귀여운 디자인이죠.”

점원은 옷이 잘못 만들어진 것이나, 사이즈가 안 맞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런 옷이라는 것을 친절히 웃으며 설명했다.

“원래 그런 디자인이래요.”

그리고 나도 옆에서 거들었다.

“안돼.”

하지만 테오도르는 여전히 단호했다.

“발목이 보인다잖아.”

이제 살짝 짜증까지 섞인 테오도르의 말에 나는 눈을 끔벅였다.

“발목이 보이는 게 어때서요?”

“그야…….”

무슨 말을 하려던 테오도르는 입을 다물고, 대신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튼 안돼.”

“하지만 이건 색깔도 마음에 들고, 테오도르 님이 원하시는 편한 바지인데요?”

“다른 걸로 골라 봐.”

테오도르는 손까지 내저으며 얼른 그 옷을 치워버리라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고르긴 뭘 고른단 말인가?

색이 야해도 안 되고, 너무 몸에 붙어도 안 되고, 발목이 보여서도 안 되는, 그런 바지가 어딨는데?

게다가 색이 야하다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색깔에 무슨 성별이 있거나, 노출이 있는 것도 아닌데!

사준다고 해놓고선, 사실은 사주기 싫어서 이러는 거 아니야?

걸려있는 바지들을 뒤적거려보지만, 테오도르가 원하는 옷이 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테오도르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네가 알고 있는 옷가게는 없나? 기사나 견습생들이 자주 찾는?”

찌푸린 인상으로 옷을 노려보고 있던 테오도르는 고개를 돌려 인스트를 쳐다보며 말했다.

“있긴 합니다만, 여성복은 거의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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