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54화 (54/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54

“앉아.”

단호한 명령이었다.

이제까지 쓰고 있던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고상한 귀족적인 가면을 거두고, 테오도르는 지극히 고압적이고 냉철한 얼굴을 드러냈다.

그의 자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까지 겉으로나마 예의를 차린 것은 멍청한 딸을 둔 죄밖에 없는 파블로 백작을 위한 것이었다.

애초에 레나티스를 건드린 플리케에게 존중이나 배려 따위는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테오도르가 그녀를 보자마자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한 것이었다.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어슬렁거리면, 다시는 걸을 수 없도록 네 다리를 부러뜨려주겠어. 아니, 아예 발목을 잘라버리는 게 낫겠군. 너같이 수치를 모르는 계집애는 절뚝거리면서도 내 앞에 그 천박한 몸뚱이를 들이대러 올지도 모르겠으니까 말이야.”

아름다운 입술이 지독하게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백작. 당신은 딸 간수를 잘해야 할 거야. 이 꼴 같지도 않은 저택이 불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무, 물론입니다. 테오도르 경.”

장사꾼의 면모가 있는 파블로 백작은 돌아가는 상황을 이미 다 파악한 뒤였기에 테오도르의 말에 더 토를 달지 않고 냉큼 대답했다.

“다시는 내 눈에 띄지 않도록 어디 수도원에 처박든가, 멀리 외국으로 보내버려. 기한은 2주를 주지.”

“2주는 너무 촉박…… 아, 아닙니다. 그러겠습니다.”

하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시간의 말미를 달라는 청이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싸늘한 눈빛으로 거절을 말했고, 파블로 백작은 얼른 대답했다. 지금의 테오도르에게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테오도르 님…….”

볼일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테오도르를 플리케가 불렀다.

아버지가 자신을 기꺼이 치워버리겠다고 말한 이 치욕적인 상황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홱 들어 테오도르를 쳐다보기까지 했다.

“그깟 천한 계집애 때문에 이러시는 겁니까?”

저 주둥이를 찢어버릴까?

아주 잠깐, 테오도르는 그러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다.

“그 계집애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하지만 그 욕망을 눌러 참은 것은 뒷수습이나 소문을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레나티스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물리고 나서, 아픈 것이 싫다고 했었다. 어제는 낯선 남자에게 납치당할 뻔했고, 괜찮다고 말하면서 손을 덜덜 떨기까지 했었다.

레나티스가 오후 차 시중을 위해 자신의 방에 왔을 때, 자신에게서 피 냄새를 맡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여자에게 미치지 않으면, 내가 미치니까.”

* * *

차가 담긴 찻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붓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어?”

순간, 내 눈에 보인 무언가에 나는 당황스러운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테오도르의 얼굴에서 낯선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으어어어!”

저게 뭔가 싶어서 쳐다보는 동안에 물이 넘치고 말았다. 주전자에서 흘러넘치는 뜨거운 물에 나는 재빨리 손을 올리며 뒤로 물러섰다.

“괜찮아?”

테오도르까지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네. 괜찮아요.”

다행히 빨리 손을 올린 덕분에 넘친 물은 그리 많지 않았고, 그나마도 왜건의 쟁반 위라서 비싼 카펫을 적시지도 않았다.

나는 어제 내가 앉아 있느라 젖어버린 테오도르의 방에 있던 카펫의 가격을 듣고 눈이 튀어나올 뻔했었다.

오늘 또 카펫을 젖게 했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눈이 튀어나올지도 몰랐다.

“전 괜찮은데, 테오도르 님 얼굴이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요?”

가까이에서 보자 부어오른 붉은 색 자국이 더 확실하게 보였다. 멍이 확실했다.

이건 아버지에게 많이 맞아본 내가 잘 알았다. 색깔로 봤을 때…… 어젯밤이나 오늘 아침 정도에 생긴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 잠깐 봤을 때, 테오도르의 얼굴에 멍이 있었나?

없었던 것 같은데, 워낙 짧게 봤던 터라 확실할 수는 없었다. 어제 낮에는 없었던 것은 확실했다.

“외출하셔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넘친 물을 조심조심 따라내며, 나는 테오도르에게 물었다. 다시 차를 준비해서 와야 할지, 이대로도 괜찮을지 조금 고민스러웠다.

“뭐, 조금.”

그리고 귀찮으니 이대로 우리는 것으로 결정했다. 차가 조금 연해지긴 하겠지만, 금방 물을 따라냈으니 아주 조금일 거다.

리타 아주머니가 봤으면 기겁할 일이겠지만…… 뭐, 리타 아주머니는 지금 자리에 없으니까.

“아프시겠다.”

“별거 아니…….”

다른 데도 아니고 저 잘생긴 얼굴을 어쩌다 다쳤나 싶어서 나는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잘생긴 얼굴에 흠집이 나는 것은 속상했다.

한껏 속상함을 담은 내 목소리에 별것 아니라고 말하려던 테오도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멈칫했다.

“응. 아파.”

그리고 빛의 속도로 말을 바꿨다. 분명 조금 전에 별거 아니라고 말하려고 한 것 같았는데? 거기다가 순순히 아픈 것을 아프다고 말하는 피폐 남주라니?

나는 기묘한 생물체를 보는 것 같은 눈으로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테오도르도 내 시선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듯 슬쩍 눈길을 피했지만, 이내 고개를 빳빳이 들고 눈을 부릅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나는 당당하다! 당당하게 아프다고! 라고 말하는 거처럼.

핫! 혹시! 이건! 내 힐링 프로젝트의 결과인 걸까?

사실 별로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계속 테오도르에게 심신 안정을 위한 차를 끓여주었고 좀 더 마시라고 권유했다.

테오도르는 선선히 하루에 두 잔씩 차를 마셨다.

그 효과가 드디어 나오는 건지도 몰랐다.

테오도르가 피도 눈물도 없는 피폐물 남주에서 따스한 힐링물의 남주가 되고 있었다!

“오르디 님에게 연고를 가져다 달라고 할까요? 아니면, 얼음찜질해드릴까요?”

“연고라면 저쪽에 있어.”

테오도르의 손가락을 따라서 시선을 옮기자 갈색 머리의 귀여운 남자애가 울다가 웃는 표정이 그려진 연고가 보였다.

“…….”

나는 여기서 또 한 번 할 말을 잃었다. 우리 피폐물 남주가 이런 귀여운 통에 담긴 연고를 바른다고? 전혀 어울리지 않잖아!

감히 나더러 이런 귀여운 연고를 바르라는 거냐며 집어던져야 정상이 아닌가? 아니, 테오도르는 그런 성격파탄자는 아니긴 했지만, 적어도 무서운 눈초리로 노려봐서 알아서 연고를 치우게 만들었어야 할 것 같은데…….

역시, 이것도 나의 힐링 프로젝트의 효과인 걸까? 테오도르가 귀여운 것도 받아들이게 만든?

‘좋아! 잘 되어가고 있군.’

나는 연고의 소년처럼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연고를 가지고 테오도르의 곁으로 돌아오자 아까보다 차의 향기가 더욱 진하게 났다.

“차를 먼저 드릴게요.”

더 우렸다가는 쓴맛이 날 것 같아, 조심스럽게 차를 따랐다. 맑은 다홍색의 액체가 오늘따라 어여뻤다.

후훗. 네가 테오도르를 힐링물 남주로 만드는 일등 공신이었구나!

오늘도 두 잔을 권해야지. 아니, 오늘은 물을 많이 넣는 바람에 세 잔도 나올 것 같은데, 세 잔까지 권해봐야겠다.

“어……. 그러니까…….”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전에 오드리가 날 치료해주었을 때, 거즈와 핀셋을 이용해 아주 위생적으로 치료해주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뭘 찾아?”

“연고를 바를 도구요.”

“손으로 바르면 되잖아.”

“그래도 돼요? 여기선 핀셋과 거즈로 하는 것 아니었나요?”

나는 귀족들은, 혹은 귀족 저택에서는 다 그러나보다 했었다.

“그건 오르디만 그래. 리타는 예전부터 손으로 발라줬었어.”

“아아~ 그렇군요.”

테오도르의 말에 나는 쉽게 수긍했다. 하지만 핀셋과 거즈가 있다면 엉터리 치료사인 나도 제법 프로페셔널해보일텐데 아쉬웠다.

덜렁이인 내가 메이드복을 입으면 어쩐지 차분해 보이는 효과가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 발라 드릴게요.”

나는 연고의 뚜껑을 열고 손으로 크림 제형의 연고를 듬뿍 떠서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흠칫 놀랐다.

테오도르는 눈을 감고, 고개를 살짝 내 쪽으로 내밀고 있었다. 마치 키스를 기다리는 것 같은 유순한 자태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이쪽은 환자라고 환자!’

속으로 내 안의 음란 마귀의 정수리를 쥐어박으며, 조심스럽게 테오도르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빨갛게 부어오른 광대뼈에 내 손이 닿자 테오도르가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아파요?”

딴에는 살살 한다고 했는데, 다친 테오도르에게는 아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아파.”

이번에도 테오도르는 순순히 아프다고 시인했다.

아니, 대체 어떤 놈이 이 잘생긴 얼굴을 이렇게 만들었담? 거기다가 이 자리는 특히나 멍이 잘 드는 자리인데, 꼭 노린 것처럼 여기를 딱 때린 거지?

“지금도 아파요?”

나는 최대한 손가락에 힘을 빼고, 살살 원을 그렸다.

부드러운 연고 때문에 손가락은 매우 원활하게 움직여졌고, 부어오른 테오도르의 피부가 선연하게 느껴졌다.

“응.”

“어휴, 어쩌면 좋아.”

여전히 아프다는 테오도르의 말에 나는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누군가에게 맞는다는 것이 얼마나 아픈지 나도 알고 있었다.

그건 몸만 아픈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얻어맞았다는 굴욕감,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의 무력감, 그리고 좀 더 나은 상황을 만들 수는 없었을까 하는 자괴감까지.

“아!”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