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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53화 (53/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53

카르오 대공가 후계자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파블로 백작저는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어머나, 테오도르 님. 이렇게 갑자기 방문하시다니요. 미리 말씀을 하셨으면 제가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요.”

그렇게 말하며 테오도르를 맞이하는 플리케의 몸치장은 완벽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테오도르가 오는 줄 알았으면, 더욱 완벽하게 준비했을 것이다.

가볍게 땋은 머리가 아니라 목선이 드러나도록 우아하게 올림머리를 했을 것이고, 화려한 드레스가 아니라 고상한 드레스를 입었을 것이다.

장차 대공비가 될 레이디의 품격에 걸맞도록.

“아닙니다. 갑작스럽게 방문하였는데, 이리 맞아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창밖의 정원을 보고 있던 테오도르는 플리케의 목소리에 비로소 뒤돌아보았다.

“어머, 테오도르 님! 얼굴이…….”

잘생긴 테오도르의 얼굴에서 보이는 선명한 폭력의 흔적에 플리케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정작 당사자인 테오도르는 그저 슬쩍 미소 지을 뿐이었다.

“아아! 테오도르 경!”

“아버님?”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파블로 백작이 들어오자 플리케는 마치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는 듯이 말했다.

“오! 플리케. 너도 와있었구나.”

하지만 파블로 백작은 오히려 플리케가 있는 것을 보고 환히 웃었다.

안 그래도 요즘 딸아이가 카르오 대공비와 교류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플리케를 며느릿감으로 점찍었다는 소문도 알았다. 물론, 그는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저명한 카르오 대공가의 사돈이 된다니!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이었다.

“저는 테오도르 님께서 저를 만나러 오신 건 줄 알았는데, 아버님과 긴히 할 말이 있으셨던 건가요?”

“아닙니다. 제가 두 분을 함께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갑자기 파블로 백작저를 찾아온 겁니다. 자, 앉으시지요.”

테오도르는 마치 파블로 백작저의 손님이 아니라 자신이 이 집의 주인인 것처럼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조금도 무례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명령하고, 권유하며, 제 말을 따르게 하는데 재능이 있었다. 실제로 파블로 백작과 플리케는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 얼굴은 어떻게 된 것이오? 보아하니 넘어져서 생긴 상처는 아닌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이것 때문에 제가 두 분을 뵙자고 한 것입니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방문 목적을 꺼냈고, 그의 얼굴 상처와 자신들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는 파블로 부녀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하지만 서로의 얼굴에서 영문을 모른다는 표정을 읽은 두 사람은 다시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다름이 아니라 어제 저희 저택에 쥐새끼 한 마리가 숨어들었습니다.”

테오도르가 서문을 열었건만, 파블로 부녀는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 희미하게 플리케의 눈에서 의혹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야말로 아주 희미했고 아주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어허! 그럼 그 쥐새끼가 감히 테오도르 경을 물기라도 했던 말이오?”

“네. 그렇습니다.”

“어지간히 간 큰 쥐새끼인가 보군!”

파블로 백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카르오 저택에 숨어든 것만으로도 간이 크다고 할 텐데, 감히 카르오의 후계자 얼굴을 저렇게 만들어? 이건 간이 큰 것이 아니라 거의 제 배를 스스로 째고 간을 가져가 달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쥐를 잡는 것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오?”

파블로 백작은 그렇게 질문하긴 했지만, 그것은 아니리라 짐작했다. 상대는 카르오 대공가였다. 파블로 백작가보다 훨씬 커다란 권력과 더불어 사병을 가진.

거기다가 상대는 쥐새끼 한 마리였다. 고작 쥐 한 마리 잡자고 외부에 도움을 청할 리가 없었다.

“아니요. 쥐는 이미 잡았습니다.”

역시나.

테오도르의 대답에 파블로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잡고 보니, 이게 주인이 있는 쥐더군요.”

그렇게 말하며 테오도르는 파블로 백작에게 향해있던 시선을 플리케에게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플리케는 거의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평소에 꽃같이 화사했던 미소라기보다는 만들어놓은 조화처럼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미소였다.

‘그럴 리 없어.’

플리케는 제 안에서 솟아오르려는 불길함을 억지로 꾹꾹 눌렀다.

자신이 카르오 저택에 쥐 한 마리를 몰래 풀어놓긴 했다.

하지만 자신이 명령한 것은 그 재수 없는 분홍 머리 계집애를 치워버리는 것이었지, 테오도르의 얼굴에 흠집을 내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러니, 테오도르가 말하는 쥐새끼는 자신의 쥐가 아니라고 플리케는 스스로에게 주장했다.

“플리케 양.”

하지만 플리케의 자기최면과 같은 주장은 테오도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단번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의 호명에 플리케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굳혀버리고 말았다.

한 번도 남에게 지적받은 적이 없고, 누군가에게 거짓말을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자란 귀족 영애인 플리케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순진했다.

“지난번에 제가 영애를 위한답시고 우회적으로 말했더니, 말귀를 알아 처먹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테오도르의 말투가 너무나 정중했고, 발음이 고상했던 탓에 플리케와 파블로 백작은 그의 말속에 숨어 있는 비속어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영애께서 외모에만 신경 쓰는, 머리가 텅텅 빈 여자라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그렇게 돌려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 주변에 껄떡대지 말고, 꺼지라고 직접 말씀을 드렸어야 하는 것이었는데요.”

두 사람이 테오도르가 독설을 내뱉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그가 마저 말을 다 하고 나서였다.

“이, 이보시오, 테오도르 경. 말씀이 지나치지 않소?”

“말씀이 지나치다니요? 그 말을 자식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백작님께 돌려드려야 하겠습니다. 대체 뭐가 그렇게 바쁘시길래 따님께서 그따위 미친 짓거리를 하고 돌아다니도록 놔두셨습니까? 그따위로 행동하다가 멸문이라도 당하시면 어쩌시려고요.

가문도, 재산도, 작위도 다 잃고 나면, 백작님께서는 늙고 힘없는 몸뚱이밖에 남지 않으실 텐데요.”

마치 파블로 백작 가문을 걱정이라도 하는 말투로 테오도르는 말했다.

물론, 말투만 그랬을 뿐. 속 내용을 보자면, 가문을 멸문시켜버리겠다는 협박과 백작에 대한 조롱이었다.

“영애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지금은 알량한 가문과 돈을 믿고 마치 들판에 쏘다니는 미친년처럼 휘젓고 다니시는데, 사람 봐가면서 미친 짓거리를 하셨어야죠.”

여전히 우아하고, 교양이 넘치는 말투로 테오도르는 독설을 내뱉었다.

“플, 플리케?”

파블로 백작은 고개를 돌려 딸의 이름을 불렀다. 당황한 나머지 수천, 수만 번을 불렀을 그 이름을 더듬기까지 했다.

테오도르의 행동과 말을 봐선 감히 카르오의 후계자 얼굴에 흠집을 낸 쥐새끼를 보낸 정신 나간 작자가 바로 자신의 딸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지금, 테오도르 경이 하는 말씀이…… 그러니까…….”

차마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못하고, 파블로 백작은 어물댔다.

테오도르는 부녀 둘이서 이야기를 한번 해보라는 듯, 너그러이 기다려주었다.

비록 그 속마음은 어디 한번 무슨 말을 지껄이나 지켜봐 주겠다는 심보였을지라도 말이다.

“오해십니다.”

잠깐 흔들리긴 했지만, 플리케는 마음을 다잡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버님, 그리고 테오도르 님. 모든 건 다 오해이십니다.”

사실이었다. 일이 어디서부터 어그러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명한 것은 그 분홍 머리 계집애를 저택에서 없애라는 것이었지 테오도르에게 어떤 짓을 하라는 말은 절대로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것은 전부 오해였고, 자신은 잘못이 없었다.

“제가 오해를 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어떤 점이요? 영애께서 더러운 쥐새끼와 어울리는 악취미를 가졌다는 것이 오해입니까? 아니면 감히 지금 누구한테 대드는지도 모르는 멍청한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해입니까? 아! 그게 아니라면 주제도 모르고 감히 대공비 자리를 탐내는 아둔한 여자라고 생각한 것이 오해일 수도 있겠군요. 영애께서는 아둔한 여자가 아니라 그저 탐욕스럽고 천박한 분인 것 같으니까요.”

“테, 테오…….”

자신을 향한 신랄한 모욕에 플리케의 입이 벌어졌다.

그것을 막아보려 겨우겨우 떨리는 입술을 벌렸지만, 테오도르는 그녀의 말 따위 듣고 싶지 않았다.

“당신 뒤에 그 여자가 있다는 것도 압니다. 있는 거라곤 드레스와 보석, 그리고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머리밖에 없는 당신에겐 카르오 저택의 행사를 미리 알고 드나드는 사람을 좌지우지하는 힘 따위 없을 테니, 분명 내부에서 누군가 도와줬겠죠. 하지만 한 가지 아셔야 할 겁니다. 그 여자에게 당신은 그냥 종이 인형일 뿐입니다. 좀 가지고 놀다가 쓰레기통에 처박힐. 하긴, 당신에겐 거기가 더 어울릴 것 같긴 하군요.”

“테오도르 님!”

결국, 플리케는 참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한 모욕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야 말았다.

평생을 백작 영애로 살아온 플리케는 이러한 모독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귀족 영애로 떠받듦에 익숙한 그녀의 인내심은 그리 길지도 않았다.

“앉아.”

그리고 테오도르 또한 그건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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