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52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 빛을 내는 것은 한 자루의 초뿐이었다. 초는 빛을 만들어냈고, 빛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감옥의 벽에 비친 그림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촛불이 흔들리는 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길을 잃은 것뿐입니다.”
남자는 조금 전에 했던 이야기를 또 반복했다.
“정원사 보조로 본채에 일하러 왔다가, 길을 잃고 그곳까지 가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테오도르와 인스트는 그 이야기를 또 듣고 있었다.
“제가 원래 길치인지라 별채까지 간 것을 몰랐습니다. 저는 그냥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
남자의 말이 끝나고, 테오도르는 말이 없었다. 그저 감흥 없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의자에 묶여 있긴 했지만, 남자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듯 조금 피곤해 보였고, 수염이 거뭇하게 자라나긴 했지만 멀쩡했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제 이자와 마주했던 레나티스는 두려움에 그 작은 몸을 떨었다. 예기치 못하게 제 몸을 테오도르에게 보여주고는 몹시 당황하기까지 했다.
자신 역시 어젯밤에는 화를 삭이느라, 그리고 욕망을 삭이느라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모두 이 자가 레나티스 앞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눈알을 하나 파내고 시작할까?”
머릿속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그만 툭, 하고 입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저놈이 레나티스의 젖은 몸을 봤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지극히 옳은 행동이었다.
적어도 테오도르의 관점에서는 그랬다.
테오도르의 말을 들은 남자는 눈을 크게 뜨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기, 길을 잃은 것이 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최선을 다해서 침착하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는 뱀의 혓바닥처럼 갈라져서 나왔다.
“부녀자 납치는 죄일 텐데.”
“부녀자 납치라니요? 그저 마주친 장소가 공교로웠을 뿐입니다.”
“그 마주친 하녀의 말은 다르던데?”
“그 하녀가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남자의 거짓말에 테오도르는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감히 네깟놈이 레나티스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여?’
놈의 눈알보다 혓바닥을 먼저 어떻게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할 만큼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럼 그 하녀의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그, 그야, 카르오 저택에 분홍 머리 마녀가 하녀로 들어왔다는 소문이 났으니까요. 자기 엄마 이름은 몰라도 그 하녀 이름은 다들 알 겁니다.”
“다들이라는 게 누구지?”
“그야…… 그냥…… 다들이죠. 이 근처에 사는 사람은 다 알 겁니다.”
“그럼, 너도 이 근처에 살고?”
“네.”
“너를 사주한 사람도 이 근처에 살겠군?”
“네. ……아, 아니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저는 길을 잃은 겁니다!”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남자는 제가 방금 무슨 말에 고개를 끄덕인 것인지를 금방 깨닫고 질겁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그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을 뿐이었다.
남자의 말대로 상황은 매우 공교로웠다.
어쩌다 보니 본래 경계가 삼엄한 카르오의 저택에, 마침 대청소인지라 다들 바쁜 날에, 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정원사의 보조 자격으로 겨우 신원확인만 된 자가, 우연히 길을 잃어, 하나의 저택이라고 보기에도 어려운 이 먼 별채까지 오게 되었고, 레나티스의 일과 중에 하나인 욕실에서, 하필이면 아무도 없을 때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우연이라고 믿을 수 있다면, 그자는 인간의 선함을 믿는 성자이던가, 지독하게 멍청한 바보였다.
물론 테오도르는 성자도, 바보도 아니었다. 그는 누군가가 이자를 사주했고, 그가 일을 제대로 실행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계획한 것이 분명했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널 사주한 자가 누구지?”
“저는 그냥 길을 잃었을…….”
“인스트.”
이미 다섯 번쯤 했던 이야기를 남자는 또 반복하려 했다.
테오도르의 인내심은 제법 긴 편이었지만, 더는 듣기가 짜증스러웠다. 그래서 조용히 인스트를 불렀다.
“네.”
인스트는 짧은 대답 후에 조용히 몸을 틀어 남자를 쳐다보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남자는 황급히 고개를 틀어 인스트를 바라보았다.
이제껏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인스트를 남자는 줄곧 경계하고 있었다.
자신의 입에서 무언가 말을 꺼내려고 무력을 쓴다면 앞에 있는 고귀하신 카르오의 후계자가 아니라, 말 없이 서 있는 건장한 남자일 것을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입을 열 순 없지.’
남자는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처음에 이 일을 들었을 때는 내키지 않았다. 귀족의 저택에 들어가 여자를 납치하라니? 잡히면 무슨 험한 꼴을 당하려고?
하지만 그 여자가 귀족이 아니라 하녀라는 말에 한번, 마녀라 일당 외에 별도의 큰돈을 챙길 수 있을 것이라는 말에 또 흔들렸다.
거기다가 그가 저택에 들어가는 방법을 다 마련해주고, 쉽게 그녀를 납치할 수 있도록 손까지 써줄 것이라는 말에 결국 남자는 수락했다.
만약, 잡히더라도 그저 길을 잃은 것이라고 잡아떼면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말도 그의 든든한 아군이었다.
고작해야 하녀였다. 마녀니 마법이니 하는 미신을 믿지 않는 그에게는 머리카락 색이 좀 특이한 하녀일 뿐이었다.
“오른손잡이로군.”
“네? 아, 네. 그렇습니다.”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던 인스트가 뜬금없는 말을 하자,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
하지만 이내 그게 별 문제 될 것 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곤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그러자 인스트는 별 말없이 의자에 묶여 있는 그의 손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역시!’
인스트가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풀어주려 하자 남자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자의 말이 옳았다. 하찮은 하녀에게 약간의 해코지를 하려고 한 벌은 가벼웠다. 자신이 우기면 어쩌지 못할 만큼 별것 아닌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저는…….”
얼른 인스트에게 감사의 말을 건넨 남자는 뭔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그의 오른손을 풀어준 인스트가 왼손도 마저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워진 자신의 오른손을 단단하게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앉아서 꼬치꼬치 캐묻던 테오도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게 무슨 일인지 몰라 남자는 테오도르와 인스트를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았다.
남자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테오도르는 성큼 한 발을 내밀었다. 남자의 오른쪽, 그러니까 인스트가 남자의 오른쪽 손을 들고 있는 쪽으로.
“으읏!”
인스트가 남자의 팔뚝 어딘가를 세게 누르자, 남자의 손이 저절로 오그라들며 주먹이 쥐어졌다.
그 순간, 인스트는 거침없이 그 주먹으로 얼굴을 들이대고 있는 테오도르의 얼굴을 후려쳤다.
테오도르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갈 정도로 아주 세게.
“으어어어!!”
남자는 자기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었다. 자기가 미친 게 아니라면 방금 기사가 카르오의 후계자 얼굴을 후려쳤다. 자기의 주먹을 도구 삼아서.
아무도 믿지 않을 상황이었다.
“지, 지금, 이게, 뭐, 뭐, 뭐 하는…… 어어?”
어찌나 당황했던지 남자의 입에서는 제대로 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감히, 날 쳤겠다?”
“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카르오의 후계자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하자 그의 머릿속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아니, 아니, 제가 그런 것이 아니라, 이분이 그런 겁니다!”
“감히 테오도르 드 카르오의 얼굴을 치다니, 아주 배짱이 두둑한 자로군.”
“아니, 제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분이! 이분이 강제로!”
“물론, 뒷일은 다 감당할 생각으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겠지?”
남자는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보려 했지만, 테오도르는 전혀 듣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인스트. 너도 똑똑히 봤겠지?”
“물론입니다. 이자의 주먹이 고귀하신 테오도르 님의 얼굴을 쳤습니다.”
인스트마저 시치미를 뚝 떼며 사실이 아닌 사실만 이야기했다.
“인스트. 귀족의 신체에 위협을 가한 자는 즉결심판이 가능하지?”
“물론입니다. 더욱이 카르오 대공가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재판소에서도 전혀 문제 삼지 않을 겁니다.”
“아, 아니!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테오도르와 인스트는 마치 남자가 이 자리에 없는 것처럼 자기들끼리만 대화했다. 덕분에 남자는 더 미쳐버릴 것 같았다.
“자, 이제 선택의 시간이야.”
깎아놓은 조각처럼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었던 것은 그저 과거인 것처럼, 테오도르의 왼쪽 광대는 불그스름했을 뿐만이 아니라 살짝 부풀어 올라 있었다.
아마도 내일쯤이면 울긋불긋하게 멍이 올라오리라.
누가 봐도 누군가에게 맞은 것 같은 위치였고, 상처였다. 싸움 꽤 해봤던 남자도 그 사실을 알았다.
“귀족의 신체에 위해를 가한 벌로 여기서 죽던가.”
테오도르의 말에 당황해서 흔들리던 그의 눈이 문득 지하 감옥의 바닥 어딘가에 고정되었다.
일렁이는 횃불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적갈색의 자국은 분명 피였다.
“아니면,”
남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테오도르는 그의 고개를 돌렸다. 이미 두려움에 사로잡혀 버린 눈동자가 서늘한 보라색 눈동자와 마주했다.
“부녀자 납치 미수 건으로 경비대에 살아서 넘겨지던가.”
과연 여기에 선택사항이 있던가?
“어느 쪽이야?”
아니. 없었다.
남자는 완벽한 함정에 빠졌다.
“마, 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