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50
‘뭘 참고 있는 건데요?’
라고 물을 뻔했다. 하지만 왠지 그 말을 내뱉으면 안 될 거 같았다. 그 질문은 내가 내 무덤을 파는 길이라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촉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수년간 19금 피폐물을 읽어 온 전생의 촉이.
‘묻지 말자.’
결국, 나는 테오도르의 품에서 내리기를 포기했다. 거기에 더해서, 그의 말대로 꿈틀거리지도 않기로 했다.
“…….”
나는 무슨 소리라도 내면 테오도르가 반사적으로 내 쪽으로 고개를 내리기라도 할까 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그리고 테오도르는 목각인형처럼 뻣뻣한 자세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나를 안아 든 테오도르가 가까운 그의 침실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리고, 방안으로 들어서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
“…….”
나는 부끄러움에 필사적으로 테오도르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고, 테오도르는 나를, 정확하게는 내 몸을 보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었다.
“이, 이제 내려주셔도 되는데요.”
테오도르는 방에 들어와서도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 그래.”
그제야 테오도르는 나를 내려주었다. 여전히 목은 빳빳하게 들고, 시선은 창문 너머의 어딘가를 향한 채였다.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나는 얼른 뒤를 돌아 재빨리 연결된 문을 통해서 내 방으로 가려고 했다.
“흐아아…….”
내 의지와는 다르게 내 다리는 땅에 닿자마자 제가 무슨 문어라도 되는 것처럼 흐느적거리며 그대로 후들거리며 바닥에 널부러졌다.
“레나티스!”
테오도르는 화들짝 놀라며 나를 보았다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다시 번쩍 치켜올렸다.
“괘, 괜찮아요. 그냥 이제 안심이 되어 다리가 풀렸나 봐요.”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붙들고 나는 말했다.
오전에 강도 높은 훈련을 한 뒤였고, 나쁜 놈에게 납치당할 뻔하다가 도망친 뒤였으며, 제법 긴 거리를 단숨에 달려온 뒤였다.
그 모든 것을 다 마쳤으니, 긴장과 함께 다리가 풀렸다고 해도 이상한 것은 없었다.
“괜찮으시면, 조금만 이대로 있어도 될까요?”
나는 방의 주인인 테오도르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니. 별로 괜찮지 않아.”
그리고 방의 주인은 단칼에 거절했다.
“아, 죄송합니다. 지금 빨리…….”
너무 단칼인지라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다. 방금 무서운 일을 당할뻔한 사람에게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이 피도, 눈물도 없는 피폐물 남주 같으니라고!
-툭.
속으로 테오도르에게 욕을 퍼붓는 중에, 내 머리 위로 무언가가 얹어졌다.
고개를 들자 모포가 보였다. 그리고 그 위로는 여전히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린 채인 테오도르가 보였다.
“그대로 있다간 감기 걸릴 텐데, 괜찮긴 뭐가 괜찮아? 덮고 있어.”
테오도르의 그 무심하고도 따뜻한 한마디를 들은 순간, 갑자기 얼굴로 열이 몰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내가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했지만, 오히려 나는 더워서 창문을 열고 싶을 지경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의 말을 내뱉는 내 목소리에도 어쩐지 희미한 열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열기가 천천히 방안으로 퍼져나가는 것 역시도 느껴졌다. 슈미즈에 축축하게 달라붙어 있던 습기도 함께였다.
“……그자가 정말 무슨 짓을 하지는 않았어?”
툭.
테오도르의 한 마디가 습기와 열기로 가득 찬 방의 침묵을 깨뜨렸다.
“아, 네.”
고개를 끄덕이자, 어깨에 걸친 모포가 같이 흔들렸다.
“정말?”
무엇을 그렇게 확인하고 싶은 것인지, 테오도르는 재차 물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죽이진 않아도 되겠군.”
“네?”
테오도르가 너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바람에 내가 뭔가 잘못들은 모양이었다. 방금 죽고, 죽이는, 뭐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 같은데?
당황해서 테오도르를 쳐다보자, 여전히 내가 아니라 다른 쪽을 쳐다보고 있는 그가 보였다.
이제는 귓불도 붉은색이 아니었고, 조금 전에 보았던 당황한 표정 같은 것도 없었다.
거의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테오도르의 모습이 보였을 뿐이었다.
“저기, 이제 제 방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리에 힘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번에는 다리가 문어처럼 흐물거리지 않고 단단하게 바닥을 디디고 설 수 있었다.
“아니. 여기 있어. 아직 인스트가 보고를 하러 오지 않았으니까.”
“에이~. 저한테 엎어치기를 당한 놈인걸요. 인스트 님이 지실 리가 없죠. 지금쯤이면 그놈을 꽁꽁 묶어놨을 거예요.”
“다른 패거리가 있을 수도 있고.”
“저 같은 하녀 하나 납치하겠다고 그렇게 많이 몰려들었을 리가 없을 텐데요.”
“널 납치하려고 했다고?”
테오도르는 인상을 찌푸리며 내게 되물었다.
“단순히 여자 욕실을 엿보는 변태 놈이 아니었던 거야?”
내가 그 이야기를 테오도르에게 하지 않았던가? 안 했던 것 같다. 밑에 그놈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에 급급했으니까.
“네. 제 이름을 알고 있었어요. 제가 분홍 머리라는 것도요. 사실, 그것만 알면 절 찾기 쉽죠.”
내 말에 테오도르의 표정은 더욱 심각해졌다. 나는 재차 내 방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나를 대신해서 테오도르의 심각한 표정을 풀게 만든 것은 노크 소리였다.
“테오도르…… 님.”
노크 소리와 거의 동시에 문을 열고 들어온 오르디가 나를 보고 살짝 놀라는 듯했으나, 이내 평소의 침착한 얼굴로 돌아와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여자 하녀 욕실에 있던 놈을 붙잡았습니다. 일단 인스트 님의 감시하에 묶어두었는데, 일단 본채로 이송할까요? 아니면, 당장 수도경비대를 부르는 것이 나을까요?”
“아니. 지하 감옥으로 데려가.”
“지하 감옥으로요?”
오르디는 테오도르의 대답이 뜻밖이라는 듯 되물었다.
“그래. 내가 대화를 좀 해봐야겠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오르디는 더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살짝 숙여 테오도르의 말대로 하겠다는 뜻을 내보였다.
“그리고 따뜻한 차와 레나티스의 방에서 옷을 좀 챙겨와 줘. 별채 정문과 후문, 2층 계단, 내 방 입구에 각각 사병을 2명…… 아니, 4명씩 배치해 두고.”
“네.”
오르디는 즉각 대답하며 테오도르가 말한 것들을 실행하기 위해 사라졌다.
“곧 사병들이 올라와서 문을 지키게 될 거야. 네 옷과 따뜻한 차도 가지고 올 거고.”
오르디에게 말할 때 나도 옆에서 듣고 있었던 터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테오도르는 다시 내게 말했다.
그게 매우 중요한 사실이라는 듯이 진중한 표정으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그러니, 이제 안심해도 돼.”
참 이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렇게 겁먹고 있지는 않았다.
물론, 무섭기는 했었다. 갑자기 날 납치하겠다는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그건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나를 잘 아는 터라, 내가 쉽게 납치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마을에서 아저씨 오빠들보다 더 힘센 것이 나였고, 귀족 출신의 기사인 인스트가 탐내는 궁수 인재가 나였다.
실제로 욕실에 쓰러진 것은 내가 아니라 그 남자였다.
아까 다리가 풀린 것도 겁을 먹어서라기보다는, 긴장이 풀려서였다. 중요한 시합이 끝나고 난 뒤의 우승 선수의 마음과 같은 것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겁먹지 않았다고, 무섭지 않았다고, 불안하지 않다고.
하지만 테오도르의 저 말을 들은 순간,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었다. 마치 내가 그전에는 안심하고 있지 못했다는 듯이.
“이전에 네가 내게 말한 적이 있지.”
어느새 테오도르가 내게 다가와 있었다. 똑바로 눈을 맞추며,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괜찮다고.”
내가 그에게 그런 말을 했던가?
정말 내가 그렇게 말했다면, 아마 나도 모르게 한 말이었을 것이다.
테오도르가 괜찮지 않아 보여서, 그가 괜찮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 말을 돌려주지.”
테오도르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에 가볍게 얹어졌다. 그리고 그 손은 부드럽게 내 머리카락을 타고 흘렀다.
나는 그저 그 손가락을 느끼며, 테오도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따스한 보라색 눈동자를, 부드럽게 속삭이는 입술을.
“괜찮아.”
따뜻한 목소리가 테오도르의 입술에서 흘러나와 내게로 다가왔다.
부드럽게 손가락을 어루만진 목소리가 곰실거리며 손등을 타고 미끄러졌다가 살금살금 팔을 타고 올라왔다.
어깨를 한번 톡톡 두드리고, 목덜미를 타고 올라온 테오도르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내 뺨을 쓰다듬었다. 그 목소리에, 그 손길에, 그 따스함에, 눈이 스르륵 감겼다.
“괜찮아.”
다시 한번 테오도르의 손이 내 정수리에 얹어지고, 천천히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 발가락을 간질였다. 보드라운 목소리는 살금살금 내 종아리를 타고 올라왔다.
허벅지에서 잠시 머무는가 싶었던 목소리는 다시 천천히 올라왔다. 부드럽게 내 배를 한번 쓰다듬은 그것은 이내 천천히 내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위에서, 아래에서, 목소리의 여운이 점점 퍼져가고 있었다. 부드럽고 따스하게 내 몸을 감싸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괜찮지 않았었다. 괜찮을 거라는 테오도르의 목소리에 안심이 되는 것을 보면.
테오도르의 목소리에 비로소 나는 정말 괜찮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