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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49화 (49/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49

복도가 너무 길었다. 계단은 너무 가팔랐다. 숨이 너무 가빴다.

매일 내가 이 길을 오르내렸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아…… 하아…….”

그래도 다리를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욕실에서 튀어나와 곧장 복도를 내달리고, 계단을 두세 개씩 뛰어오르며 테오도르의 방으로 달려갔다.

“테오도르!!”

2층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다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저 멀리 그의 방문이 보였다. 그리고 벌컥 문이 열리는 것 역시도.

“무슨 일…… !!”

복도로 한 걸음 나온 테오도르가 곧바로 나를 발견했다. 아직 거리가 멀었음에도 그의 눈이 커진 것이 보일 만큼 당황한 것이 내 눈에 보였다.

“치, 침입자가 있어요. 요, 욕실. 1층 하녀들 욕실에, 남자가!”

테오도르를 눈으로 보자 안심이 되어서인지 발이 느려졌다. 대신 테오도르가 한달음에 내 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다른 문이 벌컥 열렸다. 그 문에서 뛰어나온 것은 인스트였다.

그도 오전 훈련 후에 씻고 있었던 듯, 머리카락과 몸은 젖은 채였다.

옷을 입을 시간도 없이 뛰쳐나왔는지, 위쪽은 잘 갈라진 근육을 자랑하고 있었고, 그나마 아래쪽은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인스트 님! 변태가 있어요!”

“눈 감아!”

테오도르와 내가 동시에 소리쳤다.

“네?”

인스트는 나와 테오도르의 서로 다른 말이 겹쳐져서 잘 듣지 못한 것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1층 하녀 욕실에 변태가 있다고요!”

“눈부터 감아!”

나와 테오도르는 또 동시에 소리쳤다. 인스트가 따른 쪽은 당연히 테오도르의 말이었다.

“아니! 지금 저기 1층에! 하녀 욕실에 변태 놈이 있다니까요!”

냅다 눈을 감아버리는 인스트를 보며, 나는 답답한 마음에 소리쳤다.

조금 전에는 분명 내가 도망쳤지만, 테오도르와 인스트라는 든든한 지원군을 만난 이상 이제는 전세 역전이었다.

그 변태 놈이 도망가기 전에 얼른 잡아야 했다.

“그렇다니까 인스트, 내려가 봐.”

“빨리 가세요!”

비로소 떨어진 테오도르의 허락에 나도 한마디 덧붙였다.

“그럼 눈은 이제 떠도 됩니까?”

“안돼.”

“테오도르 님. 아무리 저라도 눈을 감고 1층까지 내려갈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이 꼴로는 더 어렵죠.”

“……젠장.”

인스트의 침착한 항변에 테오도르는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나는 대체 그가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벗고 있는 쪽은 인스트였다. 눈을 감아도 우리가 감아야지, 왜 인스트에게 자꾸 눈을 감으라고 하는 거람?

그리고, 솔직히, 나는! 이렇게 강제로 관람하는 게 나쁘지 않은데! 원래 취향은 취향이고, 근육은 근육 아닌가!

“……어?”

빨리 인스트가 아래로 내려가 그 나쁜 놈을 잡았으면 하는 마음에 발만 동동 구르는 와중에, 갑자기 테오도르가 나를 와락 껴안았다.

갑자기 이건 또 뭐지?

내가 어리둥절한 와중에 테오도르는 몸을 빙글 돌려 나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테오도르 님?”

소위 말하는 벽치기와 유사한 자세로 테오도르의 품에 안긴 것과 비슷하게 된 나는 그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지금 우리가 이럴 때가 아니지 않나요? 물론, 소설의 여주가 된 것처럼 매우 두근두근하고 좋긴 합니다만?

“인스트.”

테오도르는 내 부름에는 대답하지 않고, 대신 인스트를 불렀다.

“눈 뜨고, 앞만 보고, 당장 내려가.”

“네.”

마침내 떨어진 테오도르의 명령에 인스트는 드디어 아래로 내려갈 수 있었다.

그가 내려가는 것을 테오도르의 어깨너머로라도 보려고 까치발을 들자, 테오도르의 손이 인정사정이 없이 내 머리를 짓눌렀다. 들었던 까치발이 폭삭 내려와 버렸다.

“왜 그러세요?”

“…….”

어쩐지 억울한 마음에 테오도르에게 물었지만,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버렸다.

계속 이어지는 테오도르의 의문 가득한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길이 없어 답답한 내 눈에 테오도르의 귀가 살짝 붉은 것이 보였다.

뭐지? 이제 가을이긴 하지만, 귀가 얼 정도로 추운 것은 절대 아닌데?

“어……. 지금쯤이면 인스트 님이 그 나쁜 놈을 붙잡았을 것 같으니, 내려가 볼게요.”

“나쁜 놈이라니, 그 새끼가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

돌아가 있던 테오도르의 고개가 휙! 돌아왔다. 그리고 매서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나쁜 짓을 시도는 하려고 한 같은데, 제가 그전에 바닥에 메다꽂았기 때문에 성공하지는 못했죠.”

나를 납치해다가 머리카락과 몸을 따로따로 가져다 팔 거라는 그의 계획은 무산되었으니 그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테오도르의 눈은 심하게 다시 떨리기 시작했고, 귀는 아까보다 더욱 붉어져 있었다.

급기야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버리기까지 했다.

꼭 뭔가 부끄러운 사람처럼 말이다.

에이~ 피폐물 남자 주인공 님께서 그럴 리가?

게다가 소설 속에서 여자 주인공의 귓가에 속삭인 더티 토크나 그가 시도했던 다양한 장소와 체위를 봤을 때, 테오도르는 선천적으로 수줍음, 부끄러움, 수치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쨌든, 제가 내려가서 인스트 님도 도와드리고, 그 놈이 맞는지도 확인을 해야…….”

“안돼.”

슬쩍 테오도르의 옆으로 발을 옮겨서 벽과 테오도르의 사이라는 아주 훌륭한 공간을 빠져나가려는데, 테오도르의 손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 꼴로 어딜 간다는 거야?”

“아, 슈미즈 꼴로 돌아다니긴 좀 그렇긴 하죠? 근데 제가 옷을 욕실에…….”

시선을 내려 내 꼴을 확인한 순간, 내 입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테오도르가 말한 ‘그 꼴’이라는 것이 내가 생각하고 있던 ‘그 꼴’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내 모습은 슈미즈 차림이었다.

장소에 맞지는 않지만, 테오도르의 앞에서 할 옷차림에는 더더욱 맞지 않았지만, 내 급박했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인스트처럼 웃통을 벗고 있다거나, 옷이 아닌 수건을 두른 상태도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슈미즈는 옷이긴 했다.

하지만 내 눈으로 확인한 내 모습은 차라리 수건 차림이 낫지 않나 생각될 만큼이었다.

슈미즈는 물에 흠뻑 젖어, 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실루엣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얇디얇은 슈미즈의 천은 물기를 머금어 반쯤 투명해져 있었다. 당연히 내 속살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보, 보지 마세요!”

나는 다급하게 손으로 내 몸을 껴안았다. 그리고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몸을 다 가리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눈 감으세요! 눈!”

나는 테오도르가 인스트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안 보고 있어.”

테오도르는 자기 말대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귓불이 붉어진 채로.

그 붉은 귓불의 의미를 이제 알아버렸다.

‘다 봤잖아!! 지금 고개 돌렸어도 아까 다 본 거잖아! 대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본 건데!! 봤잖아! 다 봤잖아! 으아아앙!!!’

확인할 수는 없지만 지금 내 얼굴은 테오도르의 귓불보다 훨씬 빨갛게 되었을 것이 뻔했다.

“테오도르 님?”

소란을 눈치챈 것인지 내가 올라왔던 계단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가능한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 몸을 가리려고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게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목소리로 봐서 남자라는 거였다. 나는 또 거의 70%정도는 알몸에 가까운 꼴을 남편도 아닌 남자에게 보이기 직전이었다.

‘미안해, 언니. 나중에 언니랑 행복하게 잘 살고 싶었는데, 나는 이렇게 세상을 떠나나 봐. 내 묘비에 내 죽음이 수치사라고 적지는 말아줘.’

나는 질끈 눈을 감고, 속으로 아스텔라 언니에게 전할 수 없는 유언을 남겼다.

‘뭐야? 진짜 죽었어?’

가볍게 내 몸이 떠오르는 느낌에 순간 나는 진짜 내가 죽은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1층 하녀 욕실에 괴한이 침입했다. 빨리 가보도록.”

하지만 거의 귓가에서 들리는 것 같은 테오도르의 음성과 내 허벅지와 겨드랑이 사이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체온 때문에 내가 진짜로 수치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다행이야……. 이대로 죽기엔 억울해.

테오도르는 나는 안아 올린 채, 옆으로 방향을 틀어 자신의 몸으로 내 몸을 가려주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괴한이라는 말에 당황한 누군가의 대답과 다급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가 점점 멀어진 뒤에도 테오도르는 목은 빳빳하게 세우고 눈을 오로지 저 멀리 정면만을 바라본 채,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나를 안고 서 있었다.

“아, 아니! 저기, 이제 아무도 없으니까 괜찮아요.”

“가만히 있어.”

오히려 굳은 채로 있던 테오도르는 이제 나를 안고 복도를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다.

“제 발로 걸어갈게요. 테오도르 님께 이런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지금 이렇게 꿈틀대는 게 나한테 더 폐를 끼치고 있는 거야.”

“네?”

“지금도 간신히 참고 있다고.”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테오도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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