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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46화 (46/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46

“앞서 말씀드린 사람도 제가 싫어하지만, 가장 혐오하는 자는 거짓말을 하는 자입니다.”

창백하게 질린 백작 영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테오도르는 말을 이어갔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가 분명 보일 텐데 그는 가차 없었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원칙적으로 출발해야 하는 것은 믿음과 신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짓말을 일삼는 자에게는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죠. 오로지 거짓과 가식의 악취만이 날 뿐이니까요.”

조용히 내뱉는 테오도르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 날카로운 말은 조금 전에 내게서 냄새가 난다고 거짓말을 한 백작 영애를 향하고 있었다.

“테오도르 님,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합니다.”

마침내 테오도르의 말이 끝난 듯하자, 백작 영애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매우 조심스러웠고, 작은 목소리였다.

“오해요? 어떤 오해 말씀이십니까?”

테오도르는 자못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저는…….”

그녀는 뭐라고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도톰하고 빨간 입술을 몇 번 달싹이긴 했지만, 어떤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나와 있었던 일을 제 입으로 꺼내는 것은 리스크가 너무 컸다. 거의 98%의 확률로 테오도르는 그녀와 나와의 일을 아는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모른다는 2%의 작은 확률이 있긴 했다.

거기다가 그녀가 스스로 말을 꺼낸다는 것은 그 일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금 전에 테오도르가 말한 무례하고 폭력적인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닙니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저 조용히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을 하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부디, 영애께서는 그런 분이 아니시기를 바랍니다.”

“네, 물론이죠.”

테오도르의 말에 그녀는 갈 곳을 잃은 시선과 흔들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모든 것을 들었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을 하며, 테오도르의 앞에 차를 한잔, 그리고 나머지 한 잔은 창백한 표정으로 테이블만 바라보고 있는 백작 영애의 앞에 놓았다.

후훗! 나에게 못되게 굴더니 쌤통이다!

.

.

.

“저기, 편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국, 백작 영애는 창백한 얼굴로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그녀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찻잔을 치우며, 나는 테오도르에게 감사의 말을 건넸다.

“별로.”

무뚝뚝하고 다정한 한 마디였다. 그리고 아까의 그 발언이 내 편을 들어 준 것이 맞는다는 긍정이기도 했다.

“난 평소에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를 말했을 뿐이야. 신뢰와 믿음, 인간관계의 첫걸음 아닌가?”

테오도르의 말에 핑계를 대며 차 시중을 거부하지 않은 오늘의 내가 자랑스러워졌다. 나는 내가 한 말을 지켰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넌 처음부터 나한테 신뢰를 보여준 편이니까, 무난하게 출발했다고 볼 수 있겠지.”

“제가요?”

테오도르와의 첫 만남이라면, 솔직히 나로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어둡고 축축한 지하 감옥에서 갑작스러운 광인과의 조우였으니, 당연히 좋을 리가 없지.

그런데 그 상황에서 내가 테오도르에게 뭔가 믿음과 신뢰를 주는 행동을 할 정신이 없었을 텐데?

아니다. 설사 내가 했더라도 테오도르가 그걸 기억할 정신이 없었을 텐데? 그야말로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그래.”

하지만 테오도르는 단호했다.

“제가 뭘 했는데요?”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직접 물었다. 그러자 테오도르는 기억 안 나냐는 듯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죄송해요.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요.”

“나도 정확하게 기억은 못 해.”

저기요. 기억 못 하시면서 왜 그렇게 당당하신 건데요?

“하지만 네가 나한테 네 팔뚝을 기꺼이 내준 것을 알고 있지.”

기꺼이는 아니었는데요…….

“네 희생 덕분에 지금도 내가 이렇게 제정신인 거고.”

희생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다. 나도 받을 것 받는 계약적 관계인데.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 관계를 유지해야 할 거고.”

내 눈이 지금 좀 이상한가? 테오도르의 눈빛이 묘하게 변한 것 같은데?

“그러니, 내게 믿음과 신뢰를 계속 보여주도록 해.”

이상한 일이었다.

믿음과 신뢰라는 단어가 왜 이렇게 시꺼멓게 느껴질까?

* * *

카르오 대공비는 제 앞에서 훌쩍거리는 플리케를 보며 귀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쓸모가 있었다.

파블로 백작가는 대단한 세력가도 아니었고, 매우 부유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델마가 가장 좋아하는 서대륙의 다이아몬드를 수입하는 상단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을 생산하는 양조장을 가진 가문이었다.

카르오 대공비가 고작 다이아몬드와 와인 때문에 며느릿감을 골랐다고 하면 사람들은 어이없다며 웃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델마는 진심이었다.

어차피 아들이 누구와 결혼을 하든,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괴물과 결혼할 아가씨가 가엾기까지 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동정하는 마음은 델마의 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적었다. 아주 약간의 동정심을 발휘한 뒤, 그녀는 자신의 실속을 차리기로 했다.

그녀는 귀찮은 경매나 기다림 없이 다이아몬드와 와인을 가질 수 있으면 퍽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거기다가 플리케는 외모도 썩 괜찮았다. 같이 사교계에 나선다면 꽤 주목을 받을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일단은 그녀를 테오도르의 혼약자로 정한 것이었다.

“자, 그만 우세요. 예쁜 화장이 다 망가지겠어요.”

델마는 다시 한번 플리케를 다독였다. 그리고 속으로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계속 그녀가 훌쩍거린다면,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 것 같으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며 점잖게 쫓아내리라.

어차피 자신이 부른다면 이 여자는 언제든 쪼르르 달려올 테니까.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대공비님.”

델마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플리케는 마침내 울음을 그쳤다.

“아니에요. 아들을 다정한 남자로 키우지 못한 제 잘못도 있죠. 그래도 이렇게 여자를 울리는 남자로 키우지는 않았는데 말이에요.”

델마는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플리케를 위로했다. 그녀가 더 징징거리지 않는다면, 이것보다 더 다정하게 웃어줄 수도 있었다.

“분명 제 잘못도 있긴 하겠죠. 테오도르 님 말씀대로 초대도 받지 않고 허락도 없이 별채를 방문한 것이나, 마음대로 버릇없는 하녀를 체벌한 것은 어느 정도 제 잘못이라는 것을 인정해요. 하지만 그 하녀 앞에서 제게 그렇게 말씀하실 필요는 없지 않나요?”

플리케는 테오도르 앞에서는 미처 쏟아내지 못했던 말을 이제야 했다.

“거기다가 가장 기분 나쁜 것은 그 하녀였어요. 제까짓 것이 마치…… 마치…… .”

플리케는 적당한 단어를 고르려고 했다.

자신이 테오도르에게 무안을 당할 때 비웃듯이 자신을 바라보았던 그 시선을 뭐라고 해야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지, 제 편을 들어주는 테오도르를 감동했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던 것을 대체 뭐라고 해야 할지 생각했다.

“……테오도르 님의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굴더군요!”

하지만 적정한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전부 대공비의 앞에서 내뱉기에는 너무 천박했다.

“그랬군요.”

델마는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녀는 레나티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레나티스가 테오도르의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아주 중요한 존재인 것도.

‘그래. 이 아이는 아직 더 쓸모가 있겠어.’

아직도 그 분함을 삭이지 못한 듯, 곱게 손질된 손을 꼭 말아 쥐고 부들부들 떠는 플리케를 보며 델마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 아이는 고작 하녀인걸요.”

“하지만 그 애가…… 아니, 테오도르 님이 그 애를 대하는 태도가 그냥 하녀를 대하는 것이 아니었는걸요! 만약 그 천한 것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그 천한 몸을 테오도르 님께…….”

“파블로 영애. 위엄을 지키세요.”

흥분해서 제 머릿속에 있는 것을 다 끄집어내려는 플리케를 델마는 엄한 목소리로 막아섰다.

“장차 카르오 대공가의 안주인이 되실 분이 그깟 하녀에게 이렇게 끌려다니다니,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이 아닌지 걱정이군요.”

“네? 아, 아닙니다. 대공비님!”

플리케는 조금 전까지 다정하게 자신을 위로하던 델마가 별안간 싸늘하게 돌아서자 당황해서 다급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속상한 나머지…….”

안절부절못하는 플리케를 가만히 바라보던 델마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시 살짝 미소를 지었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지만 너무 귀여워 어쩔 수 없이 용서해주는 어머니 같은 모습이었다.

“파블로 영애.”

“네, 대공비님.”

“그대 말대로 가진 건 몸뚱이밖에 없는 천한 하녀입니다. 설사 테오도르가 잠시 그 몸에 현혹되었다 하더라도, 결코 카르오의 사람이 되지 못하는 하녀라고요.”

“그럼, 정말 테오도르 님이 그 하녀와!”

“제가 다 큰 아들의 사생활까지 어찌 알겠어요?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애는 하녀라는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고귀한 백작 영애이고요.”

플리케는 델마가 하는 말을 홀린 듯이 듣고 있었다.

아무리 플리케가 성격이 못되었다고 한들, 아직 어린 아가씨였다. 자신의 되고 싶은 미래, 그 자체인 델마의 말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델마는 플리케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보고 있었다. 탐욕스럽고, 그 욕망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어린 아가씨.

“그냥 길바닥에 널브러진 돌과 같은 애입니다. 누가 발로 차고, 다른 곳으로 굴러가도, 아무도 모를 그럴 애요.”

때로는 너무 무모한 일도, 너무 악독한 일도, 제 앞을 가로막는 일이라면 거침없이 해낼 것 같은, 그런 탐욕스러운 여자.

“길바닥의 돌이 누군가가 차서, 어딘가로 굴러가서, 없어졌다고 누가 찾겠어요?”

예를 들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을 욕망의 불길을 델마는 플리케의 눈에서 보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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