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44
“아…… 어떻게 하지?”
테오도르의 방 앞에 서서 마치 알코올 중독자처럼 후들후들 떨리는 내 손을 보며 고민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어찌어찌 티타임 트레이왜건을 여기까지 끌고 오기는 했지만, 안에 들어가서 테오도르의 차 시중을 들 생각을 하자 눈앞이 깜깜했다.
“첫날부터 신입을 너무 빡세게 굴린 거 아니냐고요.”
작은 목소리로 자리에 있지도 않은 인스트에게 푸념해보지만,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일어난 일임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에게 별다른 이익도 없는데, 내 재능을 키워주겠다며 열심히 굴려주는 인스트에게 고마워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주먹을 불끈 쥐고 의지를 다져보려 하지만…….
“으으윽!”
이미 근육통에 점령당한 팔은 내 의지와는 다르게 그저 흐느적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문어처럼 허우적거리는 팔을 살살 달래어 겨우 노크를 하고 들어가자, 책을 보는 테오도르가 보였다.
왜건을 끌고 가며 곁눈질로 책의 제목을 훔쳐보았다.
<윤리사회학>
음……. 뭔지 모르겠당~.
그러고 보니, 테오도르는 거의 늘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카르오 대공가의 후계자라면서 일하는 모습은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카르오 대공이 권한을 넘기지 않아서 할 일이 없는 걸까? 근데 그게 꼭 나쁜 건가? 일거리가 별로 없으면 좋을 것 같은데.’
여기서 한몫 잡아 빠르게 은퇴하고 놀고먹는 것이 꿈인 나에게 귀족들의 세계는 이해가 어려웠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고개 숙인 테오도르가 살짝 코를 찡긋거리더니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테오도르 님.”
눈이 마주쳐 인사를 건네자, 테오도르는 인사 대신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부터 활 연습을 한다고 하지 않았나?”
“네. 오전에 하고 왔어요. 오전에는 활 연습을 하고, 오후에는 차 시중을 들려고요.”
“매일 그렇게 하면 피곤할 텐데.”
“저녁에는 쉬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필요하면 언제든 쉬는 날을 주겠다고 오르디 님이 말씀하셨고요.”
“그래?”
테오도르는 읽고 있던 책을 덮고, 그럼 어디 차를 따라보라는 듯이 눈짓했다.
“연습은 어땠어?”
“힘들었어요. 아직 활은 만져보지도 못했고요. 하지만 다음 주쯤에는 활시위 당기는 법을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어요.”
나는 웃으며 찻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팔이 살짝 떨리긴 했지만, 오히려 주전자가 무거워서인지 안정감 있게 차를 따를 수 있었다.
향긋한 차 향기가 천천히 퍼져나가자, 내 기분까지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테오도르 역시도 그랬던지, 그의 가슴이 위로 솟아오르며 한껏 숨을 들이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테오도르의 몸은 괜찮나? 그날 이후로 시간이 좀 지난 것 같은데.
아! 아깝다! 들어오기 전에 주전자에 침 좀 뱉을걸! 미리미리 복용을 좀 시켜야 하는 거였는데!
“요즘 몸은 좀 어떠세요?”
차가 우러나기를 기다리며, 슬쩍 테오도르에게 말을 건넸다.
“그저 그래.”
어딜 보나 멀쩡해 보이는데, 테오도르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지나가던 사람에게 사탕이라도 빼앗긴 심통 맞은 어린애 같은 모습이랄까?
“혹시 조금이라도 낌새가 있으면 말씀하세요. 제가 얼른 달려 올 테니까요.”
“어디서?”
“어디에 있든요.”
“광증 발현은 순식간이야. 네가 달려왔을 때는 이미 늦었을 수도 있어.”
“저 달리기 빨라요.”
“그 짧은 다리로 빨라봤자 얼마나 빠르다고.”
억울했다. 내가 키는 좀 작지만, 키에 비해선 짧은 다리가 아닌데!
거기다가 갈 곳도 없는 나는 늘 이 건물 안에 있었다.
내방, 식당, 주방, 그리고 추가된 뒤뜰. 제일 먼 뒤뜰에서도 테오도르의 방까지 최선을 다해서 달려온다면 10분 안으로 올 자신이 있었다.
“지난번에는 운 좋게 바로 옆에 있었지만, 다음에도 그렇게 운이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지.”
그 당시에는 운 좋게 피는 보지 않았지만, 그 뒤에 내가 그…… 아…… 이름 또 까먹었네. 어쨌든 그 이름 모를 백작 영애에게 피를 볼 뻔했다는 것을 테오도르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방을 옮겨.”
“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올 수 있게 방을 옮기라고.”
그렇게 말하며 테오도르는 고갯짓으로 옆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쪽을 쳐다보자 문이 보였다. 내가 들어온 복도의 문이 아닌 옆 방으로 연결되는 문이었다.
“설마, 저더러 저 방으로 옮기라는 말씀이세요?”
“그래.”
테오도르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건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고용인들의 공간은 1층이었다. 2층에는 테오도르와 인스트, 그리고 테오도르의 명을 기민하게 대처하기 위해 오르디와 리타 아주머니만이 기거했다.
그런데 나더러 2층의 방을 쓰라고? 그것도 테오도르의 방과 연결된 커넥팅룸을?
잘 모르긴 해도, 분명 엄청 좋을 텐데?
“넵!”
굳이 사양할 필요 없지!
* * *
“스기엔! 우리 이사할 거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침대에서 할 일 없이 뒹굴뒹굴하고 있던 스기엔은 나의 이사하자는 소리에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더 좋은 방으로 갈 거야! 2층이라서 볕도 더 잘 들고, 밖에서 봐도 넓어. 심지어 문고리마저도 엄청 좋아!”
“당장 가자!”
반려 몬스터는 집사를 닮는 걸까? 좋은 방이라는 소리에 스기엔은 더 묻지 않고, 당장 튀어 올라 내 품에 쏙 안겼다.
내가 테오도르의 제안을 냉큼 받아들인 것과 똑같은 태도였다.
“잠깐만 내려올래? 짐을 좀 챙겨야 해서.”
“날 안고 하면 되잖아?”
억지를 부리는 게 어쩜 이렇게 당당할까?
“그래. 그러자.”
그리고 왜 나는 억지인 걸 알면서도 스기엔이 하자는 대로 하는 거고?
이유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몸이 기억하는 집사 근성일지도…….
뭐, 워낙 가지고 온 짐이 없어서 챙길 것도 별로 없긴 했다. 한 손으로 가방에 짐을 넣고, 그대로 나가려다가 내 팔에 안긴 스기엔을 보았다.
더 좋은 방으로 간다는 말에 들떴는지, 스기엔은 평소보다 더 예쁜 핑크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왜?”
내 시선을 눈치챈 스기엔이 눈을 또르르 굴려 날 올려다보았다.
“이대로 가도 괜찮을까? 사람들이 볼 텐데?”
“아! 그렇지. 여자애 품에 안겨서 가다니, 고위 마족이신 이 몸의 체통이 살지 않지.”
무해한 슬라임이긴 하지만, 일단은 몬스터이긴 하니까 달랑 들어다가 토벌이라도 당하는 게 아닌가 해서 한 말이었는데, 스기엔은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내 몸에서 퐁! 하고 뛰어 내려와 아직 공간이 있는 가방으로 쏙 들어갔으니, 문제해결이었다.
여자애 품에 안겨 있는 것보다 가방에 실려 가는 것이 어째서 체통이 지켜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와!”
빠른 걸음으로 2층으로 올라와 새로운 내 방의 문을 연 순간, 그야말로 나는 입을 쩍 벌리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오우! 괜찮은데?”
스기엔이 가방에서 뛰어나와 폴짝거리며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폴짝거리며 돌아다니는 곳을 따라서 내 시선이 옮아갔는데, 그야말로 눈 돌아가게 좋은 방이었다.
“장난 아니네.”
바로 옆방인 테오도르의 방과 거의 비슷한 호화로움이었다. 아니, 오히려 대공비가 쓰는 방이라서 그런지 이 방이 더 화려했다.
옷장은 들어가서 누워 자도 될 만큼 컸고, 비싼 거울 역시 내 상체가 다 비춰질 정도로 컸다.
거울이 올려진 화장대는 어찌나 화려한지 이걸 내다 팔면, 평생을 먹고살 수 있는 가격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엄청난 것은 따로 있었다.
걸어둘 옷이라곤 두어 벌밖에 없는 나에게 옷장은 필요 없는 것이었다.
화장도 하지 않으니, 화장대도 쓸모없었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초상화 역시 궁금하지도 않았다.
“와! 엄청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엄청나게 큰 침대였다. 나도 잠은 자니까!
손으로 한번 눌러보자, 부드럽게 아래가 꺼지는 것이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푹신함이었다. 거기다가 침구의 보드라운 촉감도 생전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오오! 잠이 잘 올 것 같은 침대인데?”
스기엔도 좋은 침대에 신이 났는지, 침대에서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이거 재밌다, 레나티스!”
엄청나게 신난 목소리로 스기엔이 말했다.
“그래?”
스기엔의 신난 목소리에 은근슬쩍 나도 신발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침대로 껑충 뛰어 올라갔다. 손으로 눌렀을 때 느껴졌던 그 탄력감이 내 발바닥으로 느껴졌다.
“꺅! 히히힛!”
뭐가 재미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괜히 웃음이 나왔다. 전부 다 신나는 기분이었다.
“앗! 조용히 해야지. 지금 옆방에 테오도르가 있을지도 몰라. 아니면, 옆옆방에.”
지금 내방은 대공비가 침실로 쓰던 방이었고, 이 옆방은 테오도르가 차를 마시거나 책을 읽던 방이었다.
그리고 그 방에서 다시 방문 하나로 연결된 커넥팅 룸이 테오도르의 침실이었다.
가끔 정원을 산책할 때가 아니면, 거의 자신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테오도르였기에 지금도 이 옆방에 있을 가능성이 컸다.
“왜?”
한창 신나게 뛰고 있던 스기엔이 내가 움직임을 멈추자 물었다.
“옆방에 누가 있을 수도 있거든.”
“누가?”
“테오도르 님.”
나는 고개를 돌려 옆방과 연결된 문을 쳐다보았다.
이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테오도르가 저편에 있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주 먼 사람이었다. 어렴풋이 카르오 대공가가 있다는 것만 알았던, 그 후계자의 이름이 뭔지도 몰랐던 나였다.
소설 속에서도 테오도르는 멀리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남자 주인공이었고, 나는 앞부분에만 짧게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의 동생에 불과한 단역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가까이에 있었다.
고작,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