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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43화 (43/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43

“둘 다 하겠습니다.”

내가 생각해도 욕심 가득한 발언이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데, 둘 다하겠다고 대답했으니까.

“둘 다 하겠다고?”

인스트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내게 되물었다.

“네. 오전에는 활쏘기 훈련을 하고, 오후에는 이전처럼 테오도르 님의 차 시중을 들겠습니다. 아, 물론, 두 분께서 허락하신다면요.”

순전히 나 혼자만의 시간 분배 계산이었기에 얼른 뒷말을 덧붙였다.

“둘 다 하기에 힘들지 않겠어? 인스트가 널 꼬드기려고 별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기사 수업이라는 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야. 활만 연습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야.”

테오도르는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만만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인스트 님이 저에게 재능이 있다고 말해주셨으니, 해보고 싶어요.”

“재능이 있다고 해서 꼭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테오도르 님도 저에게 차를 잘 타는 재능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럼 제가 그 일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말씀이신가요?”

“그건…….”

내 질문에 테오도르는 조금 당황하는 듯했다. 하지만 결코 그를 당황하게 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궁금했을 따름이었다.

정말로 내가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정말 내가 타는 차가 맛이 있는지, 내가 탄 차를 마시고 싶다고 생각하는지.

“저는 아버지에게 항상 쓸모없는 계집애라는 말을 들었어요.”

참으로 갑작스러운 고백이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물론 아니라고 말해준 사람도 있었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고요. 아버지보다야 제가 훨씬 쓸모 있었거든요.”

슬쩍 미소를 보탠 것은, 테오도르와 인스트에게 이 고백이 반쯤은 농담으로 받아 들여줬으면 하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너무 진지하지 않게, 너무 무겁지 않게.

“하지만 무언가에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처음이에요. 저는 원래 그냥 언니의 부록 같은 애였거든요.”

하지만 굳이 내 입으로 말한 것은, 나머지 반은 진심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저 착하고 예쁜 아스텔라의 동생일 뿐이었다. 소설에서도, 현실에서도.

언니는 내 자랑이었고, 딱히 그것이 불만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착하고 예쁜 아스텔라의 동생이 아니라, 레나티스가 되고 싶었다.

“그러니까, 제가 재능이 있다면, 둘 다 해보고 싶어요. 제가 어딘가에 쓸모가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요.”

20살의 생일, 내가 각성한 그 날. 나는 신께 감사 인사를 드렸다.

아스텔라 언니를 구할 기회를 내게 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리고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

“…….”

내 고백을 들은 테오도르도, 인스트도 말이 없었다. 아무 반응이 없는 두 사람을 보자 살짝 초조해졌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고 하는 걸 보고, 너무 욕심이 많다고 생각하는 걸까?

“좋아! 내가 널 훌륭한 궁수로 만들어 주겠어!”

……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인스트는 갑자기 내 어깨를 꽉 잡더니, 의지가 활활 불타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에 나를 이곳에 데려왔을 때보다 열정이 불타고 있었다.

“지금 당장 갈까? 아직 점심 전이니?”

“어…… 그런데…….”

나는 슬쩍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엄연히 나의 고용주는 테오도르였고, 내가 무슨 일을 하는 것은 그의 허락이 필요했다.

인스트 역시 그걸 알기 때문에, 나를 이곳에 데리고 온 것이었다.

“하고 싶으면, 해봐.”

나와 눈이 마주친 테오도르는 허락의 말을 내뱉었다.

처음에 인스트랑 입씨름을 할 때는 절대로 허락해주지 않을 것 같았었는데,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가벼이 말했다.

“오르디에게는 내가 말해둘 테니.”

“감사합니다!”

나는 허리를 거의 170도쯤 굽혀서 테오도르에게 인사했다.

그가 허락해준 것이 기뻤다. 내게 기회를 준 것에 감사했다.

* * *

“으아아아아!”

이것은 내 비명이었다.

“으으으으으!!”

이것 역시 내 비명이었다.

“끄으으으윽!”

그리고 이건 내 신음.

“좋아. 휴식.”

“흐어어어억!”

인스트의 휴식이라는 말에 나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이름 모를 잡초의 잎이 코를 간지럽혔지만, 나는 돌아 누울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아 간지러움을 그저 참아냈다.

“기사님! 질문이 있습니다!”

인스트가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려고 하자, 나는 간신히 보충한 기력을 짜내서 그에게 소리쳤다.

안돼! 지금 일어서면 다시 훈련이잖아! 조금만 더 누워있고 싶다고!

“뭐지?”

“왜 활쏘기는 안 하고 팔굽혀펴기와 스쾃과 달리기만 하는 건가요?”

그랬다. 오전 내내 나는 그 셋을 반복하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이족보행의 인간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고민을 진지하게 하고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도저히 걸어 다닐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개처럼 기어서 방으로 돌아가거나, 아예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이동해야 할 것 같았다.

“뭐든지 기초체력이 중요한 법이거든.”

“하지만 저는 재능이 있다면서요. 제가 가진 힘이면 천재 궁수가 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힘은 세지만, 하체가 약해. 단단히 서지 않으면, 몸의 중심이 흔들리게 되어있어. 그러면 당연히 과녁을 정확하게 맞힐 수 없지. 그리고 선천적인 재능이 있어도 연습을 부지런히 하지 않으면, 재능은 썩기 마련이야.”

인스트의 설명은 멋있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 다리가 후들거려서 설 수도 없는데, 그런 명언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뭐, 나같이 선천적인 재능과 후천적인 노력으로 타고난 노력 천재가 되는 게 가장 빛나는 케이스이겠지만, 아닌 경우도 많지.”

아, 네네. 물론, 그러시겠지요.

“예를 들면, 테오도르 님.”

“네?”

뜻밖의 타이밍에서 나온 이름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테오도르 님이 무슨 재능이 있었나요?”

“아니. 오히려 반대라고 할 수 있지. 천재는 형 쪽이었어. 테오도르 님께서는 그 형을 대신하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하셔야 했고. 그저 카르오 대공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는 후계자로 인정받기엔 너무나 대단한 가문이니까.”

“테오도르 님의 형이라면 그 광증으로 죽었다던 형 말인가요?”

인스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어릴 적 일이라서 잘은 몰라. 하지만 아버지께 들어서 알고 있지. 우리 아버지께서 죽은 에멘스 님의 검술 스승이셨거든.”

에멘스 드 카르오. 그게 바로 테오도르의 형 이름이었구나.

“다만, 아버지에게 듣기로 에멘스 님이 검술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들었어. 검술뿐만이 아니라 책도 한번 보면 암기하는 천재였다고.”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책에는 테오도르에게 죽은 형이 있다는 말조차 없었던 데다가, 현실에서도 시골 평민에 불과했던 내가 과거에 카르오 대공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리가 없었으니까.

“아까운 인재가 죽었다고 아버지께서는 아직도 이따금 상심하곤 해. 에멘스 님이 살아계셨다면, 카르오 대공가가 지금처럼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하시지.”

이 또한 처음 듣는 사실이었다. 카르오 대공가가 책에서는 확고부동한 제국의 세력가라고 했었는데.

“카르오 대공가는 개국공신 가문으로 매우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지 않나요? 그런데 카르오 대공가가 흔들린다니,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개국공신에 강력한 세력을 가진 것은 맞아. 하지만 제국의 건국이 벌써 400년이나 지났어. 황실에서 개국공신의 공을 잊기에 충분한 시간이고, 새로운 강력한 세력이 나타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지.”“혹시, 이전에 말했던 테오도르 님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인가요?”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지만, 카르오 대공께서는 테오도르 님께서 벌써 성인이 된 지 오래인데, 많은 권한을 넘기지 않으셨어. 카르오 대공가의 유일한 후계자임에도 테오도르 님의 입지는 좁은 편이야. 계속 이렇게 된다면…… 뭐, 네가 거기까지 알 필요는 없겠지.”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졌다.

각성 덕분에 이 세계, 특히나 카르오 대공가나 테오도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소설에서 나오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다.

테오도르의 형 이야기, 대공가의 세력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도, 테오도르의 신변이 위험하다는 것까지.

아니, 대체 이 작가는 쓸데없는 설정을 왜 이렇게 많이 한 거지?

대체 작가라는 것들은 글은 안 쓰고 말이야, 왜 이렇게 세계관 짜는 것만 좋아하냐고!

이러다가 또 갑자기 숨겨진 설정이 나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앗! 잠깐! 혹시??

“저기, 인스트 님?”

“응?”

“혹시 입양되었다거나, 출생의 비밀이 있으시다거나 하시지는 않으시죠?”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혹시 아버님이…….”

“우리 아버지가 왜?”

“아, 아녜요.”

나는 남주와 서브남이 사실은 이복형제라는 흔하디흔한 로맨스 소설의 설정이 혹시나 <카르오의 인형>에도 쓰였는지는 물어보려했다.

하지만 이걸 본인에게 묻는 것은 너무 패륜적인 질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왜? 뭔데?”

“아무것도 아녜요.”

“괜찮아. 말해 봐.”

하지만 했던 말을 주워 담기엔 인스트가 너무 끈질겼다.

“이, 인스트 님은 그럼 아버님을 닳아서 잘생기신 건가요?”

에라, 모르겠다! 필살기를 날리자!

나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거짓 질문을 했다.

“아~ 뭐야. 그게 궁금했구나! 그래. 우리 아버지도 한때는 잘생겼다는 소리를 많이 들으셨지. 하지만 나의 잘생긴 외모는…….”

나는 잠시 영혼을 빼내 먼 곳으로 보냈다. 그리고 영혼 없이 인스트의 자화자찬을 들었다.

아니, 사실은 안 들었다.

죄송해요, 기사님. 다음부터는 그런 질문 하지 않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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