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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40화 (40/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40

“아~. 맛있었다!”

너무 맛있어서 정신없이 먹다 보니, 넉넉하게 들고 왔던 고구마는 어느새 동이 났다. 분명 테오도르에게 맛을 보여주려고 했었는데, 내가 더 많이 먹어버린 것 같았다.

“여기, 묻었어.”

테오도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가 자기 오른쪽 입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는 걸 봐선, 묻었다는 것은 내 입가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 여기요?”

그대로 손으로 입가를 닦으려다가, 장갑이 더 새까맣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입가도 이 장갑이 닿아서 검댕이 묻은 거겠지.

얼른 장갑을 벗고, 손으로 쓱쓱 입가를 닦았다. 순간, 나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는 테오도르의 시선이 느껴졌다.

‘가만, 이건 마치 로맨스의 한 장면 같은데?’

칠칠찮은 여주가 입가에 뭔가를 묻히고, 손으로 닦아보지만, 남주가 거기가 아니라면서 손수 닦아주는 장면 말이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고, 두근두근.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당연히 키스!!

물론, <카르오의 인형>에는 이런 로맨틱한 장면 같은 것은 없었다. 거기는 눈만 마주치면, 아니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이미 테오도르가…….

아, 안돼. 본인을 앞에다 두고 그런 장면을 떠올리는 건 거의 성희롱이라고!

“여긴가요?”

“그래. 맞아.”

내 질문에 테오도르는 바로 거기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맨스 소설의 여주와는 다르게 나는 한방에 검댕이 묻은 위치를 찾아버렸다.

‘그럼, 그렇지.’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흔한 로맨스 소설도 아니었고, 나도 로맨스 소설의 여주가 아니었다.

“그런데.”

하지만 내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테오도르는 로맨스 소설의 남주였다. 비록, 피폐물이긴 하지만.

“네 손에도 검댕이 묻었던 모양이야.”

고개를 내려보자, 그의 말대로 내 손에는 검댕이 묻어 있었다. 장갑을 꼈지만, 그 안으로 작은 검댕이 분말들이 스며들어 간 모양이었다.

“얼굴이 더 더러워졌군.”

테오도르의 손이 내 쪽으로 뻗어왔다. 마치 로맨스 소설처럼.

‘어떻게 해!’

내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로맨스 소설처럼.

테오도르의 기다란 손가락이 내 턱과 뺨 사이의 어딘가 닿자, 두근거리기 시작했던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테오도르의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내 얼굴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내 심장이 뛰었다.

“잘 안 되는데.”

그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내 뺨을 문질렀다. 그러다 언뜻, 그의 손가락이 입술에 닿았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발가락에 흠칫, 힘이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힘이 들어간 것은 발가락만이 아니었다.

어쩔 줄 몰라서 맞잡고 있던 두 손도, 어깨도, 방금 먹은 고구마가 가득한 배도 마찬가지였다.

테오도르의 손가락이 내 입술에 닿은 순간, 그야말로 나는 굳어버리고 말았다.

거기다가 미친 듯이 뛰고 있던 심장은 일순간 뛰는 것을 거부하고, 그대로 쿵! 하고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손수건이 어디 있을 텐데.”

테오도르의 시선이 손수건을 찾느라 내게서 잠시 떨어진 순간,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내 심장 괜찮나? 방금 바닥에 떨어진 것 같은데?

아니, 그것보다도 그전에 잠깐 멈췄던 것 같아! 심장이 멈추면 죽는 것 아니야? 나 지금 살아 있는 거 맞나?!

조심스럽게 정신을 그쪽에 쏟자, 아주 다행스럽게도 심장은 잘 뛰고 있었다. 평소보다 조금 빨리 뛰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일단은 무사했다.

“아, 아뇨. 괜찮아요! 그러면 손수건이 더러워지잖아요.”

황급히 손수건을 찾는 테오도르를 향해서 소리쳤다.

“손수건이야 빨면 되니까 괜찮아.”

“제 얼굴도 빨면 되니까 괜찮아요.”

“얼굴을 빨아……?”

“아, 아뇨! 그게, 얼굴을 빠는 게 아니라 얼굴은 씻으면 되니까, 그러니까 세수를 한다고요. 빨리 가서 세수해야겠네요!”

고구마껍질과 장갑이 담긴 쟁반을 들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테오도르가 무슨 말을 더하기 전에 그대로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 * *

아마도 레나티스가 방을 뛰쳐나간 지 1분도 되지 않았을 거다. 별안간 문이 벌컥 열렸다.

테오도르가 고개를 돌리자 마치 토마토처럼 빨갛게 익은 얼굴의 레나티스가 보였다.

“벽난로에 불을 안 붙여드리고 나갔네요.”

그제야 테오도르가 처음에 레나티스가 방에 온 이유가 벽난로의 불을 붙여주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어쩌다 보니 밤중에 고구마파티가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후우~ 후우~.”

열심히 숯불에 숨을 불어넣는 소리가 테오도르의 귀를 간지럽혔다. 덤불같이 봉긋하게 솟아오른 분홍색 머리카락이 그 호흡을 따라서 나풀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슬쩍, 테오도르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재미있는 머리카락이었다. 그리고 재미있는 애였다.

레나티스라는 하녀는. 혹은 마녀는.

대체 무슨 맛인지 모를 요리를 내오지를 않나, 제 앞에서 당당하게 돈을 모아서 이 저택을 나갈 거라고 말하지를 않나, 자신에게 시꺼먼 검댕이 잔뜩 묻은 고구마를 손으로 먹으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거기다가 얼굴을 빨겠다고 했지.’

잔뜩 빨개진 얼굴로 조금 전에 레나티스가 했던 말을 떠올리자, 테오도르의 입가에 미소는 더욱 진해졌다.

레나티스의 얼굴이 왜 빨개졌는지, 왜 그렇게 당황했는지, 테오도르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자신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더듬고, 입술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레나티스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것 또한 테오도르에게는 재미있는 장난이었다.

‘입술을 더 만졌으면 어땠을까?’

얼굴이 더 빨개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다른 곳도.

‘다른 곳을 만졌다면 어땠을까?’

너는 허락했을까? 아니면 도망갔을까?

미치지 않은 내게 너는 어디까지 허락할 수 있지? 아니면, 미친 척을 하면 어디까지 가능하지?

자꾸만 테오도르의 안에서 의문이 솟아올랐다.

‘검댕이 묻은 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지금쯤은 알까?’

아니. 모를 것이다.

레나티스는 처음부터 제 입가에 검댕이 묻은 적이 없다는 것을, 오히려 제가 검댕이 묻은 손으로 만져서 지금 얼굴에 검댕이 묻어 있다는 것을, 그저 레나티스의 얼굴을 만져보고 싶은 충동에 테오도르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저 순진한 여자가 알 리가 없었다.

‘한 입 베어 물면, 달콤한 맛이 날 것 같아.’

마치 분홍색 뭉게구름 같은 레나티스의 머리카락을 보고 한 생각은 테오도르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생각이었다. 사람 머리카락이 달콤하다니.

하지만 어쩐지 레나티스의 머리카락은 그럴 것 같았다. 보통의 사람과는 달리 달콤한 맛이 날 것 같았다.

실제로 그녀의 입술은 달콤했다.

어디 입술뿐일까? 목구멍을 넘어가는 타액도, 가뿐 숨결도, 그리고 살짝 배어 나온 땀까지.

레나티스의 모든 것이 달콤하다는 것을 테오도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마녀라서?’

말이 안 되는 이유라는 것을 알지만, 테오도르는 되지도 않는 이유를 가져다 붙여 보았다.

근처에 레나티스가 있으면 자꾸만 보게 되었고, 보고 있노라면 자꾸만 그녀를 생각하게 되었다.

말이 되든, 되지 않든,

‘아니. 보지 않을 때도 생각하나?’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지금쯤 레나티스는 뭐 하고 있을지를 생각하던 중에 그녀가 나타난 것이었으니.

‘좋아하는 사람이라…….’

테오도르의 머릿속에서 꼬리의 꼬리를 물던 생각이 레나티스가 한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대목에까지 다다랐다.

그리고 그 생각을 떠올리자 테오도르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굳어졌다.

그때 웃고 있던 레나티스의 얼굴은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분명히 알 수 있는 얼굴이었다. 지금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행복하고, 따스하며, 더없이 아름다웠다.

“…….”

누군지도 모르는 그를 떠올리며, 테오도르는 주먹을 쥐었다. 또한, 어금니를 꽉 깨물기도 했다.

하지만 나풀거리고 있는 분홍색 머리카락 덤불이 테오도르의 눈에 들어오자 몸을 빡빡하게 긴장시켰던 힘이 저절로 스르륵 풀렸다.

‘뭐, 상관없지.’

다시 테오도르의 입가에 느른한 미소가 걸렸다.

레나티스는 여기에 있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놈의 시선이 닿는 곳이 아니라, 테오도르의 시선이 닿는 곳에.

그가 손을 뻗으면 레나티스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만질 수 있는 곳에, 그녀의 말랑한 뺨을 느낄 수 있는 곳에, 매끄러운 흰 피부를 쓸어내릴 수 있는 곳에, 말캉한 입술에 제 입술을 부딪칠 수 있는 곳에.

누군지도 모르는 그 새끼는 지금 이곳에 없었다.

“다 되었습니다, 테오도르 님.”

레나티스가 뒤를 돌았을 때, 테오도르는 이미 입가에 있는 미소를 싹 감춘 뒤였다. 마치 고양잇과의 짐승이 날카로운 발톱을 순식간에 감추는 것처럼.

“아, 그래.”

레나티스의 말처럼 벽난로 안에서는 붉은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곳에서 환한 빛과 따스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고했어.”

하지만 테오도르를 천천히 달아오르게 만드는 것은 난로의 불이 아니었다.

그의 안에 있는, 아직은 그 정체가 무엇인지 모를 작은 불씨를 착실히 타오르게 만드는 것은 바로 앞에 있는 여자였다.

테오도르는 확실히 19금 피폐물의 남자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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