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38
“안녕, 레나티스.”
“으응!”
나도 클레어에게 인사를 해주고 싶었지만, 입안이 음식으로 가득 차서 대답해줄 수 없었다.
대신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여 알은체하자, 클레어가 웃으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와! 오늘 아침은 특히 엄청나네.”
내 접시를 본 클레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내 접시는 바닥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히 쌓여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반응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클레어! 사실은 너에게 부탁이 있어!”
“부탁?”
“네가 별채 텃밭 담당이라고 했지?”
나는 이전에 클레어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주방장님이 싱싱한 식재료를 좋아하셔서 별채의 뒤뜰에는 조그만 텃밭이 있고, 그걸 농장 출신의 클레어가 도맡아서 키우고 있다고.
“응. 맞아.”
“오늘 내가 거기서 일 좀 해도 될까?”
“일을 도와준다면, 나야 환영이지.”
“고마워! 열심히 일할게!”
포크를 쥔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활활 불태웠다.
어젯밤에 떠오른 전생의 기억 중에 하나. 힐링물의 장르 중에는 농사물도 있었다.
역시나 전연령인지라 읽지는 않았지만, 제목이나 표지만 봐도 대충 무슨 소재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생의 내가 가장 많이 한 일이 바로 농사였다.
내가 자란 마을은 작은 시골 마을이었고, 주로 밀과 감자 농사로 먹고사는 곳이었다. 언니와 내가 주로 일한 곳도 바로 밭이었다.
밭 고르기, 풀 뽑기, 거름주기, 수확하기 등등!
요리는 몰라도, 농사만큼은 자신 있었다.
* * *
초가을의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반짝이는 햇살 아래 비타하우스의 텃밭은 잡초 하나 없이 깨끗했고, 작물은 방금 물을 주어 더욱 파릇파릇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거기다가 한쪽에는 오늘 수확물인 푸른 콩과 고구마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와~ 고구마가 엄청 실하다. 거기다가 상처도 하나 없이 잘 캤네?”
저쪽에서 점심에 쓸 허브를 뜯고 있었던 클레어는 내가 캔 고구마를 보고 감탄했다. 그 반응에 나는 더욱 우쭐해졌다.
“이래서 농사가 힐링물인건가?”
허리에 손을 얹고 당당하게 서서, 깨끗한 밭과 토실한 수확물을 보자 뿌듯한 만족감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3초 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힐링이 되어서 어쩌자고!”
그랬다. 농사물은 매우 확실한 힐링물이었지만, 그 주체가 되어야 할 테오도르는 이 장르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귀족인 테오도르가 농사를 지을 리 없었으며, 잘 자란 농작물을 보며 뿌듯해하는 지주도 아니었다.
오히려 건물 뒤쪽에 있는 이 텃밭 쪽은 테오도르의 이동 동선에 있지도 않아, 그야말로 그가 거들떠보려고 해도 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테오도르를 억지로 끌고 와서 농사일을 시킬 수도 없잖아!”
테오도르는 우아하게 정원을 산책하고, 식탁에 올라온 것을 먹고, 손에 흙 한 톨 묻히지 않는 귀족 나리였다.
“어째서어어어!!”
테오도르가 농사와는 1억 광년쯤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나는 절규했다.
“왜 저러는 거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나의 짧은 생각에 절망하고 있을 때, 뒤에서 오르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글쎄…… 요?”
그리고 클레어의 서먹한 목소리도.
* * *
삶은 고구마와 빵. 그리고 고구마수프.
오늘의 점심 메뉴였다.
“고구마밭이야, 뭐야?”
사람들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텃밭의 고구마가 너무 잘 자랐다는 것도 내가 오늘 너무 많은 고구마를 캐 버려서 메뉴가 이렇게 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윽!”
열심히 먹다가 일순간 목이 메였다. 가슴이 꽉 막히고, 숨이 턱 막혔다.
“무, 물……!”
황급히 눈으로 물을 찾았다. 순간, 독자들이 왜 그렇게 고구마를 싫어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슴의 답답함이 생과 사를 오가는데, 대체 누가 좋아하겠냔 말이다. 내가 이따위 고구마! 다시는 먹나 봐라!
“이거 마셔, 레나티스.”
옆에 있던 클레어가 얼른 마실 것을 내 손에 건네주었다.
그게 뭔지 따질 겨를도 없이 벌컥 들이키자, 고소하고 진한 액체가 막혀 있던 목구멍을 뚫어주었다.
그리고 입 안에 남아 있던 고구마를 싹~ 씻어주면서, 막힌 목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데다가, 달콤한 고구마와 입안에서 같이 섞이니까…… 맛있잖아!
“오! 이거 뭐야?”
“우유야.”
“고구마랑 같이 먹으니까 엄청 맛있다!”
“너희 동네에서는 이렇게 안 먹어? 여기선 원래 고구마와 우유를 함께 먹는데.”
“응. 난 처음이야.”
다시 한번 고구마를 베어 먹고, 목이 막힐 때쯤 다시 우유를 마셨다.
오오! 다시 먹어도 맛있는데?
“맛있다!”
나는 신나서 고구마를 베어 먹었다. 우유와 함께라면 100개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구마, 좋아! 최고!
대체 누가 고구마를 싫어하는 거지? 당최 이해가 안 되네.
* * *
“이곳에 온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 한 번도 휴무 신청을 안 했더군.”
오르디의 말에 나는 그저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방에 찾아와 왜 쉬지 않냐고 물으면, 쉬지 않아서 죄송하다고 말해야 하는 건가?
“꼭 쉬어야 하나…… 요?”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 다른 고용인들은 돌아가면서 쉬고 있거든.”
그건 알고 있다. 종종 클레어가 쉬는 날이라며 일을 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으니까.
“테오도르 님이 걱정돼서 그런 것 같은데, 저택에서 멀리 나가지만 않으면 괜찮아.”
오르디는 매우 따스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테오도르가 걱정돼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오르디는 또 오해한 것 같았다.
언젠가는 이 오해를 바로잡아야 하지 않을까 싶긴 하지만, 나를 이렇게 기특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오르디에게 실망을 주면 안될 것 같았다.
“휴무를 신청해서 좀 쉬는 게 어때?”
“저는 괜찮은데요.”
“사양하지 않아도 돼. 오늘 낮에 보니, 스트레스가 좀 쌓인 것 같더군.”
오늘 낮이라면, 내가 열심히 고구마를 캘 때를 말하는 걸까?
오르디의 목소리를 그때 언뜻 들었었다. 나중에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가고 없었지만.
“열심히 일하는 것도 좋지만, 조금 쉬는 것도 재충전의 기회가 돼. 그러니 필요할 때 언제든지 말해.”
“네, 그럴게요.”
격려의 의미를 담아 오르디는 내 팔을 툭툭 쳤고,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만 가보지.”
자리에서 일어난 오르디가 돌아가기 위해서 방문을 연 순간이었다.
“꺅!”
방문 앞, 복도에 클레어가 서 있었다. 갑자기 열린 문에 놀란 것인지 비명을 지르면서.
“까악!”
그리고 갑자기 방문을 연 사람이 오르디라는 것을 알아차리곤, 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
“왜 내 얼굴을 보고 소리를 지르는 거지, 클레어 오도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오르디가 클레어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에 클레어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네?”
“왜 내 얼굴을 보고 소리를 지른 거냐고.”
“제, 제가요?”
당황한 목소리로 되묻는 것을 봐선, 클레어는 자기가 소리를 질렀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오르디를 보자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오르디는 그게 기분이 나쁜 듯했다. 누가 자기 얼굴을 보고 소리를 지른다면, 충분히 그럴 법했다.
“그래. 네가.”
“네?”
“…….”
“아? 에? 네?”
“…….”
“……죄송합니다.”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는 오르디의 눈빛에 클레어는 당황하다가, 끝내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거기다가 하얗게 질려 있던 얼굴을 이제 발발 떨고 있기까지 했다.
마치 뱀 앞에 놓인 쥐의 형상이랄까? 아니, 클레어는 쥐라기보다는 뺨이 오동통하고 무해한 햄스터에 가까웠다.
어쨌든 그런 클레어를 보며, 오르디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
툭툭.
오르디는 더 무슨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체, 오돌오돌 떨고 있는 클레어의 머리를 손으로 두 번 살짝 두드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오르디는 클레어를 지나쳐서 복도를 걸어나갔다.
“후에엥! 레나티스! 어째서 오르디 님이 네 방에서 나오는 거야? 나 정말 죽는 줄 알았어!”
오르디가 모퉁이를 돌자마자, 클레어는 우는소리를 하며 내게 하소연했다.
“방금 오르디 님이 내 머리를 이렇게 치셨지? 이거 무슨 뜻일까? 한 번만 더 그러면 네 머리를 박살을 내 버리겠다는 뜻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부드럽게 치신 것 같은데?”
“지금은 부드럽지만, 나중에는 아니겠지!”
“아까 내 팔도 이렇게 두드리셨는걸? 아마도 격려의 의미인 것 같…….”
“으악! 너에게도 그랬다고? 한 번만 더 그런 식으로 하면 팔을 부러뜨려버리겠다는 뜻일 거야! 대체 무슨 잘못을 한 거야, 레나티스!”
오르디가 사라지고 간신히 안색이 돌아왔던 클레어의 얼굴색은 다시 사색이 되었다.
거기다가 무슨 말을 해도 클레어의 귀는 오르디에 대한 공포로 꽉 막혀서 다른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클레어, 왜 내 방앞에 서 있었던 거야?”
이럴 때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나았다.
“아! 너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 온 거였어.”
“부탁?”
이곳에서 나보다 훨씬 오래 일한 클레어가 내게 부탁할만한 일은 없었다.
“그게 말이야. 이제 날씨가 쌀쌀해져서 저녁에는 테오도르 님 방에 벽난로를 지피거든. 돌아가면서 그 일을 하는데, 오늘은 내가 벽난로 담당이야. 그런데…….”
“뽀오오오옹~.”
클레어가 내게 말하는 중에 익숙한 듯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그리고 익숙한 듯 낯선 냄새가 풍겼다. 대략 뭔지는 알겠지만,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사람의 것이었다.
“고구마를 너무 많이 먹었나 봐. 아까부터 계속 나와!”
울상을 한 채, 클레어가 내게 말했다.
“뽀오옹~.”
그리고 클레어의 항문도 내게 말했다.
“나 대신 테오도르 님 방에 가서 벽난로 좀 지펴주지 않을래?”
“뽀봉?”
알았으니까, 방귀로 화음 넣어서 말하지 말아 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