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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35화 (35/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35

“맞아! 바로 그거야!”

점심을 먹다 말고 떠오른 생각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전생의 나는 19금 피폐물을 읽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읽지 않았지만, 한때 로판에서 유행했던 소재가 있었다.

김밥, 치킨, 떡볶이로 대표되는 K푸드물!

테오도르가 잠은 이미 충분히 자고 있다면, 그 다음은 역시나 음식이었다. 맛있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물론, 테오도르는 귀족으로 아주 맛있는 것을 잘 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로판의 다른 귀족들, 그러니까 남주나 여주의 가족들, 주변인들도 다들 마찬가지였다.

잘 먹고, 잘 사는 그들은 전부! 모두! 처음 먹어보는 K푸드의 맛에 홀딱 빠졌다.

그러니까 비록 장르는 조금 다르지만, 어째든 테오도르도 로판남주이니까 같은 루트가 되지 않을까?

“뭐가 바로 그거라는 거야?”

옆에 앉아 같이 아침을 먹던 클레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날씨가 참 좋네. 오후에는 뭐할 거야, 클레어?”

갑자기 소리친 게 부끄러워 대충 얼버무렸다.

“뭐하긴? 일하지.”

클레어는 더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넌 일 안 해?”

“아니. 나도 일하는데?”

“……하면서 노닥거리는 게 무슨 일이라고.”

분명 난 클레어에게 이야기했는데, 다른 쪽에서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아니꼽다는 시선으로 날 쳐다보는 갈색 머리 남자가 보였다.

그러니까…… 누구더라?

리타 아주머니가 고용인들 모두에게 나를 인사시켰고, 클레어가 언젠가 이름이 뭐라고 말을 해준 것 같긴 한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기에 와서 테오도르에게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바빴기 때문에 나는 클레어 외의 다른 고용인들과는 교류가 없었다.

“저한테 한 말인가요?”

누군지는 모르지만, 비타하우스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우리가 제일 어리다고 클레어에게 들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 여기 일하는 사람 중에서 바쁘게 일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으니까.”

괜히 물었나 보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쏘아붙였다.

“우리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 먹기 전부터 일을 시작해. 그런데 넌 뭐야? 늘 자다 일어나서 부스스한 머리로 아침을 먹으러 오잖아.”

“그건 오해세요. 제 머리카락은 곱슬머리라서 늘 부스스해요.”

“그래? 그럼 넌 아침에 일어나서 무슨 일을 하는데?”

“세수도 하고, 방 청소도 하고…….”

“그건 개인 생활이지 일이 아니잖아. 난 아침에 눈 뜨자마자 장작을 패. 클레어, 넌 뭘 하지?”

옆에 앉아 있던 클레어가 괜한 화살을 받자 움찔했다.

“전 채소를 다듬어요.”

슬쩍 내 눈치를 보던 클레어는 마지 못해 입을 열었다. 클레어의 대답에 남자는 보란 듯이 다시 나를 노려보았다.

“봐! 우리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일한다고. 그런데 넌? 테오도르 님의 차 시중을 드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하고, 펑펑 놀기만 하잖아.”

무리하지 말고 컨디션을 조절하는 것이 내 일이었으니까. 다만, 지금 문제는 그게 내 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아주 소수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오르디와 리타 아주머니, 그리고 인스트 정도일 것이다.

내 앞에서 화를 내는 남자도,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클레어도 그게 내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대체 리타 아주머니는 왜 널 편애하시는 거지? 오르디도 네가 놀고 먹는걸 못 본 척하고.”

저 말은 억울했다. 놀고먹는다고 하기엔 테오도르의 진정제 역할은 너무 극한직업이었다.

“네가 분홍 머리 마녀라서 눈치를 보시는 모양인데, 그럴 거면 널 고용하지 말았어야지!”

아마도 그는 결론을 그렇게 내린 모양이었다. 내가 분홍 머리 마녀라서 리타와 오르디가 내 편의를 봐준다고 말이다.

“애초에 일하기 싫었으면, 네가 여기에 취직하지 말았어야지! 네가 일을 하지 않는 만큼 다른 사람들이 더 일해야 하니까, 다들 피해를 보고 있잖아!”

그는 정말 분한 듯,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쾅! 하고 내리쳤다. 거기다가 아까보다 더 분노에 찬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나? 나는 전혀 그가 겁이 나지 않았다.

지하 감옥에서 처음 봤던 테오도르의 눈빛에 비하면, 지금 그의 눈빛은 선량하기 그지없는 사슴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가 화가 나서 날 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자기 손을 테이블로 치는 건 전혀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어…….”

무슨 말이라도 해야 이 상황이 끝날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좀 억울하긴 했지만, 사과를 하라면 할 수는 있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하지만 그런다고 저 남자의 화가 풀릴 것 같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그의 눈에는 내가 놀고먹는 것으로 보일 테니까.

그렇다고 ‘사실은 제가 특수임무 중이거든요. 테오도르에게 체액을 빨리는 업무가 있는데, 혹시 그쪽 분께서 가능하시다면 저는 언제든 이 업무를 인수인계해 드릴 용의가 있는데요.’라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럼, 아침에 제가 장작을 패드릴까요?”

그래서 나는 내 일을 그에게 넘기는 대신, 그의 일을 내가 넘겨받기로 했다.

“뭐?”

“아침에 장작 패는 게 힘드시다면, 제가 아침에 장작을 패드릴게요.”

“하! 지금 날 놀리는 거야?”

“전혀 아닌데요.”

“아니면? 너같이 조그만 여자애가 장작을 팬다고? 도끼를 들지도 못할 것 같은데.”

그는 그야말로 비웃으며 말했다.

“아닌데요. 저 장작 잘 패요. 원래 집에서도 제가 한걸요.”

“나뭇가지나 분질렀겠지.”

“진짜 두꺼운 나무였는데요.”

“얼마나 두꺼운 나무였는데? 한 네 팔목 정도 되나?”

내 팔목…… 두꺼웠나?

새삼스럽게 내 팔목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여기 와서 워낙 잘 먹어서 좀 통통해진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보통인 것 같기도 하고.

“클레어, 내 팔목 두꺼워?”

“저기, 레나티스. 노아 아저씨 말은 네 팔목이 두껍다는 이야기가 아닐 거야.”

“아, 그래? 다행이다. 살이 쪘나 하고 살짝 고민했어. 그럼 내 팔목은 두껍지 않은 거지?”

“응. 오히려 넌 먹은 거에서 비해서는 살이 찌지 않는 편…….”

“지금 둘이서 뭐 하는 거야! 나 무시해?”

아, 맞다. 나 저 아저씨한테 갈굼당하고 있었지?

이제는 이름을 알게 된 노아 아저씨는 벌게진 얼굴로 나와 클레어를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보다 더 화가 난 것 같았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죠?”

“이게 진짜!”

나는 순수한 물음으로 침착하게 질문했건만, 노아 아저씨는 전혀 침착하지 못하게 대응했다. 어째 내가 입을 열수록 그는 더 화가 나는 듯했다.

그럴 거면 애초에 나한테 말을 걸지 않은 편이 서로에게 더 좋았을 텐데.

“장작까지 이야기했어. 네가 노아 아저씨 대신 아침에 장작을 패겠다고 말이야.”

팔꿈치로 내 팔을 쿡 찌르며 클레어가 대신 대답해주었다.

“아, 맞아.”

“맞긴 뭘 맞아!”

역시나 내가 입을 열자, 노아 아저씨는 버럭 화를 냈다.

“아침에 장작을 패는 게 힘드시다면, 제가 대신해드릴게요.”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말을 이어갔다.

“대신 하긴 뭘 해! 여자애가 무슨 장작을 팬다고. 이것도 날 골탕 먹이려는 수작이지? 내가 너더러 장작을 패라고 시켰다고 오르디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이르려고?”

“전 그런 고자질쟁이 아녜요.”

“아니면, 아침에 장작이 없어서 내가 혼나게 만들려는 수작이겠지. 너같이 조그만 여자애가 무슨 장작을 팬다고.”

“첫 번째, 저는 그렇게 조그맣지 않아요. 두 번째, 아저씨를 혼나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요. 세 번째로, 아까부터 왜 자꾸 제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장작 패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요.”

“하! 네가 시골 촌구석에서 와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이 저택에서 필요한 하루 장작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 그리고, 내가 쓰는 도끼는 네가 쓰던 앙증맞은 손도끼 따위랑은 차원이 달라.”

노아 아저씨는 콧바람을 킁! 하고 내뱉으며 장작과 도끼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을 뽐냈다. 더 말해봤자 입만 아플 것 같았다.

“그럼, 이렇게 하죠.”

그래서 나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기로 했다.

* * *

“음머어어어어~.”

누런 소가 길게 울음을 내빼었다.

별채에서 장작을 패는 곳은 마구간 옆이었다.

사실은 말은 두 마리밖에 없었고, 소와 염소, 닭까지 있는 작은 목장이나 다름없었지만, 어쨌든 다들 마구간이라고 불렀다.

“12개입니다.”

긴장된 목소리의 클레어가 꼽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 개수에 노아 아저씨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띤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봤지?’

아저씨의 얼굴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물론, 보고 있었다.

“자, 네 차례야. 네가 1분에 장작 12개 이상 패면, 약속대로 다시는 네 일에 입도 벙긋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입단속까지 내가 책임지고 하지.”

“약속 지키시길 바랄게요.”

“너야말로 네가 나보다 장작을 더 많이 하지 못하면, 네 월급의 20%를 내게 떼준다는 약속이나 지켜.”

히죽, 웃는 노아 아저씨의 표정에서는 이미 자기가 내 월급을 꿀꺽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는 것 같았다.

“물론이죠.”

나는 구경꾼들 사이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조금 전 노아 아저씨가 썼던 도끼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확실히 내가 집에서 쓰던 도끼보다 더 크긴 했다.

하지만,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 법이었다.

“시작할게요.”

내가 도끼를 한 손으로 번쩍 집어 든 순간,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아직 놀라기엔 이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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