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33
천재적인 발상인 힐링물 대작전에는 아주 작고,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도대체 힐링물이 뭔데?”
전생의 나는 로맨스 소설을 많이 읽기는 했지만, 극한 편식러이기도 했다.
로맨스, 로판, 동로, 현로판, 비엘 등등. 겉보기에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 척을 했지만, 로그인을 하지 않으면 표지도 볼 수 없는 서재의 소유자였다.
즉, 전생의 나는 19금 피폐물이라는 한 우물만 팠다.
거기다가 남주 취향도 매우 확고했다.
황제, 공작, 상인, 사장, 비서, 실장님, 수인, 묘족, 악마, 뱀파이어 등등. 다양한 남주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은 전부 하나같이, 미친 놈, 도른자, 계략남이었다.
처음에는 평범한 남주로 시작한다 해도 결말에는 결국 집착광공이 되어서 끝이 났다.
오죽하면 전생의 내가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전자 서재 탈퇴하고 죽기였으니까. 아늑한 나의 쓰레기통은 오직 나만의 것이어야 했다.
만약에 누가 그 서재의 목록을 보기라도 한다면? 그게 혹시 내 친구이거나, 일가친척이거나, 내 자손이라면…….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나 전생에 그거 확실히 탈퇴하고 죽었나?”
분명 내가 전생에 읽은 책마저 기억이 나는데, 죽을 때 장면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팠던 것인지, 아니면 죽기 전이라 혼란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 떠올리려고 하면 흐릿했다.
분명히…… 내가 그걸 지운 것…… 음…….
에이, 모르겠다!
전생의 ‘나’도 ‘나’이긴 하지만, 현생의 ‘나’는 아니잖아? 자기가 알아서 했겠지. 거기다 이미 죽었으니, 쪽팔려서 죽을 일도 없는데, 뭐.
지금 중요한 건, 지금의 ‘나’였다. 힐링물로 이 세계의 장르를 바꿔야 하는 막대한 임무를 가진 ‘나’ 말이다.
“스기엔, 힐링이 뭐라고 생각해?”
“마사지라며.”
점심 식사에 나온 오렌지를 조금 남겨 온 것을 열심히 먹고 있던 스기엔은 먹는 데 방해가 된다는 듯이 참으로 성의 없이 대답해주었다.
“내가 테오도르에게 마사지해준다고 장르가 바뀔 것 같지는 않단 말이야. 게다가 언니는 내 마사지가 시원한 게 아니라 아프다고 했거든.”
테오도르에게는 아직 해보진 않았지만, 별반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아버지도 내가 주물러 주는 건 아프다고 했으니까 말이다.
물론, 아버지에겐 일부러 아프게 한 것이었다. 밤마다 술 냄새를 풍기는 아버지의 어깨나 다리를 주물럭거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스기엔은 어떨 때 기분이 좋아지고, 마음이 편안해져?”
“나는…… 음…….”
오렌지를 다 먹고 나서야 스기엔은 제법 진지하게 고민해주었다.
“인간을 내 앞에 무릎 꿇게 만들고, 그를 내 수족으로 부리며, 내 마음대로 조종할 때?”
“…….”
“온 세상이 나의 지배에 복종하며, 머리를 조아릴 때?”
잠시 잊고 있었다. 스기엔도 몬스터라는 것을.
슬라임이긴 하지만, 본인은 고위 마족이라는 과대망상을 한다는 것도.
“다른 건 없어? 그러니까 몬스터 적인 의견 말고, 인간적인 관점에서?”
“인간이 아닌데 인간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말하라는 거야?”
“그렇긴 하지만…….”
나는 여전히 미련이 남았다. 대놓고 이런 것을 물어볼 수 있을 만한 상대가 스기엔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어제의 스기엔은 엄청나게 도움이 되었었다.
“그런 거대한 야망 같은 것 말고, 스기엔을 기분 좋게 만들어 주는 건 없어? 예를 들면…….”
뭐가 있을까 싶어서 스기엔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잘은 모르지만 힐링이라는 게 세계정복같은 거대한 것은 아닐 듯했다.
그때, 내 눈앞에 다 먹고 남은 오렌지 껍질이 눈에 띄었다.
“맛있는 것?”
“오! 그렇지. 네가 가져다 바치는 공물은 참 맛있지.”
내가 주는 간식을 공물로 생각하고 있었군. 제물이라고 말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일까?
하지만 문제는 이미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고 있는 테오도르는 새삼스럽게 먹을 것에 반응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엄청나게 맛있는 푸딩도 말 한마디면 먹을 수 있는 위치니까.
“그리고 네 옆에서 잠을 자는 것도 좋아.”
“잠?”
뜻밖의 대답이었다.
“응. 전에도 말했지만, 너한테는 묘한 냄새가 나거든.”
스기엔의 말에 킁킁거리며 내 냄새를 맡아보지만, 묘한 냄새라는 것이 뭔지 알 수 없었다.
“뭔가 달콤하고, 포근하고, 기분 좋아지는 냄새야.”
내 무릎 위로 퐁! 튀어 올라오며 스기엔이 말했다.
“좋은 꿈을 꿀 것 같은 냄새지.”
헤에~. 슬라임도 꿈을 꾸는구나. 처음 알았다.
“잠이라……. 그건 테오도르에게도 해당이 될 것 같은데?”
이전에 스기엔을 테오도르에게 정찰 보냈을 때, 분명히 낮잠을 자고 있었다고 했었다.
이전에 잠을 잘 못 잔 것 같았을 때는 상당히 예민해 보이기도 했었고.
광증이 해소되면 곧장 기절하고, 그대로 잠들어버리는 걸 봐선 테오도르의 육체에 잠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한 요소일 수도 있었다.
애초에 사람의 가장 중요한 욕구가 식욕, 성욕, 그리고 수면욕이었다. 식욕은 이미 잘 채워지고 있었고, 성욕은 내가 채워주기엔 좀 그랬다.
“맞아. 생각해보니 소설 속에서도 테오도르가 잠을 잔다는 장면은 별로 없는 것 같네.”
왜냐하면, 그는 밤낮으로…….
“왜? 뭐? 너 왜 빨개져?”
내 무릎에 앉은 스기엔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닌데? 안 빨개졌는데?”
잠시 소설의 내용을 떠올리고 있던 나는 황급히 얼굴을 감싸며 시치미를 뗐다.
“그래! 꿀잠이라면 테오도르를 힐링시킬 수 있을 거야!”
* * *
“이게 뭐지?”
“따뜻한 우유입니다.”
테오도르의 질문에 함박 웃으면서 대답했다.
수면에는 역시 따뜻한 우유지. 거기에다가 달콤한 꿀도 조금 넣어서 기분도 릴렉스 시켜줄 수 있도록 했다.
따뜻한 우유에 달콤한 꿀 한 스푼! 오늘 밤, 테오도르는 꿀잠 예약이다!
“…….”
하지만 테오도르는 내 특제 꿀잠 우유를 마시는 대신,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밖에 뭐가 있나 싶어서 나도 쳐다보았지만, 별것은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잘 가꾸어진 정원이 보일 따름이었다.
여름이 다가오는 가을을 질투라도 하건지, 오늘은 유독 날씨가 더웠다. 쨍쨍한 햇볕과 화창한 날씨 덕에 정원이 더욱 활기가 넘치고 푸릇해 보이기는 했다.
“준비한 다른 것은 없나?”
물론 있었다. 리타 아주머니께서 늦여름 더위가 기승이라며 시원한 레모네이드를 준비해주셨다.
“있긴 한데…… 이게 지금 따뜻해서 딱 드시기 좋아요.”
“…….”
“따뜻한 우유를 마시면 잠도 잘 오고요.”
“벌써 잘 시간은 아닌 것 같은데.”
“우유에는 영양가도 많고요!”
“내가 영양이 부족해 보인다는 건가?”
슬쩍, 테오도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뇨. 그런 뜻은 아니고요.”
물론, 테오도르가 영양이 부족할 리가 없었다. 주방장님이 그가 먹을 영양을 고려해서 정성껏 식단을 짜고, 요리하시니까.
테오도르는 보통의 남성보다 큰 키에 약간 마른 체형이었다.
내 취향이 되려면 10cm정도 더 크고, 30kg 정도 더 쪄야 할 것 같긴 하지만 그건 오롯이 내 취향일 뿐, 지금 테오도르의 키와 몸무게는 매우 적당했다.
그리고 얼굴은 지나치게 잘생겼고.
“지난번에도 나에게 밥을 더 먹어야 한다느니, 골고루 먹어야 한다느니 하지 않았나? 살이 좀 더 쪄야 한다고.”
“어…….”
맞다. 내가 그랬었다. 하지만 그건 테오도르가 자꾸 기절하니까 그런 거였는데.
“왜? 내가 말라깽이 같나?”
“그건 아니고요.”
“아니면, 픽픽 기절하는 허약한 놈으로 보여?”
그건 조금은 맞지만…….
“아, 아뇨.”
맞는다고 대답할 수는 없지.
“그럼 왜 자꾸 내 식단과 영양에 관심을 가지는 거지?”
“그게…….”
대답할 말이 없었다.
사실은 내가 전생을 기억하고 있고, 너는 사실 소설 속 피폐물 남주라서, 내가 너 피폐하지 않게 해주려고 그런다고 하면, 과연 테오도르가 믿을까?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설사 믿는다 치더라도 여주도 아닌, 여주 동생 주제에 네가 날 구원하려고 드냐는 빈정거림을 당할지도 몰랐다.
최악의 경우, 여주라는 네 언니를 데려와 보라고 한다면 정말로 끝장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테이블에 놓았던 따뜻한 우유를 다시 웨건에 담았다.
박하 차를 바로 준비하려고 했지만, 테오도르와 입씨름을 하는 사이에 이미 물이 식어 있었다.
“다시 차 준비를 해오겠습니다.”
허둥지둥 주전자의 뚜껑을 닫으려는데, 마음이 급해서인지 아귀가 잘 맞지 않았다.
“하아…….”
등 뒤에서 테오도르의 한숨 소리가 들리자 마음이 더 급해졌다.
‘빨리 다시 차 준비를…… 앗!’
억지로 힘으로라도 찻주전자의 뚜껑을 맞추려는데, 너무 힘을 준 탓일까? 아니면, 내가 힘이 너무 센 탓일까?
힘을 꽉 줘서 뚜껑을 세게 누른 순간, 아귀가 맞지 않는 뚜껑이 주전자 입구에서 뒤쪽으로 미끄러졌다. 그리고 주전자는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버렸다.
“앗!”
주전자에 담긴 물은 차를 우리기에는 식어버린 물이었지만, 그렇다고 미지근한 물은 아니었다.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저 젖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을 정도이리라.
그것이 왈칵 내 쪽을 향해서 쏟아져 내리는 순간, 위험하다는 생각에 외마디 비명이 입에서 터져 나왔다.
저절로 발이 뒤로 물러나는데,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어?’
무언가가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뒤로 확 잡아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