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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32화 (32/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32

“얼마나 무서웠을까?”

깜깜한 바깥을 쳐다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자신과 피를 나눈 형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광경을 목격한다는 것은, 뭐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저 어두운 숲속을 헤매는 것보다 더 무서웠을 것이다.

나는 아주 잠깐, 언니가 누군가를 죽인다는 상상을 해보았다. 물론, 착하고 예쁜 아스텔라 언니가 살인할 리 없었다.

“하지만 ‘만약’이니까.”

언니가 식칼을 집어 든다. 굳은 결심을 한다. 그리고 매서운 눈빛으로 눈앞의 감자를 싹둑!

아하~. 오늘 저녁 메뉴는 포테이토…… 가 아니지! 요리가 아니라, 살인이라니까?

칼을 든 언니의 모습을 상상하자 자연스럽게 언니가 웃는 얼굴로 요리를 해주었던 게 생각나 버렸다. 언니가 해준 감자샐러드가 참 맛있었는데, 먹고 싶다.

아니, 아니. 지금 감자샐러드가 중요한 게 아니지.

다시, 다시!

언니가 칼을 들고, 세상에서 제일 냉정하고 싸늘한 표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목표물을 향해서 다가가…… 는 것도 너무 예쁘잖아!

역시 우리 언니다! 착하고 상냥한 모습도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만, 지금 내 상상처럼 차가운 냉미녀인 것도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예뻤다.

어쩌지? 둘다 너무 예뻐서, 하나를 고르기가 너무 힘든데?

휴……. 어쩔 수 없지. 이럴 때는 둘 다 가지는 수밖에.

앞으로 온미녀 아스텔라 언니와 냉미녀 아스텔라 언니 둘 다 내 꺼닷!

“으아아! 그게 아니지!”

또 생각이 이상한 곳으로 빠져버린 것을 깨닫곤, 황급히 머리를 뒤흔들었다. 그만큼 언니가 살인을 저지른다는 상상을 하기 어려웠다.

“테오도르도 마찬가지였겠지?”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절대로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으로 18년 전이면, 테오도르는 고작 6살 어린애였다. 그런데 그 어린 나이에 자신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광경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했다니.

“심지어 형도…….”

차마 입 밖으로 그 단어들을 꺼내고 싶지도 않았다. 광증으로 미쳐 날뛰는 형을 아버지가 죽이라고 명령했다니.

그리고 테오도르는 그것마저 봐버렸다.

형이 사람을 죽이는 광경을 본 6살 아이.

아버지가 형을 죽이라는 명령을 들은 어린아이.

그리고 그 형이 죽는 광경을 바라본 어린 테오도르.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정말 가여워…….”

아무리 사연 없는 피폐물 남자 주인공은 없다지만, 테오도르의 경우는 좀 심했다.

오죽하면 그가 소설 속에서 왜 미친놈처럼 굴었는지 이해가 되어버릴 정도였다.

아! 이게 혹시 개연성이라는 건가?

“개연성 두 번만 있다가는 애를 잡겠네, 잡겠어.”

“시끄럽게 뭘 자꾸 그렇게 중얼거리는 거야!”

“아, 미안.”

깜빡 잊고 있었다. 스기엔이 내 팔을 베고 자고 있었다는 걸. 거리가 가까웠던 만큼, 내 중얼거리는 소리가 수면에 방해가 된 모양이었다.

“아니, 잠깐만.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미안하다고 했지. 그래놓고선 또 떠들고 있지.”

“아니. 그거 말고.”

투덜거리는 스기엔과 달리 나는 지금 아주 다급했다.

“개연성……. 개연성! 내가 방금 개연성이라고 했잖아!”

누워있던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나는 소리쳤다.

“그게 뭔데!”

스기엔 역시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며 큰 소리로 물었다.

“그럴 만하다고! 테오도르가 피폐물의 남자 주인공이 될만하다고!”

그랬다.

내가 오늘 들은 테오도르의 과거사는 피폐물의 남주가 되기에 아주 충분했다. 그런 과거를 가지고 있다면, 사람이 삐뚤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그 과거를 이야기하는 테오도르의 싸늘한 얼굴 역시 피폐물 남주 그 자체였다.

부랴부랴 언니를 대피시키고, 나는 테오도르의 취향이 아니니 별일 없을 것이라고 안심하고 있었다. 실제로 테오도르는 나에게 집착의 ‘ㅈ’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여전히 피폐물의 남주였다.

잔혹한 과거사와 고독한 현재를 가진.

“이대로라면, 테오도르는 불행할 거야. 계속 그 불쌍한 어린애로 머물러 있을 거라고. 그건, 그건…… 너무 슬프잖아.”

낮에 보았던 테오도르의 싸늘한 표정이, 냉정한 눈빛이, 자조적인 입술이 자꾸만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그 얼굴을 손으로 감싸버렸을 만큼 테오도르의 모습은 가엾기 짝이 없었다.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을까?”

“뭘 어떻게 한다는 거야?”

잠이 다 깨버렸다는 듯, 스기엔은 몸을 일으켰다. 축 늘어져 있던 머리 꼭대기의 뿔도 위로 빳빳하게 솟아 있었다.

“테오도르 말이야.”

“이 집 주인이라는 그 남자 말이야?”

“응.”

“걔를 뭐 어쩐다고? 이런 큰 집 주인이면, 너보다 훨씬 잘 먹고 잘살고 있는 것 같은데.”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나는 언니가 늘 내게 해주었던 말을 그대로 스기엔에게 해주었다.

“돈이 모자라서 못사는 것 아니야?”

…… 아?

“내가 오랜 시간 인간을 봐온 바로는, 행복을 돈으로 살 수는 없겠지만, 확률적으로 돈이 많으면 행복할 가능성이 커.”

“나, 나는 돈이 없어도 언니랑 행복하게 잘 살았는데?”

“돈이 많으면 언니랑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걸?”

…… 아?

“언니랑 예쁜 옷 입고, 맛있는 음식 먹고, 일은 안 하고 만날 언니랑 재밌게 놀면서 큰 집에서 살았다고 생각해봐.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뭐지? 반박하고 싶은데, 맞는 말이라서 반박 못 하겠어! 어째서 슬라임이 나보다 인간에 대해서 더 잘 아는 거야?

“그럼 내가 테오도르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건 없는 걸까?”

지하 감옥에서 보았던 그 쓰다듬어 주고 싶었던 그 처량한 눈동자를 그냥 바라만 봐야 하는 걸까?

오늘처럼 과거의 상처에 아파하는 모습을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걸까?

“돈이 없어도 암컷이 수컷의 기분을 좋아지게 해줄 방법이 있긴 하지.”

내가 지금 뭘 잘 못 들은 것 같은데?

“아, 넌 아직 어린 암컷이라서 모르나?”

어머, 어머, 어머! 음란 마귀가 내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여기 눈앞에 실제로 있었네!

“지, 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스기엔!”

“무슨 말이라니? 네가 물어봐서 말하는 거잖아. 근데, 왜 갑자기 얼굴을 붉히고 말도 더듬는 거지? 어디 아파?”

“네가 그런 말을 하니까 그렇지!”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스기엔은 그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암컷이니, 수컷의 기분을 좋게 만들 방법이니 하는 것 말이야.”

“네가 그 테오도르인지 테오돌돌이인지 하는 놈을 위해서 뭐라도 해주고 싶다며.”

“그래. 뭐라고 해주고 싶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지!”

“마사지가 그렇게 얼굴을 붉힐 일이야?”

“당연하지! 마시지는…… 뭐? 안마?”

“그래. 인간들은 마사지를 받으면 기분 좋아하던데?”

“네가 의미한 게 마사지였어? 마사지에 왜 수컷, 암컷이 나와?”

역시 음란 마귀는 나였나…….

“그야, 수컷이 수컷에게 마사지를 받으면 기분 나쁘잖아? 나 같으면 수컷 놈이 내 몸에 손대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을 것 같다고.”

스기엔은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이 달빛을 받아 반들반들한 몸체를 부르르 떨었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물결이 일어 햇빛을 반사하는 것처럼 스기엔의 몸에서 달빛이 반짝이는 것을 나도 모르게 감탄하며 쳐다보고 말았다.

혐오하는 모습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슬라임 최고다!

“마사지를 받으면 기분이 좋아질 거고, 기분이 좋아지면 행복해지겠지. 그럼 그 남자는 더는 피폐하지 않겠지.”

스기엔의 말에 무언가가 번뜩 떠올랐다.

“그래! 스기엔! 네 말이 맞아!”

피폐물의 남주를 피폐하지 않게 만들면, 더는 피폐물이 아니잖아? 그럼 당연히 테오도르가 피폐물의 남주가 아니게 되는 거지.

피폐물의 반대말이 뭐지?

막 남주가 만날 웃고 다니고, 마음의 안정을 찾고, 행복하게 되는 그런 장르물이 뭐지?

“힐링물!”

바로 그거였다. 피폐물의 극단에 있는 장르!

“장르를 피폐물에서 힐링물로 바꾸는 거야!”

“힐링물? 그게 뭔데?”

장르 소설이 뭔지 모를 스기엔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힐링물이 뭐냐고 하면, 그야말로 힐링을 시켜주는 장르를 말하는 거야. 보고 있으면 더러운 세상의 기운이 정화되는 것 같고, 마음이 따뜻해지고,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 같은!”

“그러니까 마사지 같은 거로군?”

“그래! 맞아! 바로 그거야! 아예 장르를 바꿔버릴 생각을 해내다니 대단해, 스기엔!”

“내가?”

“응!! 엄청나게 똑똑해!”

“으, 으흠! 내가 좀 똑똑하긴 하지.”

“우리 스기엔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슬라임이야!”

“에헴!”

“멋있어! 귀여워! 엄청나!”

“이 몸이 바로 위대하신 고위 마족 스기엔 님이시다!”

“와아아아! 스기엔 님이시다!”

나의 환호에 스기엔은 머리의 뿔을 더욱 꼿꼿이 세우고, 동그란 몸체를 부풀리며 잘난 척을 했다.

귀여워라!

“좋아! 내일부터 프로젝트 시작이야!”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결연한 나의 의지를 반영하는 몸짓이었다.

“이제부터 이 소설의 장르는 힐링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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