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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31화 (31/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31

내가 테오도르의 차 시중을 들게 된 지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처음에 방에 들어왔을 때도 뭔가 피곤해 보이는 모습에 오늘 별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건가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설마 이렇게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게 될 줄 전혀 몰랐었다.

‘어젯밤에 악몽이라도 꿨나?’

나는 피폐물 남주들의 특징을 떠올렸다. 그들은 늘 악몽을 꿨고 당연히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여주와 거사를 치른 다음에는 매우 이상하게도 푹 잘 자게 된다.

다음 날 아침에 깨어나서 자신이 잘 잤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아직 자는 여주를 매우 사랑스럽게 쳐다보았다.

‘이상해. 왜 네 옆에서만은 이렇게 푹 잘 수 있는 거지? 이런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라는 소리를 하면서.

응. 그거 아니야.

그렇게 밤새도록 엎드려뻗쳐 자세로, 팔굽혀펴기를 수천 번 하고, 보통 여주들은 다 가볍긴 하지만 사람 하나를 들었다 놨다 뒤집었다 그 난리를 부리고, 물고 빨고 핥는데, 사람이라면 떡실신하는 게 당연하다고!

‘그나저나……. 거참, 뉘 집 아들인지 참 잘생겼네.’

소파의 등받이에 머리를 삐뚜름하게 걸친 채, 자는 테오도르의 모습을 본 내 소감은 그랬다.

가볍게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과 소담스럽게 가지런한 속눈썹. 이제는 말하면 입 아플 오뚝한 콧날과 날카로운 턱선, 살짝 벌어진 도톰한 입술. 그 아래에 보이는 흰 셔츠 사이의 실팍한 가슴…….

‘으아아아!! 사라져! 이 음란 마귀야!’

자꾸만 밑으로 내려가려는 시선을 황급히 돌렸다. 그리고 세차게 머리를 휘둘러 내 머릿속의 음란 마귀를 몰아내려고 애썼다.

그날의 키스 이후로 테오도르만 보면 자꾸 음란 마귀 놈이 불쑥불쑥 나타났다.

훠이! 저리 가! 지금 여기서 네가 나오는 것 아니야! 대체 어디까지 눈을 내리려고 한 거야!

“뭐, 뭐라도 덮어드려야겠다. 감기 드실라.”

차라리 뭘 덮어서 내 시야에서 차단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가능하면 괜히 요염해 보이는 저 얼굴도 덮어버리면 좋겠지만, 그러면 안 되겠지.

주변을 둘러보자, 마침 저쪽 편에 모포가 보였다. 얼른 가지고 와서 테오도르가 깰까 봐 살그머니 모포를 펼쳐 그에게 다가갔다.

막 모포가 테오도르의 어깨에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뭐 하는 거야?”

어느새 눈을 뜬 테오도르가 내 손을 덥석 붙잡고 있었다. 뜻밖에 상황에 나는 모포를 덮어주기 위해서 몸을 기울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

너무 가까웠다.

테오도르의 보라색 눈동자 안에 내가 비칠 만큼. 그리고 그걸 내가 바라볼 수 있을 만큼.

“그게…….”

내 입에서 나온 숨결이 테오도르의 입술에 닿을 것만 같은 거리였다. 어쩐지 입술이 바싹 말라와서 목소리가 얼른 나오지 않았다.

“추, 추워 보이셔서요.”

간신히 꺼낸 말은 내 귀에도 어쩐지 변명처럼 들렸다.

“한낮이잖아. 추울 리가.”

테오도르의 귀에도 그렇게 들렸을까?

그는 별 헛소리를 다 한다는 듯이 말하며 내 손을 놓아 주었다. 내 손에 뭐가 묻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한참 쳐다본 다음이었다.

테오도르가 날 놓아주자마자 얼른 뒤로 물러섰다. 그에게 덮어주지 못한 모포를 손에 꼭 쥔 채였다.

자꾸만 내가 뭔가 나쁜 짓을 한 것처럼 느껴지는 건, 아까 내가 테오도르를 훔쳐봐서겠지? 거기다가 의료행위였을 뿐인 키스를 떠올려서?

테오도르도 뭔가 찜찜해서 방금 내 손을 확인했던 걸까?

재판장님! 저는 억울합니다! 그건 제가 아니라 음란 마귀가 그랬습니다. 걔랑 나랑은 다른 애입니다! 전 착하고 순진한 애입니다!

“하지만 추워 보이셨는데요.”

여기서 물러서면 어쩐지 진짜 내가 테오도르에게 다른 뜻을 가지고 다가간 것처럼 보일까 봐 나는 다시 한번 주장해보았다.

그 다른 뜻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묵비권을 행사하겠습니다, 재판장님.

생각에 빠진 것은 죄가 아니잖아요!

“저희 언니가 그랬는데, 이런 날씨가 감기에 걸리기 쉽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환절기요. 일교차가 큰 거요. 낮엔 아직 덥지만, 저녁이 되면 은근히 쌀쌀하잖아요. 이런 날씨에 꼭 이불을 덮고 자야 한다고 했어요.”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

“언니가 있나?”

이게 되네…….

이렇게 횡설수설인데 말이 통했다는 것이 신기했다.

“네.”

테오도르가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이 신기했지만, 일단은 얼른 대답했다.

“언니와 친했나 보군.”

“언니가 정말 착해서 싸울 일이 없었어요. 거기다가 언니가 절 키운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그런 언니에게 대들면, 제가 나쁜 아이죠.”

이 와중에도 아스텔라 언니가 예쁘다는 말은 하지 않은 나! 칭찬해~.

혹시라도 테오도르가 그렇게 예쁜 언니라면 한번 보자고 하면 곤란했다. 그렇게 만나서 운명의 테스트니~ 두둥! 이렇게 되면 더 곤란했고.

“언니는 몇 살인데, 널 키웠다고 하는 거지?”

“올해로 스물둘이요.”

“그렇게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것도 아니군.”

“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거든요.”

“얼마나 일찍?”

“제가 아주 어릴 때요.”

내 가족관계에 대해서 테오도르와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곤란했다.

별 기억이 없는 죽은 엄마에 대해서는 차라리 괜찮았지만, 좋은 얘기라고는 나올 것이 없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더 나쁜 건 아스텔라 언니에 대한 것이었다.

언니 이야기를 꺼낸 건 나이긴 하지만, 테오도르가 언니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테오도르 님은 외동아들이시죠?”

나는 얼른 대화의 주제를 우리 가족에서 테오도르의 가족으로 넘겼다.

소설 속에서 카르오 가문을 이을 유일한 후계자라고 나왔었다.

그것이 아스텔라에 대한 망나니짓이 묵과될 수 있는 이유였다. 그러니 테오도르는 외동이 틀림없었다.

“형이 있었어.”

잉? 아니었네?

거기다가 동생도 아니고 형이라고? 귀족의 후계자 체제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보통은 장남이 가문을 이어받는 거라고 알고 있었다.

테오도르에게 형이 있다면 그 형이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 혹시 그 형이 차마 가주 자리를 물려줄 수 없는 엄청난 망나니인 건가? 현판 소설 속에서 보면 다들 가문에 망나니 하나쯤은 있던데.

그게 아니면 혹시 평민 아가씨에게 첫눈에 뿅~ 하고 반해서 둘이 사랑의 도피라도 한 걸까? 로맨스 소설 남주의 형이니 그런 로맨틱한 상황도 어울릴 것 같았다.

테오도르의 형은 어떻게 생겼을까? 분명 테오도르와 닮았다면 형도 잘 생겼을…….

“죽었어. 18년 전에.”

내 상상의 나래는 테오도르의 싸늘한 한마디에 뚝 끊기고 말았다.

“미쳐서.”

아니, 이건 너무 급전개잖아? 알고 보니 형이 있는데, 알고 보니 벌써 죽었고, 알고 보니 그것도 광증으로 미쳐서 죽은 거라고?

“저 같은 사람을 찾지 못했나 봐요?”

갑작스럽게 훅 들어온 엄청난 정보에 혼란스러운 가운데 내가 겨우 찾아낸 대답은 그것이었다.

“아니. 찾았어.”

테오도르의 이번 대답도 간결했다. 하지만 왠지 그다음에는 더 엄청난 전개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테오도르의 눈이 어쩐지 붉게 보였다. 분명 보라색인데, 평소 테오도르의 눈동자 색인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보였다.

뭔가, 아주, 광적인 듯한 색깔.

“그럼…… 왜…….”

물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나쁜 대답을 들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나는 묻고 있었다.

“죽였거든.”

“네?”

아까는 죽었다더니, 이제는 죽였다고?

“미쳐버린 형이 자기 광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 마녀를 죽여버렸어.”

여전히 테오도르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고, 눈동자는 여전히 보라색이었다.

“마녀가 죽자, 형은 더욱 폭주했고, 그런 형을 아버지가 사살했지.”

테오도르의 입에서 한마디 한마디가 내뱉어질 때마다, 점점 숨이 옥죄어왔다.

“정말……요?”

좁은 목구멍을 비집고 겨우 나온 말은 진위를 의심하는 말이었다.

나오는 인물들이 전부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소설이라고 해도 너무 심한 결말이었다.

그런데 테오도르에게는 그것이 현실이었다니.

“뭘 보셨다는…….”

“전부.”

설마 설마하며 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내 말을 채 듣기도 전에 테오도르는 대답해버렸다.

그리고 그 대답을 들은 순간, 나는 오싹해졌다.

아직 늦여름이었고, 햇볕이 쏟아지는 한낮이었음에도 나는 한겨울의 서리를 맞은 것처럼 떨고 있었다.

“형이 사람을 죽인 것도, 형이 죽은 것도, 내가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내가 느낀 추위의 근원지는 테오도르였다.

냉정한 눈동자, 싸늘한 입매. 그리고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그 얼굴을 감싸는 작은 손.

그것은 나도 모르게 뻗은 내 손이었다.

“가엾게도…….”

그리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테오도르의 눈이 커지고,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손을 치우지 않았다.

“어렸을 텐데, 그런 일을 겪다니.”

나는 비로소 그동안 내가 느꼈던 테오도르를 향한 이상한 측은함과 안쓰러움의 근원이 어딘지를 깨달았다.

왜 자꾸 그에게서 길 잃은 가여운 아이의 모습이 보였는지 역시도 이해했다.

테오도르의 안에 그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야.”

나는 그 작고 가여운 아이를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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