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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30화 (30/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30

테오도르는 잠시 인상을 찌푸린 채,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하는 말은, 드레스는 필요 없고 돈이 더 좋다?”

“네. 맞습니다!”

역시나 멀쩡한 테오도르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지하 감옥에서와는 달리 테오도르가 단박에 내가 한 말을 알아듣자, 반가움에 나는 얼른 대답했다.

“나중에 필요할 때를 위해서?”

“네.”

“그게 언제인데?”

“모든 일이 다 끝났을 때요.”

고용주이자 귀족인 테오도르에게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내게 굉장한 용기였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야 했다.

“테오도르 님이 괜찮아져서 제 일이 끝날 때요. 그때가 되면 전 저택을 나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해요.”

사랑하는 아스텔라 언니를 지키기 위해서, 내가 언니를 대신해서 테오도르에게 온 것처럼.

항상 얻어맞기만 하던 내가 아버지를 방안에 가둬버린 것처럼.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 용기 내 테오도르의 머리를 쓰다듬자, 그가 잠이 들어버린 것처럼.

내가 어른이 되어서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그것이었다. 무언가가 바뀌기를 원한다면, 내가 용기를 내야 한다는 것.

“그렇군.”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던 테오도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납득한 것 같은 행동이었지만, 동시에 완전히 납득하지는 못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만 돌아가지.”

그가 인스트에게 지시하는 것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무사히 내 돈을 지켰다. 역시 용기 있는 자가 원하는 것을 차지하는 법이었다!

* * *

테오도르는 눈앞의 하녀가 조금 전에 한 말을 머릿속에서 곱씹고 있었다.

‘모든 일이 다 끝났을 때.’

테오도르에게는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하던 때가 있었다. 자신에게 광증이 찾아올 날이었다.

하지만 그 운명은 결국 자신을 찾아오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보다 더욱 끔찍했다.

보통의 경우보다 늦게 시작되어서인지 테오도르의 광증은 빠르게 심각해졌고, 그만큼 더 깊게 절망했다.

더욱 끔찍한 것은 그것이 첫 발현이었고,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것이었다.

‘모든 일이 다 끝났을 때.’

하지만 지금 테오도르 눈앞의 여자는 벌써 끝을 이야기했다. 마치 당연히 그날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테오도르가 정상이 되고, 자신이 무사히 저택을 나가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끝이라…….’

테오도르는 자신의 결말은 틀림없이 비참하리라고 생각했었다.

자신이 목격한 결말이 그랬으니, 자신을 기다리는 결말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참하게 죽는 것과 자신이 죽은 뒤에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비참함 중 어느 것이 더욱 비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종국에는 두 가지 모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

그는 다시 레나티스를 쳐다보았다. 맞은 편에 앉은 그녀는 상점가에서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미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평온하게 감긴 눈도, 살짝 벌어진 입술도, 마차의 움직임대로 흔들리는 얼굴도, 모두가 무방비했다. 자신을 해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것처럼.

불과 며칠 전에 백작 영애에게 뺨을 맞은 것은 이미 잊은 모양이었다. 그 생각을 다시 하자 테오도르는 저도 모르게 작게 혀를 찼다.

그날 자신의 광증이 발현하지만 않았어도, 레나티스가 그 영애를 급하게 쫒아낼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저 지루하고 따분한 잡답이나 나누다가 그녀는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 빌어먹을 광증이 튀어나왔고, 레나티스는 그 일을 수습해야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백작영애에게 뺨이 퉁퉁 부어오르도록 맞은 것이었다.

미안했다. 입 밖으로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테오도르는 레나티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래서 옷은 샀냐는 핑계를 대며 같이 상점가로 나온 것이었다. 그녀에게 편의를 베풀어주기 위해서.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또 그녀가 테오도르에게 선의를 베푼 것이 되고야 말았다.

테오도르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는 레나티스는 여전히 잘 자고 있었다.

그녀의 흔들리는 고개가 뒤쪽을 향하자, 쓰고 있던 모자의 챙이 마차의 벽에 부딪히며 툭- 하고 모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모자에 꽁꽁 싸여있던 분홍의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폭신한 분홍색 구름 같은 머리카락 사이로 떠오른 레나티스의 동그란 흰 얼굴은 마치 아무 근심 걱정이 없는 어린아이 같았다.

보는 사람을 저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훗.”

그걸 보고 있던 테오도르의 얼굴에서도 한 조각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서 작은 희망이 함께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그녀와 함께라면 꽤 괜찮은 끝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도 네 마력인가?”

자신과 진한 키스를 나눈 남자 앞에서 무방비하게 잠든 레나티스를 보며 테오도르는 중얼거렸다.

붉은 눈동자가 제 색을 찾게 만들고, 핏빛으로 물든 시야를 온전한 색으로 보게 만들며, 미친 사람이 정신을 들게 만든 것은 당연히 마녀의 마력이었다.

조급하게 그녀의 입술에 매달리게 만드는 것도, 미칠듯한 갈증을 해소켜주는 것도, 역시나 누구나 마녀의 마력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과연 마녀의 힘일까?

보는 것만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고,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마녀가 있다는 것을 테오도르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달리는 마차의 창문으로부터 한 줄기의 바람이 불어와 레나티스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을 가리자 간지러운지, 아니면 거슬리는지, 레나티스의 뽀얀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것을 본 테오도르는 기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흔들리는 마차에서 균형을 잡으며 레나티스의 곁으로 다가간 테오도르는 손수 그녀의 머리카락의 넘기고 귀에 꽂아주었다.

그리고 레나티스의 미간이 다시 매끈하게 돌아온 것을 확인했다.

그게 다였다.

테오도르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다시 레나티스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오랫동안.

* * *

“안녕, 내 동생?”

테오도르는 여기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 선 것을 보았다.

“그동안 많이 컸구나?”

자상하게 웃는 입매가 예전과 똑같았다.

훤칠하게 큰 키도, 어린 테오도르가 자신도 크게 되면 저런 얼굴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잘생긴 얼굴도 그때와 다름없었다.

“…….”

그래서 테오도르는 이것이 꿈이라고 확신했다.

죽은 사람은 늙지 않았다. 그리고,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왜 그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테오도르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만보고 서 있자, 에멘스는 빙긋이 웃으며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그제야 테오도르는 에멘스의 손에 피가 묻어있는 것을 깨달았다.

“아, 이거?”

테오도르의 시선을 눈치챈 에멘스가 손을 들어 올리자, 선혈이 그의 손에서 팔뚝으로 흘러내렸고, 이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뭘 이런 거에 놀라고 그래? 네 손에도 있는데.”

“……!!”

에멘스의 말에 테오도르가 황급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자, 그의 말처럼 테오도르의 손에도 어느새 붉은 피가 묻어있었다.

마치 조금 전에 묻은 듯이 선명한 새빨간 피가.

당황한 테오도르가 고개를 들자, 이번에는 에멘스의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기묘한 광증의 그 눈동자에 깃들어 었었다.

“테오도르, 내 동생.”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푹! 하고 에멘스를 꿰뚫었다. 그의 가슴에서 삐죽히 솟아나온 화살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화살의 아래로 붉은 피가 천천히 베어나오더니, 이내 그가 입은 흰 셔츠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위대한 카르오의 후계자.”

푹! 또 다른 화살이 에멘스의 손으로 날아와 박혔지만, 에멘스는 그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한번 휘저었을 뿐이었다.

여전히 그의 얼굴에는 자상한 미소가 감돌았고, 눈에는 기이한 광증이 엿보였다.

“저주받은 피를 물려받은 아이.”

푹! 푹!

연달아 날아온 화살이 하나는 에멘스의 등에 박혔고, 또 하나는 그의 허벅지에 박혔다.

그럴 때마다 에멘스의 몸이 조금 덜컹였을 뿐이었다.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아했다.

아니, 오히려 그의 미소는 더욱 진해졌고, 광기는 더해갔다.

“테오도르.”

테오도르의 이름을 부르며, 에멘스가 그에게 한발 다가섰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어느새 작은 웅덩이를 이뤘고, 찰박거리며 에멘스는 그것을 밟았다.

“넌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어.”

마침내, 테오도르가 가장 두려워하던 말을 에멘스는 내뱉었다.

“넌 나처럼 죽을 거야.”

속삭이는 목소리는 날카롭게 테오도르의 귀에 박혔다.

“헛된 희망따위는…….”

푹!

날카로운 화살이 날아와 에멘스의 목을 꿰뚫었다. 튀어나온 화살이 테오도르에게까지 닿을 만큼, 에멘스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온 순간이었다.

“크어엌…….”

기묘한 소리가 에멘스의 입에서 흘려나왔다. 그제야 에멘스는 고통을 느끼는 듯,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테…… 커…… 크…….”

부글거리는 피거품과 고통이 묻어나는 음성이 겨우겨우 에멘스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대로 쓰러졌다. 테오도르를 향해서.

“안돼!!!”

버럭 소리를 지르며, 테오도르는 잠에서 깨어났다.

“허억…… 허억…… 허억…….”

마치 그동안 목이 졸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테오도르를 숨을 몰아쉬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방안에 그저 테오도르의 가쁜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겨우 피어난 희망을 짓밟으러 지옥에서 온 악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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