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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29화 (29/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29

“옷은 샀나?”

“네?”

불쑥 내 방에 찾아온 테오도르는 갑자기 옷이야기를 했다.

“전에 내가 망친 옷을 대신하라고 돈을 줬었잖아.”

“아……. 그거요.”

그제야 테오도르가 무슨 옷을 이야기하는지는 알아차렸지만, 나는 명쾌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돈은 아주 얌전하게 내 속옷들 사이에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잠들어 있을 예정이었다. 내가 퇴직하는 그 날까지.

“아직 사지 않은 모양이군.”

“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오르디에게 듣기론 이제까지 일을 쉰 적도 없고, 저택 밖으로 나간 적도 없다고 하더군. 그러지 말라고 했다며?”

“네. 맞아요.”

“준비해.”

“네?”

“내 곁에서 멀어지면 안 돼서 오르디가 그렇게 말했다고 하던데, 그럼 나와 같이 가면 되는 일이잖아. 마침 나도 상점가에 갈 일이 있으니 같이 가도록 하지.”

아니,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람? 공돈이 생겼다고 좋아했는데, 강제로 공돈을 쓰게 생겼잖아.

“아, 아니, 저는 괜찮은데요.”

“내가 괜찮지 않아서.”

테오도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매우 단호하게 말했다. 아마도 그는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인듯했다.

“빨리 준비해.”

그리고 내가 아는 남자 주인공의 성격은 한번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다.

더불어, 매우 집착남이기도 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니 별수 있나? 나는 조용히 그를 따라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 * *

나는 지금 테오도르가 나더러 옷을 사라고 하면서 왜 200만 루나라는 거금을 주었는지를 깨닫고 있었다.

‘비싸!!!’

옷에 달린 가격표를 보며 마음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원피스 한 벌에 무려 156만 루나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이 적혀 있었다.

엄청난 액수에 손이 덜덜 떨려왔지만, 겉으로는 아주 태연하게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것처럼 무심하게 옷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자기가 준 돈을 여기서 다 탕진하라는 건가? 나는 아껴두고 싶은데!’

이건 거의 줬다가 뺏는 격이 아닌가 싶어서 원망스러운 눈으로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지?”

하지만 이런 내 심정을 알 리 없는 테오도르는 그저 태연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실 필요는 없으셨는데…….”

“굳이 이렇게 하고 싶으니, 골라 봐.”

진짜 그러실 필요 없어서 말씀드린 건데요! 제가 귀족이라면 몰라도 저렇게 비싼 드레스를 입고 어딜 가겠어요? 저 예쁜 드레스를 입고, 나는 감자를 캐고, 풀을 뽑고, 냇가에서 물이나 떠야 한다고요.

갑자기 애인 없는 미혼 여성을 웨딩숍에 데려가서 원하는 것을 골라 보라고 하면, 웨딩드레스는 눈 돌아가게 예쁘겠지만 그걸 사서 대체 어딜 입고 가느냐고요!

……라고 테오도르에게 말하고 싶다.

“네. 골라 볼게요.”

하지만 현실은 감히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대공가의 후계자님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대신 눈물을 머금고 다시 옷을 뒤적거리는 수밖에.

이제 내 선택은 둘 중의 하나였다.

계속 못 고르는 척을 하며 시간을 끌다가 테오도르가 기다리는 것이 지겨워져 돌아가자고 말하게 만들거나, 여기서 제일 저렴한 옷을 고르거나.

전자가 나로서는 더 좋았겠지만, 옷가게의 한쪽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느긋하게 가지고 온 책을 읽기 시작한 테오도르를 보면 그렇게 빨리 지겹다고 말할 것 같지 않았다.

아무래도 후자를 위한 옷도 하나 골라놓아야 할 것 같았다. 최대한 100만 루나 이하의 것으로.

“어디 보자…….”

언뜻 수수해 보이는 옷을 하나 꺼냈다. 분명 별 장식도 없고, 치마도 풍성하지 않아서 천도 적게 들 것 같으니까 저렴하겠지? 는, 완벽한 오산이었다.

‘425만 루나?’

가격표를 확인한 순간, 나는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미쳤나 봐! 무슨 천 쪼가리 하나에 이 돈을 받아!’

후다닥 가격표를 손에서 놓고, 옷을 다시 제자리에 놓으려던 순간이었다.

“이봐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옆에서 들려왔다.

설마 나더러 하는 소리인가 싶어서 고개를 돌리자, 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보아하니, 우리 가게에서 뭘 살 형편은 안되어 보이는데.”

목소리만큼이나 날카로운 그녀의 시선이 순식간에 나를 아래위로 훑었다. 그녀가 뭘 보는 지는 내가 더 잘 알았다.

낡은 구두와 낡은 옷을 입은, 낡은 모자를 쓴 여자애가 보일 것이다. 몇백만 루나의 드레스를 살 돈 따위는 없어 보이는.

“아까부터 옷을 만지작거리는 게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

그나마 처음에는 ‘이봐요.’라고 불렀었는데, 이제는 아예 반말이었다. 거기다가 내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여기 왔다는 것을 이미 확정해놓고 말하고 있었다.

“그냥 구경하는 건데요.”

“하!”

그녀의 짧은 코웃음에는 여러 가지 말이 함축되어 있었다. 네가? 감히? 네까짓 게? 등등.

“이게 네까짓 게 살 수 있는 옷이 아니야. 어딜 더러운 손으로 함부로 만져?”

내가 들고 있던 옷을 홱 낚아채며, 그녀는 독한 말을 쏟아내었다. 나한테 날카롭게 말했던 것과는 달리 옷을 다루는 그녀 손은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옷을 다시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걸어 놓고, 나를 쳐다보더니 다시 한번 인상을 썼다.

“당장 꺼져.”

마치, 자신의 가게에 있어서는 안 되는 더러운 것을 내쫓는 것 같았다.

“…….”

나는 그녀가 주는 모욕을 고스란히 받으며 서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앗싸! 그냥 가도 되겠다!’

테오도르에게 옷을 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옷을 사지 못하는 매우 그럴듯한 이유를 댈 수 있었다. 주인이 안 팔겠다는데 손님인 내가 뭘 어떻게 하겠어?

뭐, 주인이 아니라 종업원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가라잖아? 그럼 나가야지!

“지금 저더러 꺼지라고 하신 거죠?”

나는 좀 더 확실하게 하려고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분명히 내가 들고 있던 옷을 뺏으면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한 말이긴 했지만, 나중에 그게 아니었다고 하면 곤란하니까.

“여기 너 말고 다른 사람이 또 있어? 너 같은 것이 여기 있으면, 가게 질이 떨어져 보이잖아. 영업에 방해가 되니까 당장 꺼져.”

역시! 그녀가 꺼지라고 말한 사람은 나였다!

당장 이 기쁜 소식을 테오도르에게 알려야 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나의 간절한 마음이 테오도르에게 닿은 것일까? 분명 저쪽에서 책을 읽고 있던 그가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 있었다.

“어머나! 죄송합니다, 손님. 쇼핑에 방해가 되었군요. 당장 이 더러운 것은 내쫓을 테니, 천천히 둘러보세요.”

테오도르에게 상냥한 미소와 친절한 말을 건네는 것과 동시에 그녀는 내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당겼다. 당장 꺼지라는 듯이 말이다.

당장 꺼지고 싶었던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버티려면 충분히 버틸 수 있지만, 나는 힘이 없는 척을 하며 그녀가 당기는 대로 속절없이 두어 걸음을 끌려갔다.

“내 일행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 물었는데?”

그런 나를 멈추게 만든 것은, 테오도르의 강경한 말과 부드럽게 내 팔을 잡은 손이었다.

“네?”

나를 잡은 가게 주인, 혹은 직원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리고 당황스러운 되물음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분명 자기가 뭔가 잘 못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런 가게에서 내쫓길 만큼 없어 보이는 나와 달리는 마차 안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해서 본다고 해도 귀족이라는 티가 좔좔 흐르는 테오도르가 일행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테니까.

“내 일행에게 무슨 짓이냐고 물었다.”

저기, 테오도르 님? 질문이 미묘하게 달라진 것 같은데, 혹시 알고 계신가요?

‘무슨 짓’이라는 테오도르의 단어 선택은, 직원이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단정하는 말투였다.

거기다가 목소리도 좀 더 매서웠다. 처음에는 분명 약간 무뚝뚝한 정도의 말투였는데, 지금은 목소리에서 은근한 분노가 분명하게 느껴졌다.

“이, 이게, 아, 아니, 아니, 이분이 손님의 일행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와! 이건 기분이 조금 나빴다. 사람한테 ‘이게’라니! 무슨 물건도 아니고!

“그래.”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테오도르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사과할 사람은 내가 아닐 텐데?”

“네?”

테오도르의 말에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고, 차갑게 자신을 쳐다보는 테오도르의 시선에 더욱 당황했다.

“아, 저기…….”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테오도르가 뭘 원하는지 알았지만, 초라한 행색의 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죄송합니다. 레이디께 무례하게 군 것을 부디 용서해주세요.”

하지만 그녀가 택할 수 있는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테오도르의 차가운 시선에 어쩔 수 없이 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아, 네.”

그리고 나는 아주 어색하게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뭐, 딱히 내가 안 받아들이면 어쩌겠어? 지금은 테오도르의 빽으로 이러고 있지만, 실상은 그저 하녀였다.

소설 속 주인공이나 악녀처럼 가게에서 마구 깽판을 부릴 수는 없었다.

“천천히 구경하시는 걸 도와드릴까요? 아니면, 사과의 뜻으로 VIP 고객님들을 위한 방으로 모시는 건 어떠실까요?”

“아뇨, 괜찮아요!”

드디어 그냥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더 깊은 곳으로 모시겠다는 제안을 받자 나는 황급히 사양했다.

아마도 테오도르에게 풍기는 돈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당연하지. 이런 취급을 받고도 여기 물건을 사고 싶을 리가 없지.”

테오도르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내 말은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네. 맞아요.”

대충 그런 걸로 하지 뭐. 일단 가게에서 나갈 수 있다면야.

“다른 가게로 가도록 하지.”

테오도르는 그 말을 끝으로 뚜벅뚜벅 걸어서 밖으로 나갔다. 나 역시 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얼른 뒤를 따랐다.

가게를 나오기 전, 힐끗 뒤를 돌아보자 내게 무례하게 굴었던 여자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주 조금 쌤통이었다고 하면, 내가 나쁜 사람일까?

“여성복을 파는 다른 가게는 어딨지?”

테오도르는 가게 앞을 지키고 있던 인스트에게 벌써 다른 가게를 묻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는지 인스트가 그저 자기 턱을 긁고 있을 때, 내가 얼른 끼어들었다.

“저기, 굳이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테오도르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는 할 말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다음번에는 가게에서 쫓겨나는 행운이 없을지도 몰랐다.

“저는, 돈이 더 좋습니다.”

내 말을 들은 테오도르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테오도르 님께서 마음을 써주시는 것은 매우 감사하고, 또 망가진 제 옷 대신에 새 옷으로 배상해주시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입을 일이 없는 드레스보다, 나중에 제가 필요할 때 유용하게 쓸 수 있는 현금이 훨씬 좋습니다.”

드디어 말했다!

내 말을 모두 들은 테오도르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의 인상은 어느새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조짐이 좋지 않다는 건, 바로 이런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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