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27
“어머! 푸딩이잖아?”
나는 클레어가 내 방까지 가져다준 식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정확하게는 쟁반 위에 놓인 뽀얗고 탱글탱글한 자태의 푸딩을 보고 놀랐다.
“응! 맛있겠지?”
“웬 푸딩이야?”
지난번에 듣기론 분명 재료비가 비싼 디저트류는 많이 만들지 않아서 남는 것도 거의 없다고 들었는데? 혹시 좀 남더라도 나같은 하녀에게까지 돌아올 일도 없을거라고 했었다.
“손님이라도 오셨어?”
혹시나 그 고약한 백작 영애가 온 건가 싶어서 클레어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피라냐? 포포린? 포푸카? ……벌써 까먹었네.
됐다, 뭐. 그 여자 이름 따윈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다. 애초에 조연 이름을 다 기억하는 사람이 어딨어? 대충 그런가 보다 하는 거지.
집에 놀러 오는 백작 영애나 여주 동생이나, 어차피 조연인 건 마찬가지였다.
아니다. 생각해보면 내가 나았다. 나는 언급이라도 있었지, 그 여자는 아예 등장도 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테오도르 님께서 먹고 싶다고 많이 만들라고 하셨대. 그런데 하나만 드셨다고 하더라고. 덕분에 우리만 횡재한 거지! 고용인들 전부 하나씩 먹고도 남아!”
클레어도 맛있는 푸딩을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은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맛있게 먹어, 레나티스! 나도 이제 가서 푸딩을 먹어야겠어. 천천히 아껴먹으려고 남겨뒀거든!”
“그래. 가져다줘서 고마워.”
“응! 맛있게 먹고, 아픈 것 빨리 나아! 다음부터는 앞을 잘 보고 다니고!”
얼른 가고 싶어서 발을 동동거리던 클레어는 곧장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누가 봐도 맞은 상처로 보일 텐데, 넘어져서 다쳤다는 내 거짓말을 클레어는 믿었다.
“그게 뭐야?”
저녁 식사가 담긴 쟁반을 받아들고 몸을 돌리자마자 불쑥, 스기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이야!”
“으엑! 너 얼굴이 그게 뭐야? 내가 더 깜짝 놀랐네!”
눈이 마주친 스기엔은 얼굴을, 아니 온몸을? 어쨌든, 찌푸렸다.
“대왕 모기에라도 물린 거야?”
퉁퉁 부은 내 뺨을 보고 스기엔은 모기를 떠올렸나 보다.
“아무리 대왕 모기라도 이렇게 붓지는 않을걸?”
“그럼 얼굴이 왜 그런데?”
“그냥 일이 좀 있었어.”
“무슨 일?”
“말하자면 복잡해.”
“간단하게 말해봐.”
의외로 스기엔은 끈질겼다. 슬라임은 별생각 없이 통통거리는 존재인 줄 알았는데, 편견을 가졌던 내가 반성이 되었다.
“어제 일이 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백작 영애를 방에서 내보내야 했는데, 그걸로 나한테 앙심을 품었나 봐. 오늘 찾아와서 날 이렇게 만들었어.”
클레어에게처럼 그냥 넘어졌다고 말을 하려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으며, 스기엔에게 사실대로 간결하게 설명했다.
“뭐야? 그럼 맞아서 그렇게 됐다는 거야?”
스기엔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곤 침대에서 펄쩍 뛰어서 곧장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결론적으로는 그렇지.”
저녁 메뉴는 크림 스튜였다. 입 안이 찢어지고, 뺨과 입술이 부어 입 벌리기가 어려운 나에게는 다행인 메뉴였다. 그리고 빵과 샐러드가 함께였다.
하지만 오늘 메뉴에서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와! 이게 푸딩이라는 거구나.”
뽀얗고, 탱글탱글한, 푸딩의 자태에 감탄했다. 거기다가 뭔가 달콤한 냄새까지 폴폴 나자 저절로 침이 꼴깍 삼켜졌다.
“잘됐다, 스기엔. 이 푸딩, 같이 먹자. 달콤한 것 좋아하지?”
“너는 지금 그 꼴을 하고, 맛있는 것 먹는다고 신이나? 지금 네 얼굴이 얼마나 못생겼는지 알아? 지금 그 꼴로 숲에 들어갔다가 누굴 만난다면, 몬스터인지 알고 토벌당하게 생겼다고!”
참으로 미묘하다. 지금 스기엔은 내 걱정을 하는 걸까, 내 욕을 하는 걸까?
“그 백작 영애인지, 뭐시깽이인지는 지금 어딨어?”
걱정하는 건지 욕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스기엔은 지금 아주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분홍색 몸통이 아주 빨갛게 물들 정도로.
그리고 그 모습에 나는 매우 감동하였다. 내가 다쳐서 왔다고, 이렇게 화를 내다니!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바친 보람이 있었다.
“진정해, 스기엔.”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내 부하 녀석의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놨는데?”
잠깐, 뭐가 좀 이상한데?
“내가 네 부하라고?”
“당연하지!”
그게 왜 당연한 거지? 슬라임과 인간의 관계라면 당연히…… 음……. 이게 당연한 문제는 아니구나. 이런 조합을 또 꾸린 사람이 없을 테니까.
“내 부하가 맞고 왔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그 백작 영애가 누구야? 걔 이름이 뭐야?”
“이름은 모르겠어.”
“이름도 모르는 애한테 맞았다는 거야?”
“모른다기보다는 잊어버렸어.”
“어떻게 널 때린 사람의 이름을 잊을 수가 있어?”
“이름이 어려웠거든.”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이며 대답했다. 귀족들의 이름은 혀를 아프게 만드는 이름들이었다.
테오도르도 솔직히 혀를 씹어 먹기에 딱 좋은 이름이었고.
“날 때리는 사람은 날 싫어하는 사람이야. 굳이 그런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며, 끙끙거리고 살고 싶지 않단 말이야. 난 나를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이름만 기억하며 살고 싶어.”
백작 영애로부터 나를 구해준 ‘인스트’, 상처를 치료해준 ‘오르디’, 식사를 챙겨주고 빨리 나으라고 말해준 ‘클레어’, 아무것도 묻지 않고 할 일을 대신해주신 ‘리타 아주머니’.
그리고,
“나를 위해 화를 내주는 ‘스기엔’ 같은 이름.”
핑크 슬라임이 아니라 레드 슬라임이 되어버린 스기엔을 보며 말했다.
“너, 너, 너 따위가 이름을 기억해준다고 내, 내, 내가 뭐, 기뻐할 줄 알아?”
아까보다 더 빨개진 것을 보면 아주 충분히 기뻐하는 것 같은데?
“같이 푸딩 먹을까, 스기엔? 아주 맛있을 거 같아.”
푸딩은 후식이긴 하지만, 딱히 보는 사람도 없는데 식사 예절은 중요하지 않겠지.
나는 푸딩을 조금 떠서 입 안에 넣었다.
“와! 엄청 맛있어!”
푸딩은 딱 내 생각대로의 맛이었다. 달콤했고, 부드러웠고,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렸다.
“그렇게 맛있어?”
“응! 스기엔도 먹어봐!”
한 숟가락을 떠서 스기엔에게 내밀자, 그는 주저 없이 덥석 받아먹었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히힛! 엄청 맛있지?”
동그란 스기엔이 동그랗게 눈을 뜬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깔깔거리고 웃고 말았다.
“뭐, 인간이 만든 것 치고는 맛있네.”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기엔은 푸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엄청 맛있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이름을 하나 빼먹었다. 가장 중요한 이름을.
‘테오도르.’
혀끝에서 부드럽고 달콤한 것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 * *
“아팠다고?”
무심하게 방 한가운데에 테오도르의 한 마디가 툭 던져졌다. 나를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게 나에게 한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야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이 테오도르와 나밖에 없었으니까.
“네.”
“어디가?”
아팠던 사람이 앞에 있으니 예의상 물어는 본다는 듯 여전히 테오도르의 시선은 책을 향한 채였다.
관심이 있는 걸까? 없는 걸까?
“어……. 그냥 좀 아팠어요.”
내가 맞은 것이 큰 사건이었다면, 이미 오르디나 인스트가 테오도르에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별로 아는 것이 없는 걸로 봐선, 이건 그냥 넘어가도 되는 하나의 소소한 사건인 모양이었다.
그러니 굳이 내가 나서서 테오도르에게 일러바쳐,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한쪽 뺨이 좀 부은 것 같은데. 볼거리라도 앓은 건가?”
오르디가 붓기에 좋다는 연고도 발라주었고, 스기엔이 차갑고 촉촉한 몸을 밤새 뺨에 대고 있어 준 덕분에 내 뺨에 붓기는 이제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테오도르는 귀신같이 미묘하게 덜 가라앉은 붓기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저 예쁜 눈이 시력까지 좋다니. 세상은 불공평하다.
“볼거리는 아니었을걸요.”
“왜?”
“어릴 때 이미 앓았거든요.”
열이 펄펄 끓어올랐던 어릴 적 그날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밤새도록 차가운 물수건을 갈아준 아스텔라 언니의 손길을, 내 입에 흘려주었던 사과즙의 달콤함을, 몇 번이나 괜찮을 거라고, 다 나을 거라고 내 귓가에 속삭여주던 언니의 목소리도.
“아, 걱정하지 마세요. 옮는 병은 아니었을 거예요.”
테오도르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차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하지만 리타 아주머니가 시키는 대로 정확하게 차를 우렸고, 향도 좋았다.
맛은 모르겠지만, 테오도르도 아직 마시지 않았으니 맛이 이상해서 그런 것도 아닐 거다. 그러면 뭐가 문제지?
“테오도르 님은 괜찮으세요?”
“뭐, 덕분에.”
그는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책도 아니고, 찻잔도 아닌 방 안 구석의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마치 뭔가 어색하다는 듯이.
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차를 주고 나서 뒤로 한 발짝 물러난 뒤, 나는 괜히 민망해져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괜히는 아니었다. 뭐가 민망한지 스스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덕분에라는 말 때문이었다. 확실히 그의 몸이 괜찮은 것은 내덕분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체액을 나눠준 덕분이라는 이야기였다.
입술에서 입술로 말이다.
‘그건 그냥 치료행위였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래. 분명 그랬다. 그리고 아주 간신히 자신을 납득시키기까지 했다.
하지만 상대방이 저렇게 의식하면, 나도 다시 의식하게 된다고! 게다가 방 분위기도 뭔가 어색해졌잖아!
‘뭔가 다른 이야기를 꺼내야 해!’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꺼낼 수 있는 자연스러운 화제를 마침내 생각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