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25
“조언이요?”
백작 영애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리는 순간, 바람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살랑이는 금빛 머리카락, 드레스를 살짝 잡은 우아한 손끝, 그리고 치켜든 아름다운 얼굴까지. 그녀는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실체를 알아버린 내 눈에는 그녀의 객관적 아름다움은 이미 흐릿해져 버린 뒤였다.
적어도 내 눈에 그 백작 영애는 그저 심술쟁이 못된 마귀할멈으로 보였다.
“테오도르 님께서는 자기 사람을 아끼시는 분입니다. 만약, 레이디께서 그분의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그 사실을 아셔야 할 겁니다.”
“재미있는 말씀이시네요. 한낱 하녀 따위가 테오도르 님의 사람이라는 건가요?”
힐끗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여전히 하찮음이 가득 담겨있었다.
“한낱 하녀가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인스트는 아직도 바닥에 쓰러진 채인 나를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순간 인스트의 지금 이 손을 잡으면, 왠지 저 백작 영애가 자존심 상해할 것 같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조금 전에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아도 손봐준 하녀를 귀족 출신의 기사가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은 아닐 터였다.
심지어 내가 그냥 보통 하녀가 아니라는 뉘앙스까지 팍팍 풍기는 지금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좋아!’
나는 인스트의 내민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가 당기는 대로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약간의 당황스러움과 또 약간의 의아함을 담은 눈으로 백작 영애가 나와 인스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제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는 훗날 레이디께서 테오도르 님의 사람이 되면, 알게 될 것입니다.”
인스트의 말에 갑자기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의 말대로 나는 그냥 한낱 하녀가 아니었다. 테오도르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었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나는 테오도르의 사람이었다. 인스트도 그랬다. 그리고 내 눈앞에 있는 백작 영애는 아니었다.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그리고 당당한 시선으로 눈앞에 있는 백작 영애를 바라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녀는 뭔가 기분 나쁜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요. 제가 훗날, 테오도르 님께 직접 물어보도록 하지요.”
조금 전의 인상 따위는 까맣게 지우고, 백작 영애는 우아한 미소를 띠었다.
귀족이라고는 하나 호위 기사 따위의 도발에는 걸려들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또한, 인스트의 말에도 여전히 한낱 하녀인 나 따위는 무시할 것이라는 신념 또한 담긴 미소였다.
“엘자.”
“네, 아가씨.”
고아한 뒷모습을 남긴 채, 백작 영애는 떠났다.
“괜찮아?”
“네? 아! 네. 괜찮아요.”
멍하니 백작 영애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괜찮냐는 말이 내게 향한 말이었음을 깨닫고 황급히 대답했다.
“별로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인스트가 내 뺨에 자기 손을 슬쩍 가져다 대었다. 커다랗고 서늘한 손이 닿자, 뺨이 더 화끈거렸다.
“뜨끈뜨끈해. 벌써 부어오르기 시작했고.”
“괜찮아요. 이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터진 입술로는 그렇게 말해봤자 별로 설득력이 없다는 것 알아?”
물론 그럴 것이다. 연달아 맞은 따귀에 입술이 터졌을 뿐만 아니라, 넘어지면서 땅을 짚은 손바닥도 까졌다. 거기다가 흙투성이가 된 옷에 엉클어진 머리까지.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꼴이 엉망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안에 들어가서 치료를 받는 게 좋겠어.”
따라오라는 듯, 인스트는 내게 고갯짓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원래 상처는 내버려 두면 낫는다는 주의였지만, 날 구해준 인스트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별말씀을.”
고개만 뒤로 살짝 돌려, 별것 아니라는 듯이 인스트가 피식 웃었다. 마치 나를 구해주는 것이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는 듯이.
그런 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고 걸어갔다.
‘뭐지? 몇 대 맞았더니 시력에 이상이라도 생겼나?’
분명 내 취향에는 미치지 못했던 인스트의 어깨와 등이 원래보다 훨씬 넓고, 든든해 보였다.
심지어 앞서 걸어가는 그 모습이 늠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다정한 서브남에게 빠지는 독자의 심정을 순식간에 이해하게 되었다.
* * *
약이 듬뿍 발린 솜을 핀셋으로 집은 오르디의 모습은 제법 그럴듯한 의사처럼 보였다.
“아 해봐.”
“아~.”
“더 크게.”
잠깐, 나 오늘 아침에 양치하고 나서 뭐 먹은 거 없나?
더 크게 벌리려던 입이 덜컥 멈췄다. 가끔 아침 식사 중에 나온 과일 같은 것을 숨겨와서 스기엔과 나눠 먹곤 했다.
하지만 다행히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너무 일찍 그 백작 영애가 쳐들어 와준 덕분이었다.
생각해보니, 참 부지런하기도 하지. 귀족 영애라는 분이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밥 챙겨 먹고, 치장하고, 이른 오전에 여길 오다니 말이야.
아마도 어제 일이 분해서 밤새 씩씩거리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을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소리를 지르고, 베개를 집어 던졌으려나?
“더 크게 벌리라니까?”
내가 잠시 생각하는 사이에 오르디가 재촉했다. 중간에 먹은 것이 없으니, 입을 더 크게 벌릴 수 있었다.
“아…….”
잠깐, 아침에 나 뭘 먹었더라? 혹시 구릿한 냄새가 나는 염소젖 치즈는 안 먹었지? 마늘 바게트를 먹은 게 오늘 아침이었나, 어제 아침이었나?
벌리려던 입이 또 멈추고야 말았다.
“입술이 터져서 입을 벌리면 아픈가 보군.”
“아이, 으으 아이이오…….”
오르디의 중얼거림에 ‘아니, 그게 아니고요.’라고 난 말했지만, 내가 들어도 그렇게 들리지 않았다.
아까부터 차가운 얼음주머니를 뺨에 대고 있었던데다가, 약이 발린 솜을 집은 핀셋이 이미 내 입 안으로 반쯤 들어와 있었던 터라 어쩔 수 없었다.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하지.”
내가 아파서 입을 못 벌리는 것으로 판단해버린 오르디는 한층 더 딱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약이 스며든 솜으로 상처가 난 입 안을 톡톡 쳤다. 그 움직임에 어쩔 수 없이 반대편에 있는 혀에도 솜이 닿았다.
“으…….”
약이 다 그렇겠지만, 혀에 닿은 맛은 아주 썼다.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만큼.
“이런……. 많이 아파?”
날 보고 있던 오르디의 인상이 따라서 찌푸려졌다. 거기다 눈빛은 아까보다 더 안쓰러움을 담고 있었다.
마치 눈 오는 날 맨발로 성냥을 팔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아무래도 오해가 쌓이고 있는 것 같았다.
“테오도르 님께서는 조금 전에 깨어나셨다.”
“아…….”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아직 오르디가 내 입안에 약을 바르고 있었다.
“어제는 잘해주었어. 네가 너무 잘한 덕분에 오늘 이런 꼴을 당한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야.”
드디어 핀셋을 빼내며 오르디가 말했다.
흙투성이 옷에 빨갛게 부어오른 뺨, 터진 입술과 입 안의 상처. 잔뜩 엉클어진 머리까지.
지금 내 꼴은 ‘이런 꼴’이라는 말이 꼭 어울릴 정도로 엉망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정말 어제는 다친 곳이 없는 거야?”
“네. 없어요.”
“그럼 테오도르 님을 어떻게…….”
오르디는 말꼬리를 흐리며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그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오르디는 그 뒷말을 잇지 않았다.
슬쩍 얼굴이 조금 붉어진 것 같기도 한데, 지금 내 시력을 믿을 수가 없어서 장담할 수는 없었다.
“오늘은 이만 쉬어. 오후 차 시중은 리타 아주머니께 내가 말해놓도록 하지. 테오도르 님께서 차를 드실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오르디는 다른 말을 늘어놓았다.
“차도 드시지 못할만큼 상태가 안좋으신가요?”
“아니. 네가 빨리 조치한 덕분에 테오도르 님은 괜찮으셔. 다만 컨디션이 좋지 않은지 좀 멍하신 것 같아.”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는 와중에 뺨을 콕콕 찌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뭔가 싶어서 고개를 들자, 흐뭇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는 오르디가 있었다.
“왜 그러세요?”
“네가 테오도르 님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 같아서 기특하군. 처음에는 분명 돈에 혹해서 이곳에 온 것 같았는데 말이야.”
오르디의 말에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웠다. 내가 그렇게 테오도르를 진심으로 걱정했나? 남이 봐도 그렇게 티가 날 정도로?
……그런 것 같았다.
분명 내 처음 목적은 아스텔라 언니를 비운의 여주인공 운명으로부터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언니를 대신해서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테오도르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언제부터 그랬지?’
나는 혼란스러웠다.
사실, 나는 어젯밤에도 테오도르에 관한 걱정과 생각으로 잠을 설쳤다.
그의 몸 상태에 대한 걱정과 나의 첫 키스의 순간과 테오도르가 깨어나면 어떻게 그를 마주해야 할지에 관한 생각, 그리고 이다음에는 어떤 방법으로 광증을 가라앉혀야 하는지까지.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뒤엉켜 늦게까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진심으로 테오도르를 생각하게 된 거지? 아니, 언제보다도 왜 이렇게 된 거지?
“그래. 그래야 충직한 하녀라고 할 수 있지.”
아! 그런 거였나? 월급 주는 사람에 대한 충성?
오르디의 말에 순식간에 내 안의 감정은 정리가 되었다.
그래! 돈 받으면 돈값을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