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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24화 (24/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24

“제, 제가 영애를 내쫓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사정이 있어서……”

“사정? 하!”

내가 더듬거리며 겨우 내뱉은 변명은 백작 영애의 코웃음 한번에 아주 간단하게 공중에 흩어져버렸다.

“어제는 테오도르 님께서 몸이 좋지…….”

“그래. 그것도 테오도르 님 앞에서 감히 내게 모욕을 줬겠다?”

“아니, 그게 아니라…….”

“감히, 네까짓게 말이야.”

나는 변명을 하고 싶었다. 사정을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꿇어.”

“네?”

“당장 여기에 무릎을 꿇으라고.”

그녀의 고운 손가락은 자신의 앞을 가리키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여기는 뒤뜰이었고, 그녀가 가리킨 곳은 흙바닥이었다.

“…….”

하지만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흙바닥이든, 가시덤불이든, 백작 영애인 그녀가 평민이자 하녀인 내게 꿇으라고 하면 꿇어야 했다.

더군다나 그 백작 영애가 몹시 화가 난 상태라면 더 그랬다.

“훗!”

조용히 내가 무릎을 꿇자, 그제야 그녀의 입에서 바람빠진 것같은 미소가 새어나왔다.

“어제 그따위 짓을 하고도, 그냥 넘어갈 거로 생각한 건 아니겠지?”

얌전히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듯했다.

“어제는 말씀드렸듯이, 테오도르 님의 몸이 좋지 않으셔서…….”

“하녀주제에 누구 앞에서 감히 허락도 없이 입을 놀리지?”

“…….”

나는 어제의 일을 해명하려 했지만, 더욱 뾰족해진 백작 영애의 목소리에 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입을 다물고 흙바닥의 딱딱함과 축축함을 느꼈다.

“엘자.”

“네, 아가씨.”

내 머리채를 잡으려다가, 오히려 땅에 나동그라진 하녀의 이름이 엘자인 모양이었다.

백작 영애가 아까 말한 대로, 그녀는 거의 내 2배만 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하녀는 백작 영애의 부름에 얼른 앞으로 나섰다. 고개를 숙인 내 시선 안에 엘자라고 불린 하녀의 신발과 치맛자락이 보였다.

“읏!”

하녀는 다시 내 머리채를 잡았고, 그대로 힘을 줘서 뒤로 꺾어 내렸다. 성녀처럼 숙이고 있던 내 머리는 강제로 위로 들어 올려졌다.

덕분에 싸늘한 표정을 한 백작 영애의 얼굴과 심술궂은 엘자의 표정이 한눈에 들어왔다.

“……!!”

특별한 명령도 없었다. 백작 영애는 그저 고개를 한번 까닥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신호였던 모양이었다. 하녀는 내 머리채를 놓는 대신 그녀의 두툼한 손을 사정없이 내 뺨을 향해서 날렸다.

내 뺨에서는 짝! 소리가 아니라, 퍽! 소리가 났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사과해.”

일어나려 손바닥으로 땅을 짚은 순간, 내 위로 짧은 명령어가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여전히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맞은 뺨이 얼얼해서 내 마음대로 발음이 되지 않았다. 약간 뭉개진 발음으로 사과의 말을 하며 나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성의가 없네.”

내 사과에 대해 아주 짧고, 성의 없는 혹평이 내려졌다.

퍽!

그리고 그녀의 충실한 하녀는 혹평에 따라 다시 두툼한 손바닥으로 내게 따귀를 내리쳤다.

잘못 맞은 것인지, 잘 때린 것인지, 입안 쪽 살을 깨물고 말았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구체적으로 아가씨께 네가 뭘 잘못했는지 설명하고, 정중하게 사과해야지.”

참으로 친절하게도 그녀는 내가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순간, 궁금했다. 그녀도 이렇게 누군가에게 맞아가며, 백작 영애의 물음에 답하는 법을 배웠을까?

만약 그랬다면, 아주 아주 손이 매운 사람에게 배웠기를 바랐다.

“어제 테오도르 님께서 몸이 좋지 않아…….”

백작 영애의 반듯한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퍽!

그리고 그 작은 변화를 귀신같이 눈치챈 하녀의 따귀가 내게 날아들었다. 아니, 이건 따귀가 아니라 그냥 주먹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이제 뺨에는 감각이 사라졌고, 머리는 징징 울렸다.

그래도 나는 사과를 이어가야 했다.

“부득이하게 제가 아가씨께…….”

퍽!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따귀가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더 버티지 못하고, 흙바닥에 쓰러지고야 말았다. 그대로 누워있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쓰러져있으면 억지로라도 일으켜 세울 테니까. 아니면 이제 발이 날아올지도 몰랐다.

아버지 밑에서 맞으며 자란 나는 폭력적인 사람이 화가 나면 어떻게 나오는지 아주 잘 알았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맞았다. 예전에는 아버지에게 맞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여기서는 누구도 나를 때리지 않았다.

‘다들 내게 잘해주시지.’

첫인상은 별로였지만, 나름대로 날 챙겨주려는 것 같은 오르디. 엄하지만 사실은 친절하고 자상한 리타 아주머니. 처음 사귄 동갑내기 친구 클레어.

그리고 테오도르.

지금쯤이면 깨어났을까? 몸은 괜찮을까? 이번에는 기억이 괜찮…….

“어디서 꾀를 부리는 거야?”

“으읏!”

역시나 내가 느리게 움직이자 하녀의 발길질이 날아왔다. 어깨가 걷어차이자 일어나려던 몸뚱이가 뒤로 다시 나동그라졌다.

“내가 아주 우스운가 봐?”

“아, 아닙니다.”

백작 영애의 차가운 목소리에 황급히 대답했지만, 몸은 마음과 달리 빠르게 일어날 수 없었다.

어깨가 욱신거리고, 머리가 빙글빙글 어지러웠다. 무엇보다도 뺨이 너무 화끈거리고 아팠다.

“엘자.”

“네, 아가씨.”

저 부름이 뭘 뜻하는지 알았다.

‘또 때릴 거야!’

반쯤 일으켜 세운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고, 목이 기어들어 갔다. 눈도 질끈 감아버렸다.

항상 얻어맞던 몸은, 가해자가 달라져도 착실하게 반응했다.

퍽!

기다렸다는 듯이 타격음이 들려왔다.

‘어?’

이상했다. 아프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리고 각오했던 아픔 대신,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뭐지?’

살그머니 눈을 뜨자, 내 앞을 가로막고 선 남자의 다리가 보였다. 그의 허벅지에는 선명하게 흙이 묻은 발자국이 보였다.

그가 하녀의 발길질을 자신의 다리로 막아준 모양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대체 누가 날 위해서 이렇게 해주는 거지?

‘인스트?’

늠름하게 버디고 선 다리 위로 시선을 올리자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내가 아는 한, 비타하우스에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인스트밖에 없었다.

“이곳은 카르오 대공가의 별채입니다. 외부인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곳입니다. 속히 나가주십시오.”

단호하게 말하는 목소리도 분명 인스트의 목소리였다.

“지금 감히 누구에게 명령하시는 겁니까? 우리 아가씨께서 누구신지 아시고요?”

인스트의 단호한 태도에도 하녀는 기죽지 않았다.

애초에 남의 집에 들어와서 남의 하녀에게 이렇게 폭력을 행사할 정도면, 쉽게 기죽을 성격은 아니겠지.

“죄송합니다. 사람이 아니라 검만 보며 사는 사람인지라, 레이디께서 누구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 아가씨께서 누군지도 모르면서 이토록 무례하게 대하신단 말인가요?”

“저는 테오도르 님의 호위 기사인 인스트 드 글라우스라고 합니다. 이 저택의 보안에 신경 쓰는 입장이라는 것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처음 듣는 인스트의 풀 네임이었다. 인스트 드 글라우스라. 그에게 제법 잘 어울리는 듯한 이름…….

아니, 잠깐!

드 글라우스? 인스트가 귀족이었어??!!

소설에서 인스트는 조연이다 보니, 그렇게 많이 언급될 일이 없었다.

거기다가 인스트를 가장 많이 부르는 남주는 그를 이름으로 불렀고, 여주는 그냥 기사님이라고 불러서, 풀네임은 아예 언급조차 없었다.

거기다가 직접 만나고 나서도, 인스트는 항상 수수한 차림이었기에 귀족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우리 아가씨께서…….”

하녀 역시 인스트가 제 이름을 밝히자 그가 귀족이라는 것을 알고 당황한 모양이었다. 항의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엘자. 됐어, 그만해.”

더 뭐라고 하려는 하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백작 영애는 사뿐히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저는 플리케 드 파블로라고 합니다. 어제 대공비님의 초대로 테오도르 님과 별채에서 잠시 티타임을 가졌었지요.”

“네. 어제 방문객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신분이 확실하신 분이시고, 혹여 레이디께서 불편해하실까 봐 테오도르 님께서 제 호위는 필요 없다고 말씀하셔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티타임에 조금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하여, 오늘 그 불미스러운 일을 만든 하녀에게 교육을 조금 해주고 있었던 참이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인스트는 힐끗, 뒤를 돌아 나를 쳐다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그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내가 사고를 쳤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괜한 일에 끼어들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조금 억울했다. 나는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카르오 대공비님께서 워낙에 바쁘시다 보니, 저런 아랫것들에게까지는 신경 쓰시기 어려우신 것 같아 제가 일을 조금 덜어드린 것이지요.”

내 귀에 우아한 개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오래간만에 많이 맞아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나 보다.

“레이디의 마음은 백번 이해되나, 카르오 대공비님께서 그것을 원하실지는 모르겠군요.”

“물론, 원하실 겁니다. 저와 함께 차를 마시며 종종 이 비타하우스에 대해 의견을 구하시거든요. 특히나, 미래에 관해서요.”

그렇게 말하며 백작 영애는 아주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인스트는 조금 얼굴을 굳혔다.

마치, 저 여자가 무슨 의미심장한 말이라도 한 것처럼.

“이만하면 충분한 교육이 된 듯하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다음에 또 뵙도록 하지요.”

여자는 드디어 돌아가려는 듯, 살짝 묵례를 하고 뒤를 돌았다.

“한가지 조언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인스트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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