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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23화 (23/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23

“입술이 왜 그 모양이야?”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스기엔이 나를 보고 한 말이었다.

“내, 내, 내, 입술이, 뭐, 뭐, 뭐가 어, 어, 어, 어때서?”

……대체 몇 번을 더듬는 거람? 내가 뭐라고 했는지, 나도 못 알아듣겠네.

“입술이 아니라 그냥 입이 다 고장 난 거야?”

스기엔은 역시나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

스기엔의 핀잔에 그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대답을 해봤자, 또 바보같이 말할 게 뻔했다.

입술이 부은 이유야 당연히 알았다. 그렇게 긴 시간을 입술을 물고, 뜯고, 맛보고, 빨아댔으니, 입술이 붓는 것은 당연했다.

오르디를 방으로 부르고, 기절한 테오도르를 다른 하인들이 모셔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나도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3시 티타임에 맞춰서 테오도르의 방에 들어갔던 내가 방에서 나온 시각이 저녁 식사 때가 다되어서라는 걸 알고 나서는 그야말로 기함을 했다.

대체 그렇게 키스를 오래 하는 사람이 어딨어? 오늘은 테오도르가 왜 그렇게 늦게 기절을 한 거지? 빨리 기절을 했으면, 빨리 끝났을 것 아니야.

피보다는 침이 효력이 약한 건가?

“내 식사는?”

“지금 없어.”

“왜!”

“그럴 정신이 아니었단 말이야.”

지금 나는 밥 먹을 정신이 아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지금 먹었다간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클레어에게 나중에 꼭 먹을 테니까, 내 몫은 남겨달라고 부탁하긴 했지만.

“대체 뭐 했길래, 정신이 없어?”

“내, 내, 내가 하긴, 뭐, 뭐, 뭐, 뭘 했다고?”

아차! 묵비권을 행사하거나, 그냥 단답형으로 말했어야 했는데!

뭐 했냐는 스기엔의 말에 그만 찔려서 또 한껏 말을 더듬고야 말았다.

“너, 뭐 했냐?”

“아,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런데 왜 말을 더듬어?”

“내, 내가, 어, 어, 언제?”

“…….”

아오! 이놈의 입!

“뭐 했지?”

나는 입을 여는 대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무슨 짓 저질렀지?”

의혹이 가득 넘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스기엔을 향해 나는 다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흐음…….”

스기엔은 내 속을 꿰뚫어 보고야 말겠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어째서 몽실몽실한 슬라임 주제에 저렇게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거지?

“절대 아무 짓도 안 했다고 우기고,”

뭐야? 왜 평소랑 다르게 목소리마저 날카로운 것 같지?

“입술은 퉁퉁 부은 데다가,”

뭐야, 뭐야? 지금 슬라임이 추리하는 거야?

“말도 더듬는단 말이지?”

스기엔! 네 정체성을 잃지 마. 넌 슬라임이라고!

“다 알아냈어.”

매우 재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스기엔이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왜 나는 내 첫 키스를 좋아하는 사람과 하지 못한 것만으로도 서러운데, 그 사실을 슬라임에게 들켜야 하냐고!

“너…….”

“그, 그게!”

“나 몰래…….”

“상황이 어쩔 수가 없어서!”

“매운 것 먹었지?”

“……어?”

이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네가 뭘 안 먹을 리가 없는 인간인데 안 먹었다고 박박 우기는 데다가, 입술이 그렇게 부은 걸 보면, 틀림없이 저녁으로 매운 걸 먹은 거야.”

날카로운 눈빛과 목소리로 스기엔은 헛소리했다.

“맞아! 그거야! 대단해, 스기엔! 어떻게 알았어?”

나는 그 말에 얼른 호들갑스럽게 호응해주었다.

“훗!”

그리고 스기엔은 다시 재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슬라임에게 뇌가 없어서 매우 다행이었다.

“그럼, 나는 이만 나의 날카로운 추리력을 이용해서 먹을 것을 사냥하러 가야겠어.”

“그래, 수고해~.”

대체 과일 열매와 허브잎을 구하는 데에 무슨 날카로운 추리력이 필요하며, 그런 채집 활동을 왜 사냥이라고 표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기꺼이 웃는 낯으로 스기엔을 배웅해주었다.

평소라면 스기엔은 좋은 친구였지만, 지금 나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아…….”

일단은 만사가 피곤해서 침대에 털썩 누웠다.

오늘 한 일이라고는 오전에는 풀 좀 뽑고, 오후에는 테오도르와 입술 좀 비빈 것밖에 없는데 왜 이렇게 피곤하지?

그래. 사실 그냥 좀 비빈 게 아니라, 역하게 비비긴 했다. 숨이 차서 헐떡거릴 정도였지. 기분도 엄청 좋았는데…….

“아니, 잠깐만. 내가 좋아해도 되나?”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원래 내 의무는 테오도르의 광증 치료였다. 내가 해야 하는 일도 그냥 내 체액을 나누어주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 행위는 ‘키스’가 아니라, 그냥 ‘치료’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치료로 내가 막 그렇게 느껴도 되는 걸까?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였어. 테오도르는 남주잖아? 그것도 19금 소설의 남주. 당연히 키스를 잘할 수밖에 없지.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키스 못 하는 남자 주인공이 어딨느냐고.”

의문에 타당성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도 느끼는 수밖에 없었던 거야. 왜냐! 테오도르가 잘하니까!”

내가 말했지만, 너무나 맞는 말이다. 자고로 남자 주인공치고 키스를 잘 못 하는 남자가 없었고, 19금 주인공치고 절륜하지 않은 남자는 없었다.

그러니 원래라면 여주 동생에 불과한 엑스트라인 내가 어떻게 버티겠냐고.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지!

“그래. 이번에는 몰라서 그랬던 거고, 다음부터는 마음 단단히 먹고 안 느끼면 되는 거잖아? 이 다음번에는 느낄 겨를도 없이 속전속결로 끝내는 거야!”

나는 앞으로의 계획까지 단단히 세웠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찜찜하지?

* * *

“저기, 뒤뜰에서 널 찾는 사람이 있어.”

몇 번 본적이 있는 하녀가 내게 말을 전했다.

“누가요?”

내가 아는 한, 날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날 원래 아는 사람은 내가 여기서 일한다는 사실을 몰랐고, 저택에 와서도 딱히 날 찾을만큼 친해진 사람은 없었다.

“글쎄…….”

하녀는 내가 되묻자, 슬쩍 눈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이 하녀는 분홍머리 마녀설을 믿는 쪽인 듯했다.

“알겠어요. 전해줘서 고마워요.”

괜히 그녀를 괴롭히고 싶지 않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뜰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어쩌면 분홍 머리 마녀 설을 믿는 사람일 지도 몰랐다.

별로 할 일도 없어서 나는 뒤뜰을 향해갔다.

나에게 점을 봐달라고 한다거나, 사랑의 묘약 같은 걸 만들어 달라고 하면 어쩌지?

그런 귀여운 부탁이면 차라리 괜찮지만, 저주라도 내려달라고 하면 곤란했다.

“저기요?”

뭐든지 간에 못 한다고 말하고, 이 기회에 내가 마녀의 자질이라곤 없다는 소문을 널리 퍼트려 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다.

하지만 정작 뒤뜰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누구 없어…… 아악!”

아무도 보이지 않아 고개를 두리번거리는데 별안간 뒤에서 내 머리카락을 누군가 억세게 잡아당겼다.

아스텔라 언니를 부르던 내 입에서는 비명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아악!”

하지만 이내 내 뒤쪽에서도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가 손을 뒤로 뻗어 내 머리카락을 쥔 그 손을 아주 세게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힘이 센 만큼, 악력도 매우 센 편이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사과 같은 과일은 힘을 꽉 주면 부숴버릴 수 있을 만큼이었다.

그런 내 손에 팔이 세게 잡혔으니, 당연히 입에서는 비명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잡은 손을 그대로 옆으로 뿌리치자 내 머리채를 잡았던 여자는 비틀거리며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벌떡 일어서서 뒤를 돌자, 비로소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누, 누구세요?”

당연히 다짜고짜 내 머리채를 잡은 사람은 아스텔라 언니가 아니었다. 당황스럽게도, 생전 처음 보는 여자가 내 머리채를 잡은 것이었다.

그녀가 사람을 착각했을 리는 없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분홍 머리 하녀는 나뿐이었다.

게다가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뒤뜰로 불러낸 것만 봐도 명백히 처음부터 날 노린 게 틀림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나를 왜……?

“쯧! 멍청하긴. 제 덩치 반만 한 여자애 무릎 하나 꿇리는 게 그렇게 어려워?”

나무 그림자 쪽에서 혀 차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

여름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금발의 아름다운 여자가 화려한 모자를 쓰고 팔짱을 낀 채 나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어제 테오도르와 차를 마셨던 그 백작 영애였다.

그녀는 몰래 나무 그림자 속에 숨어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저 피부를 상하게 하는 햇볕을 피해 나무 그늘에 서 있었던 것뿐이었다.

애초에 숨으려면 저렇게 화려한 모자도, 아름다운 드레스도 입고 오지 않았을 테니까.

“너.”

나를 노려보던 백작 영애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감히 하녀 주제에 날 내쫓았겠다?”

그녀의 입꼬리가 어제처럼 파르르 떨렸다.

어제 자신이 당했던 일에 대한 분노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고 그녀의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내가 널 어떻게 죽여놔야 속이 시원할까?”

당연히 질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에 싱긋이 떠오른 미소에 내 팔에는 계절에 맞지 않는 닭살이 오소소 돋아났다.

지하 감옥에서 테오도르와 처음 마주쳤을 때도 이렇게 무섭지는 않았다. 테오도르의 붉은 눈에서는 나를 향한 적의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온통 나를 향한 분노와 증오심으로 똘똘 뭉친 저 여자의 아름답고 우아한 미소는 너무나 섬뜩했다.

‘언니…….’

나는 내가 무서울 때는 늘 그러했듯, 속으로 언니를 불렀다.

“각오는 되어 있겠지?”

하지만 언니는 이곳에 없었다.

나는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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