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20
나는 테오도르가 마실 차에 침을 뱉으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복도에 청소하는 하녀가 있어서, 오늘은 차 색깔이 너무 맑아서 티가 날 것 같아서,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은데 테오도르에게 옮기면 안 되니까.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너무 완벽해서, 등등.
나도 안다. 사실은 다 핑계라는 것을.
‘오늘이야말로!’
하지만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오늘에야말로 침을 뱉고 말리라!
칵! 퉤!
“어머, 그러셨군요.”
비장하게 주전자의 뚜껑을 열고, 막 침을 뱉으려는 찰나였다. 방안에서 들린 여자 목소리에 나는 하려던 행동을 멈췄다.
침을 뱉어야 한다는 사실에 골몰한 나머지 깜빡 잊고 있었다. 오늘 티타임에는 손님이 있다는 사실을.
이름은 벌써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무슨 백작 영애라는 사람이 테오도르를 찾아왔다. 그래서 리타 아주머니가 오늘은 찻잔도 하나 더 챙겨주셨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내 침을 먹이는 건…… 좀 그렇지?’
오늘도 어설픈 양심이 내 행동에 제재를 가했다.
망할 놈. 확실하게 있던가, 그냥 없던가, 둘 중의 하나만 할 것이지.
어쩔 수 없이, 오늘도 실패였다.
“테오도르 님,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인사와 함께 문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테오도르가 보였고, 그가 차를 마시는 동안 내가 앉아서 기다리던 자리에는 낯선 여자가 앉아 있었다.
찻주전자에 차와 뜨거운 물을 넣고 차가 우러나기를 잠시 기다리는 동안, 백작 영애라는 사람을 힐끗 보았다. 나는 레이디를 보는 것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뭐랄까……. 나와는 다른 생명체처럼 보였다.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결 좋은 금발도 그랬고, 테오도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끄덕이는 고갯짓은 어딘지 모르게 우아했다.
은은한 미소를 담은 얼굴도 굉장히 예뻤다.
뭐랄까? 그녀의 미소와 몸짓 하나하나에 귀족적인 우아함이 배어 있는 느낌이랄까?
거기다가 그녀와 테오도르가 나누고 있는 이야기도 내게는 딴 세상 이야기 같았다.
지엥트 백작이 누구인지 내가 알 리 없으니, 그분이 커다란 온실 정원을 지은 것은 차치하더라도, 튤립인지 뭐시기인지 하는 꽃 한 송이의 가격이 내 한 달 월급보다 비싸다니.
일주일이면 꽃은 시들 텐데 그런 데에 그렇게 많은 돈을 쓴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조금 전에 그녀가 말을 꺼낸 최근 사교계에는 빨간색이 유행이라는 말에 의아하기까지 했다.
옷 색깔에 유행이 있다고? 그럼 수도 사람들은 다 빨간 옷을 입은 건가? 내년에 파란 옷이 유행이면 그 빨간 옷은 다 버리고?
그러고 보니, 그녀의 드레스 역시 빨간색이었다. 그럼 내년에는 저 옷을 버리는 건가? 엄청 멀쩡해 보이는데 아깝다.
부자들의 생각은 정말 알 수가 없네.
“향이 좋네요. 좋은 차를 쓰시나 봐요.”
“아마 그럴 겁니다.”
“어머, 제가 너무 당연한 소리를 한 것 같네요. 카르오 대공가의 분에게 좋은 차를 쓰냐고 물어보다니. 제 발언이 무례했다면 용서해주세요.”
“아닙니다. 제가 차에 대해서 잘 몰라서 그렇게 대답한 것…… 뿐입니다…….”
나는 조용히 그 향이 좋은 차를 두 잔 따랐다. 먼저 손님인 백작 영애에게, 그리고 나머지 한잔은 테오도르의 앞에 놓으려는 찰나였다.
‘응?’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 내 눈에 띄었다. 테오도르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앞에 여자 때문에 떠는 건가? 마음에 들어서 떨려서?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말할 때도 목소리도 조금 떨렸던 것 같아.’
분명, 그녀는 남자가 한눈에 반했다고 말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예쁘고, 우아했다.
더군다나 가냘프고, 청순한 느낌이 아스텔라 언니와 비슷한 이미지도 조금 있긴 했다.
그러니, 테오도르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다만…….
‘테오도르의 캐릭터가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손을 떨 캐릭터가 아닌데?’
나의 의문은 그것이었다. 자고로 19금 피폐물의 남주라 함은, 손을 떨 만큼 강렬하게 그녀에게 반했다면, 이 백작 영애를 방에 감금할 족속이었다.
그녀를 찾으러 온 사람은 죽이고,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다시는 그녀를 찾지 말라고 백작 가문에 압박을 넣는 것이 정상이었다.
보통 정상인의 머리에서 나오지 못할 비정상이 그들에게는 정상이었고, 너무나 정상적인 반응은 무조건 의심해야 했다.
아직 테오도르는 피폐물 남주와 같은 모습은 보인 적이 없었지만, 일단 기본 캐릭터는 엄연히 19금 피폐물의 남자 주인공이니 의심스러웠다.
‘아니면 어디가 아픈가?’
티스푼을 가지런히 놓으며, 나는 다시 한번 테오도르를 살폈다. 그 순간, 나는 테오도르에게서 수도의 유행 아이템을 발견해냈다.
‘테오도르도 역시 귀족이었어. 수도가 아닌 곳에서도 수도의 유행을 놓치지 않는다니! 그래도 빨간색이 유행한다고 눈동자를 빨간색으로 바꿀 것까지는……. 아니, 잠깐?!’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나려던 나는 다시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테오도르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서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테오도르의 눈은 신비로운 보라색 눈동자가 아니라, 분명히 붉은색이었다.
‘망했다!’
붉은 눈의 테오도르를 확인하자마자, 내 머릿속에서는 빨간불이 켜졌다.
침착해, 레나티스. 이런 테오도르를 보는 게 처음도 아니잖아? 침착하게 대응하면,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어.
일단, 아주 침착하게 테오도르에게 신호를 보내는 거야. 지금 광증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이야.
그래서 테오도르가 상황을 알아차리면, 앞에 있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백작 영애를 돌려보낼 것이다.
그 뒤에 내가 그에게 체액을 흡수시키면, 상황은 무사히 종료될 수 있었다.
나는 입은 꽉 다물고, 눈을 부릅떠서 테오도르에게 신호를 보냈다. 누구라도 지금 내 얼굴을 본다면, ‘왜 저래?’ 혹은 ‘무슨 일 있어?’라고 물어볼 표정이었다.
그러니, 테오도르도 날 보면 무슨 일이 생긴 것임을 알아차리…….
“…….”
틀렸어! 눈이 이미 맛이 갔잖아!!
테오도르는 그저 나를 서늘하게 쳐다보고 있을 뿐, 이런 날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이 무언가를 참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가 뭘 참고 있는지는 뻔했다. 광증이겠지.
문제는 그게 참는다고 참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입만이 아니었다. 가늘게 떨리던 손은 이제 그의 무릎을 꽉 붙잡고 있었고, 이제는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의 테오도르는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대응할 수 없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온전한 정신으로 있을 수 있게 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였다.
그의 반듯한 이마에서 천천히 배어 나오고 있는 땀으로 봐선 그마저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차 시중을 자처한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 나도 몰랐다.
“이렇게 좋은 차를 대접받았으니, 다음번에는 제가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싶네요. 아니면 곧 단풍이 예쁠 계정이니 함께 소풍하러 가도 좋을 것 같고요.”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백작 영애는 그저 천진하게 소풍 이야기나 하고 있었다. 덕분에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이곳에서 나가게 만들어야 했다.
오르디가 내게 신신당부했듯, 카르오 대공가의 저주는 비밀이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백작가의 영애에게는 더욱 철저한 비밀이어야 했다.
그녀에게 테오도르의 현 상태를 들켜서는 안 됐다. 테오도르의 눈 색깔이 변한 것만 봐도 그녀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말거다.
굳이 날카로운 송곳니와 손톱이 아니더라도, 테오도르가 나에게 달려들어 물어뜯는 모습을 보지 않더라도 말이다.
“죄송합니다. 티타임은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백작 영애 님.”
나는 내 몸으로 지금도 변하는 중인 테오도르를 가리며, 우아하게 찻잔을 든 백작 영애에게 말했다.
내 말을 듣자마자,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감히 자신에게 말을 거는 하녀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하녀가 귀족에게 말을 걸면 안 된다는 것은 물론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테오도르 님께서 몸이 좋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니 영애께서는 다음에 다시 방문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내 말을 들은 그녀의 얼굴은 더욱 딱딱하게 굳어졌다. 감히 하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을 뿐만이 아니라, 이만 돌아가라는 말을 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도 나는 어쩔 수 없었다.
테오도르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나를 무는 광경을 본다면, 곱고 귀하게 자란 백작 영애는 기절할지도 몰랐다.
아니, 그냥 곱게 기절만 한다면 차라리 나을 것이다. 혹시 테오도르가 정신이 나가버린 나머지 내가 아니라 그녀를 덮치기라도 한다면…….
으악! 그 뒤는 상상하기도 싫었다.
“지금…….”
서늘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백작 영애의 고운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분노로 파르르 떨리는 그 입술을 보며,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앞에는 분노의 맹수, 뒤에는 광증의 맹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