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18
“아니, 아니, 아니 잠시만요!”
나는 황급히 좋아하지도 않는데, 차여버린 이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해보려고 했다.
인스트의 취향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나는 잘았다.
그는 소설 속에서 아스텔라 언니에게 반했으니까, 당연히 나를 좋아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라고! 당신도 내 취향 아니라고!
“저기, 물론 인스트 님은 아주 멋지신 분이십니다. 만약에 지금 상태에서 키가 10cm쯤 더 크시고, 근육이 20kg 정도 더 있으셨다면, 저는 분명히 인스트 님에게 반했을 겁니다. 물론, 용기가 있다면 고백도 했겠죠.”
“나보다 키가 10cm가 크면, 190cm이 넘을텐데?”
“최소한 10cm입니다.”
“거기다 나보다 20kg이 넘는다면, 몸무게도 100kg이 넘어야 한다는 건가?”
“그 또한, 최소한입니다.”
매우 분명한 나의 최소치에 인스트는 잠시 침묵을 선택했다. 이 정도면 그도 알았을 것이다. 내가 자기에게 반한 게 아니라는 것을.
“그럼 전 이만.”
더 잘 수도 없었고, 잠도 다 깼으니, 여기에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봐.”
인스트에게 살짝 묵례하고 내 방으로 가려는데, 그가 다시 나를 불러세웠다.
“그때 다친 건 다 나았어?”
“다친…… 아!”
처음에는 인스트가 뭘 말하는지 몰랐는데, 이내 그와의 첫 만남이 지하 감옥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네. 뭐, 거의 다 나았어요.”
아직 완전히 다 나은 상태라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딱지가 떨어지려는 자리엔 불그스름한 새살이 차오르고 있었다.
“테오도르 님의 치료는 늘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건가?”
“글쎄요?”
“네가 모르면 누가 알지?”
“그래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되도록 다른 방법을 찾고 싶은 것은 나였다. 피를 보지 않는 방향으로 말이다.
문제는 아직 찾지 못했다는 거지.
“그래도, 뭐, 잘되지 않겠어요?”
“방법은 모른다면서, 잘 될지 어떨지는 어떻게 아는 거지?”
“안다기보다는 그랬으면 하는 거죠.”
“…….”
“그리고 사람은 생각보다 튼튼하거든요. 그러니까, 테오도르 님도 잘 견딜 수 있을 것이고, 저도 잘 버틸 수 있을 거로 생각해요.”
인스트는 내 말이 매우 의심스럽다는 듯이 스윽 쳐다보았다. 아니면, 내 말이 아니라 내 몸이 튼튼하다는 게 의심스럽던가.
내 취향에는 못 미치지만, 기사인 만큼 꽤 근육질인 그가 보기엔 나 같은 여자애는 허약해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귀찮게 굳이 인스트에게 내가 증명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 이만.”
“이봐.”
몸을 돌려서 이번에야말로 진짜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또 인스트가 불러 세웠다.
“왜요?”
이제는 나도 제법 짜증이 났다. 잘 자던 사람의 잠을 깨운데다가,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채이고, 고백도 안 했는데 또 채이고, 가려는데 자꾸 이렇게 불러세우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이거.”
내 쪽으로 다가온 인스트가 내 머리를 향해서 손을 뻗었다.
“꺅!”
그 행동에 나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고, 눈을 질끈 감았다.
“뭐 하는 거야?”
살짝 당황한 듯한 인스트의 목소리에 나는 감았던 눈을 살포시 떴다. 그의 손에는 나뭇잎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아마, 내가 나무 아래에 누워 있던 중에 내 곱슬머리에 엉킨 나뭇잎인 것 같았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인스트는 나를 때리려던 것이 아니었다. 늘 손찌검하던 아버지는 여기에 없었다.
“죄송해요.”
갑자기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어떻게 그런 착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너…….”
인스트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이, 심각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더 무슨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씁쓸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한번 두드렸을 뿐이었다.
다 안다는 듯이, 힘내라는 듯이.
* * *
‘좋아! 할 수 있다!’
웨건을 밀고 테오도르의 방으로 들어가며 나는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다.
리타 아주머니가 외우라고 한 것을 밤새 외우느라 몸은 피곤했지만, 덕분에 오늘은 제법 마실만 한 차를 우렸다며 칭찬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혼자 차 시중을 들어도 된다는 허락까지 받았다.
“테오도르 님. 차를 가져왔습니다.”
배운 대로 멘트를 하고,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어제와는 달리 기분이 괜찮은 모양인지, 그는 평온한 표정으로 책을 보고 있었다.
“응.”
테오도르는 보고 있던 책에서 눈을 떼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아마도 무척 재미난 책인 모양이었다.
‘아깝다! 저렇게 책에 푹 빠져 있을 때, 나의 악독하고 은밀한 계획을 실행했어야 했는데!’
속으로는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지만, 겉으론 그저 침착하게 배운대로 티팟에 차를 넣고 우렸다.
그리고 슬금슬금 곁눈질로 테오도르의 상태을 체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눈! 보라색, 오케이!
손톱! 단정, 오케이!
이! ……는 안보이지만, 잘 다물고 있으니 일단 오케이!
내가 테오도르를 훔쳐보는 동안 향긋한 차의 향기와 따스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조금 더 기다렸다가 맑고 고운 차 한잔을 따라 테오도르의 앞에 놓았지만, 그는 여전히 책에 푹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뭔데 저렇게 재밌게 보지?
‘스러져가는 것들을 위한 시’
시집을 보고 있구나. 어? 그런데 시라는 건 짧지 않나? 아까부터 테오도르가 페이지를 넘기는 걸 보지 못했는데?
살짝 까치발을 들어 테오도르가 무슨 페이지를 보고 있는지 확인하려 했지만, 내가 서 있는 곳에서는 각도상 보이지 않았다.
대신 집중해서 페이지를 넘기나 안 넘기나를 보고 있는데, 역시나 그의 손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자는 건…… 아니지?’
약간 내리깐 상태이긴 했지만, 테오도르의 보라색 눈동자가 똑똑히 보였다. 그가 눈을 뜬 채로 자는 게 아니라면, 깨어있는 게 확실했다.
내가 테오도르의 상태를 확인하던 순간이었다.
“…….”
테오도르의 보라색 눈동자가 갑자기 나를 향했다. 테오도르를 관찰하느라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내 눈은 그와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말았다.
‘으아아아아!’
순간,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왜 그랬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저절로 그 행동이 나왔다.
아마도 그를 너무 빤히 쳐다본 것이 무례한 짓임을 나도 알아서 이거나, 하녀가 주인을 그렇게 쳐다보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워서 일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유가 한가지가 아니었네. 이러다 혼나는 거 아니야?
“앉지, 그래?”
하지만 테오도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지 말고.”
설마 나더러 앉으라는 건가 싶어서 그를 쳐다보자, 테오도르는 턱으로 친히 긴 소파를 가리키기까지 했다.
“어…….”
그래도 되는 건가 싶어서 나는 잠시 주춤했다. 나는 차 시중을 드는 하녀인데 그래도 괜찮나? 평범한 하녀는 아니지만, 어쨌든, 하녀인데.
“사람이 그렇게 우두커니 있으면 신경 쓰이니까.”
아, 그런가? 하긴, 누가 나 다 먹나 안 먹나만 쳐다보고 있으면, 신경 쓰이기도 할 것 같았다. 거기다가 테오도르가 직접 괜찮다고 했으니까, 괜찮겠지?
“시를 좋아하시나 봐요.”
소파에 앉자 테오도르가 정면으로 보였다. 내가 앉은 것을 확인이라도 하듯 그가 쳐다보자, 내가 슬쩍 말을 걸었다.
“별로.”
테오도르는 1초쯤 나를 쳐다보고, 다시 시집에 눈을 돌리면서 말했다. 몇 분이나 한 페이지만 읽고 있으면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니.
아무래도 테오도르는 솔직한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았다.
뭐, 피폐물의 집착후회남들이 다 그렇지. 아, 아니다. 테오도르는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그냥 찐미친놈으로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뿐이었다.
“넌?”
“네?”
“무슨 책을 좋아하지?”
여전히 시선은 시집에 가 있고, 전혀 궁금하지 않은 표정으로 테오도르는 내게 물었다.
진심인가?
“전 책은 안 좋아해요.”
“왜?”
“재미도 없고, 책 보면 졸려서요.”
내가 전생에서 봤던 그런 자극적이고 재밌는 책은 아쉽게도 이번 생에는 없었다. 게다가 책은 비싼 물건이었다. 가난한 우리 형편에는 살 수도 없었다.
“그럼 뭘 좋아하는데?”
이제야 책에서 눈을 떼고, 나를 쳐다보며 테오도르가 물었다. 퍽 흥미로워하는 시선으로 봐선 테오도르의 주변에는 책 싫어하는 사람이 이제껏 없었나 보다.
“어…….”
글쎄. 내가 뭘 좋아할까?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라면…… 우리 아스텔라 언니? 하지만 그런 질문은 아닌 것 같았다.
테오도르의 질문은 아마도 독서나, 승마, 악기연주 같은 취미를 뜻하는 것 같았는데, 내게 그런 취미가 있을 리 없었다. 그저 먹고 살기 바빴던 삶이었다.
“맛있는 거 먹는 것?”
약간의 고민 끝에 내가 내놓은 대답은 그것이었다.
“그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테오도르는 피식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 웃음에 괜히 자신감이 솟아났다.
“그래서 여기 생활이 마음에 들어요. 맛있는 게 많이 나오거든요. 저는 스테이크라는 걸 처음 먹어봤어요. 거기다가 양으로 스테이크를 만든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요.”
“살이 있는 동물이라면 다 가능하지.”
“생선도요! 이상해요. 그냥 생선구이인데, 왜 스테이크가 되면 더 맛있는 거죠?”
“글쎄?”
테오도르는 똑똑한 줄 알았는데, 그도 모르는 것이 있구나.
“아! 얼마 전에는 푸딩이라는 것도 처음 봤어요.”
“그래? 맛있었나?”
“맛은 못 보고, 그냥 보기만 했어요. 그건 제 차례까지 오지 않았거든요.”
“차례?”
“네. 푸딩은 재료가 비싸서 많이 만들지 않는대요. 그래서 남는 게 있으면, 고용인 중에서 지위가 높거나 연장자분들이 드신다고 해요.”
테오도르는 처음 드는 소리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가며 내 이야기를 들었다.
“아, 어제 나온 닭요리도 맛있었어요.”
“어제는 닭요리가 나오지 않았던 것 같은데?”
“네? 가슴살밖에 못 먹긴 했지만, 분명히 닭고기의 맛이었는데요.”
“아! 그거 닭이 아니라 꿩이야.”
“꿩요? 꿩도 먹어요?”
“사람이 못 먹는 고기는 없어. 독이 있는 생선도 독 처리를 하고 먹는 게 인간이라고.”
“세상에!”
독이 있는 생선을 먹는다는 말에 그야말로 나는 깜짝 놀랐다.
아무리 먹을 게 없어도, 나랑 언니는 독버섯이나 독이 있는 나물을 먹을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있는 놈들이 더하다니, 먹을 것이 천지로 쌓인 귀족들이 독 있는 걸 굳이, 굳이, 먹는구나.
“테오도르 님께서도 드셔보셨어요?”
“그래.”
“맛있나요?”
“뭐?”
“독이 있는 생선은 한 번도 못 먹어봤거든요. 그럼 독사나 독버섯도 먹을 수 있나요?”
“무슨 맛인지가 궁금한 건가? 독이 든 음식을 먹는 게 신기한 것이 아니라?”
“당연하죠! 독이 있는 거니까, 뭔가 톡 쏘는 맛인가요?”
“그렇지는 않아.”
“어쨌든, 엄청 맛있겠죠? 위험을 무릅쓰고 먹는 거니까요!”
“굳이 말하자면, 담백한 생선의 맛이야.”
“오오!”
테오도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말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도, 그다음도, 또 그다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