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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17화 (17/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17

누가 차 시중이 쉽다고 했지?

“물이 너무 뜨거운 것 같지 않니?”

그런 말을 한 사람은 바보 멍청이였다.

“아직 덜 우려졌잖니.”

오르디는 바보, 멍청이, 쇠똥구리야!

“그게 아니야. 좀 더 주전자를 들어야지.”

레나티스 바보 똥 멍청이.

오늘도 리타 아주머니에게 차 시중드는 법을 배운지 2시간 만에 나는 이미 녹다운이 되어 있었다.

차에 그냥 뜨거운 물을 부으면 차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귀족님의 차 시중은 그런 게 아니었다.

물이 너무 뜨거워도 안 되었고, 물이 너무 덜 뜨거워도 안 됐다. 차가 너무 많이 우러나면 썼고, 차가 덜 우러나오면 맛이 나지 않았다.

거기다가 주전자는 이렇게 잡아야 하고, 이만큼 들어서 따라야 하고, 손잡이가 와야 하는 방향과 설탕이 놓여야 하는 자리까지 정해져 있었다.

“오늘은 내가 하는 걸 잘 보기만 하렴.”

테오도르의 방문에 노크하기 전, 리타 아주머니는 아주 엄한 목소리로 당부하셨다. 주전자에 손끝 하나 댈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처럼.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테오도르 님.”

가볍게 노크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리타 아주머니는 문을 열었다.

“차 마실 기분이 아니니, 돌아가.”

안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반쯤 문을 열었던 리타 아주머니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혹시, 어디가 안 좋으신가요?”

“그래. 기분이.”

짧은 대답에는 아까보다 더한 신경질이 담겨있었다. 아주 작게 들썩인 가슴과 어깨로 리타 아주머니의 한숨이 느껴졌다.

“네, 알겠습니다.”

별 대꾸 없이 리타 아주머니는 그대로 문을 닫았다.

“오늘은 테오도르 님의 기분이 별로이신 것 같구나.”

“그런 것 같네요.”

닫힌 문을 힐끗 바라보며, 나는 대답했다. 아까 문이 열려있을 때, 그 안에 있는 테오도르를 보았다.

소파에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한 손으로 머리를 짚고 있는 모양새가 두통이 있는 듯도 했고, 커다란 고민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카르오 대공님께서 돌아오셨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리타 아주머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저 혼자 흠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내가 다 들어버렸는데?

“대공님께서 돌아오셨으면, 테오도르 님께서 기분이 좋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 가족이 멀리 있다가 오랜만에 돌아온 거잖아요.”

만약에, 지금 아스텔라 언니가 날 보러 온다고 하면 나는 맨발로 뛰어나가 마중을 할 터였다.

그리고 언니를 번쩍 안아 들고 빙글빙글 돌려주고 말테다. 그러면 언니는 어지럽다고 말하면서도, 함박 웃음을 짓겠지.

“너도 계속 이곳에 있을 테니 말해줘야겠지. 테오도르 님과 카르오 대공님께서는 사이가 좋지 않아. 그래서 부득이하게 본채에 다녀오신 날이면, 테오도르 님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으시지. 부자간에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면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아뇨. 그럴 수도 있죠.”

나는 아주 쉽게 리타 아주머니의 말을 받아들였다.

“저도 아버지와 사이가 좋다고는 말할 수 없거든요.”

왜냐하면, 나도 그랬으니까.

“그러니?”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지만, 리타 아주머니가 나를 꼼꼼히 뜯어보는 것이 느껴졌다.

“때로는 남보다 못한 게 가족이죠.”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닫힌 방문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테오도르가 혼자 앉아있을 터였다.

“다음에는 차를 드시면 좋겠어요. 오히려 그러면 기분이 나아질 수도 있을텐데요.”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럴 때는 어떤 차가 좋을까요?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허브차는 알려주셨는데, 기분이 좋아지는 차는 아직 알려주지 않으셨어요.”

“그런 효능이 있는 차는 없단다.”

“네? 그래요? 있으면 좋을 텐데요.”

참으로 아쉬웠다. 그런 차가 있다면, 지금의 테오도르에게 딱 좋을 텐데.

“다음에는 네가 조용히 들어가서, 테오도르 님께 차를 권해보려무나.”

“돌아가라고 하셨는데 그래도 되나요? 리타 아주머니도 그냥 돌아가시는 길이잖아요.”

처음에 오르디에게 무조건 윗분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들었는데, 지금 리타 아주머니는 정반대의 말을 해서 혼란스러웠다.

“원래는 그러면 안 되지만, 내 생각에 너는 그래도 될 것 같구나.”

리타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니, 저기요. 아주머니. 그렇게 안 보였는데, 너무하세요! 그랬다가 혼나는 건 저라고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건, 리타 아주머니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였다.

힐끗.

다시 시선이 뒤를 향했다. 두고 가는 물건이라도 있는 것처럼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아니, 길 잃은 어린 애를 혼자 두고 가는 것처럼 신경이 쓰였다.

‘테오도르 님은 다 큰 성인 남자인데, 난 왜 자꾸 그렇게 느껴질까?’

나도 알 수 없었다.

* * *

뒤뜰에는 스기엔의 소개로 알게 된 낮잠 명당이 있었다.

앞에는 나지막한 관목이 줄을 서 있어서 누우면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고, 뒤에는 커다란 아름드리나무 한그루가 그늘을 드리워서 햇볕을 막아 주었다.

거기다가 나무 그늘이라 풀들이 누우면 적당히 폭신한 정도로만 자라 있었다.

얼굴은 타지 않게 나무 그늘에 두고, 몸은 햇볕에 두자 따끈따끈한 햇살에 몸이 데워지며 곧 노곤해졌다. 나는 이내 꿀 같은 낮잠에 빠져들었다.

.

.

.

“하나! 둘! 셋!”

갑자기 들린 우렁찬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순간 내 눈에 보인 풍경은 평화 그 자체였다.

반짝이는 나뭇잎과 그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그리고 푸르른 하늘까지. 그야말로 한가로운 오후의 풍경화 같았다.

“여덟! 아홉! 열!”

저 시끄러운 목소리만 뺀다면 말이다.

‘얼마나 잔 거지?’

푸른 하늘과 햇살에서 늦은 시간이 아님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내가 그리 오래 잔 것은 아닐 것이다.

몸을 일으키자, 저쪽에서 시끄러운 목소리의 주인공이 보였다.

“인스트잖아?”

웃통을 벗어젖히고, 열심히 칼을 휘두르고 있는 사람은 테오도르의 호위무사인 인스트였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적을 매우 위협적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열여덟! 열아홉! 스물!”

저 숫자는 인스트가 검을 휘두른 횟수인 걸까? 그게 아니면, 적을 맞춘 횟수 인 걸까? 어쩌면 쓰러트린 적의 숫자일 수도 있겠다.

그러고 보니, 클레어가 검술 연습을 하는 인스트를 보고 멋있다고 했었지? 그 장소가 여기였나보다.

“스물 다서……엇?”

그가 힘차게 휘두른 검이 내 쪽을 향했을 때, 인스트의 눈이 커지더니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오는 기척을 전혀 못 느꼈는데?”

“그야, 제가 먼저 왔으니까요.”

“먼저 와있었다고? 그 뒤에 숨어 있었던 건가? 왜?”

인스트는 내게 질문을 퍼부었다. 호위무사라는 건 의심병이 있어야 하는 직업일지도 몰랐다.

그래야만 위협으로부터 대상자를 안전하게 지킬 테니까.

“숨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누워서 낮잠을 자고 있었던 건데요.”

“낮잠? 여기서?”

“네. 여기가 제 낮잠 명당이거든요.”

“여기가 좋긴 하지. 오가는 사람도 별로 없고, 조용하고.”

아무래도 여기는 내 낮잠 명당일 뿐만 아니라, 인스트의 훈련 명당이기도 한듯했다.

“나 때문에 깬 거라면, 미안하군.”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일단 인스트는 그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그리고 나 역시 꿀잠에서 깨서 조금 짜증스럽긴 했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원래 어른의 대화란 그런 것이다.

“하나! 둘! 셋!”

그 짧은 어른의 대화 뒤에 우리는 각자의 할 일로 돌아갔다. 숫자를 까먹은 것인지 인스트는 다시 하나부터 시작해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잠은 깼지만, 아직 몽롱한 기운은 남아 있었다. 아직 방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아 무릎걸음으로 큰 나무 근처로 기어가 거기에 기대어 앉았다.

그저 멍한 눈으로 인스트가 검을 휘두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제법 남자다웠다. 클레어가 멋있다고 말한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고로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다 멋있었다.

아…… 저기서 키가 5cm, 아니 10cm만 더 컸으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몸무게도 한 15kg 정도만 더 나가고. 물론 15kg은 전부 근육이어야지. 그러면 정말 내 취향일 텐데!

저런 얄팍한 검 말고, 도끼가 어울리는 남자가 어디 없을까? 지금 내가 기대 있는 아름드리나무를 한방에 뚝딱 베어버리고, 나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서 자기 어깨에 얹을 수 있는, 그런 근육 빵빵…….

“뭘 그렇게 쳐다봐?”

그저 상상만으로도 황홀한 내 기분을 와장창 깨뜨린 것은, 이번에도 인스트의 목소리였다.

“조그만 게 눈은 높은 모양이야.”

“네?”

“미안하지만, 너같이 어린애한테는 관심 없어.”

“네에?”

이게 무슨 일이야? 나 지금 고백도 안 했는데, 채였어? 아니, 아예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채인 거야? 내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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