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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15화 (15/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15

“저기요!”

누군가 나를 불렀다.

“저기요! 일어나세요!”

젊은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몸이 흔들렸다.

“흐음…….”

눈을 뜨자, 동그란 얼굴에 걱정을 가득 담은 여자애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부스스 일어나는데, 팔이 가벼웠다. 같이 잠들었던 스기엔은 언제 깬 것인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누구세요?”

내가 일어나자, 여자애는 겁먹은 표정으로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저택에서 마주친 몇몇 사람들이 보인 태도랑 비슷했다.

아마도 분홍 머리는 마녀라고 불리기 때문일 거다.

“저, 저는 하녀인 클레어라고 해요.”

연갈색의 겁먹은 눈동자를 가진 여자애가 더듬더듬 제 소개를 했다.

“제가 잠을 깨워서 화나신 건 아니죠?”

내 또래로 보였는데, 내게 높임말을 하며 매우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화나지 않았어요.”

창문 밖은 아직 훤했다. 저녁을 먹으라고 깨운 것은 아닌 듯했다.

“무슨 일인가요?”

“카르오 대공님께서 영지 순찰에서 돌아오셨어요. 오랜만에 저택으로 돌아오신 거라 모든 고용인들이 마중을 나가야 하거든요.”

클레어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카르오 대공. 현재 카르오 대공가의 가주이자 테오도르의 아버지였고, 나의 실질적인 고용주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무척 잔혹한 사람이라고 들었어.’

각성 전의 나는 테오도르의 이름도, 존재도 몰랐다. 하지만 카르오 대공만은 나도 아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제국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듯했다.

하나는 황제와 맞먹을 수도 있는 권력가로, 또 하나는 잔혹함으로.

자신에게 맞선 가문은 반란으로 몰아 멸문시키고, 남자는 노예로 여자는 매음굴로 팔아넘긴다고 들었다.

전장에서는 더욱 피도 눈물도 없어서 민가에 불을 지르는 것은 물론이고, 포로는 전부 참살시켰다고 했다.

그의 잔혹함이 가장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디오라 왕국을 제국에 복속시킬 때였다.

그는 38명의 디오라 왕족을 전부 참수하고 그 목을 성문에 내걸었다. 그중에는 고작 5살의 어린 왕자도 있었다.

“어서 서두르세요. 수도에 들어섰다고 연락을 아까 받았으니, 언제 마차가 당도할지 몰라요. 늦으면 큰일이예요!”

나를 깨울때보다 더 겁먹은 표정으로 클레어는 서둘렀다. 늦는다는 말을 할때는 아주 사색이 되었다.

“알았어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클레어를 따라 복도를 거의 뛰듯이 빨리 걸었다. 별채의 넓은 정원으로 나와서는 아예 뛰었다.

“빨리, 빨리!”

처음에는 서두르라며 나를 보채던 클레어였지만, 점점 숨을 헉헉거리고 다리가 느려지는 것도 그녀였다.

뒤를 따라가고 있었던 나는 어느새 클레어를 추월해서 앞서나가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뒤를 돌아보자, 가쁜 숨을 내뱉으며 걷는 속도로 달리는 클레어가 보였다.

“머, 먼저 가세요.”

급기야 클레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틀렸어요. 달리기도 느리고, 행동도 굼뜬데다가, 어리바리하다고 오르디 님께도 만날 혼나는 걸요.”

저기요, 하녀양. 그렇게 자기비하를 하시면 제가 어떻게 혼자 가죠? 제가 그렇게 양심없는 쓰레기로 보이나요?

“힘내요. 할 수 있어요.”

차마 울먹이는 이름모를 하녀양을 두고갈 수 없었다. 나는 동의를 구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자! 뛰어요!”

그리고 거의 그녀를 잡아끌며 다시 멀리 보이는 본채를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으앗! 너, 너무 빨…… 으아!”

뒤쪽에서 비명과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건 무시하고 그녀가 넘어지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뛰었다.

아주 다행히도 우리가 본채의 앞에 당도했을 때는 아직 마차가 보이지 않았다.

“쯧.”

테오도르의 옆에 서 있던 미묘하게 오르디를 닮은 중년의 남자가 우리를 보더니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얼른 뒷줄에 서라는 듯, 고갯짓했다.

암요, 암요.

나는 다리가 후들거리는 클레어를 끌고, 고개를 숙이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 뒤에 똑같이 줄을 섰다.

“하아, 하아, 살았다…….”

클레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살짝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제법 많은 수의 고용인들이 본채의 현관 앞에 양쪽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줄의 중앙, 현관의 앞에는 아까 우리에게 눈치를 주었던 그 중년의 남자와 테오도르, 그리고 아름다운 여자가 한 명 서 있었다.

‘저 사람이 카르오 대공비일까?’

금발에 녹안을 가진 여자는 30대 중후반으로 보였다. 테오도르의 어머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어 보이는 데다가, 닮은 점도 너무 없어 보였다.

하지만 테오도르의 옆에 선데다가 화려한 치장을 하고 카르오 대공의 마중을 나온 것을 봐선, 그녀가 카르오 대공비 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모자가 저렇게 썰렁할 수 있나?’

두 사람은 오직 정면만을 보고 있었다. 옆에 있는 아들, 혹은 어머니를 쳐다본다거나, 기다리는 가족에 대한 담소도 없었다.

오히려 옆에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혹시 친모자 관계가 아닌가?’

소설에선 카르오 대공이나 대공비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었던데다가, 현생에서 일개 평민에 불과한 나는 카르오 대공가의 족보가 어떻게 되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고마워요.”

내가 열심히 앞에 있는 두 사람의 관계를 추론하고 있을 때, 클레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열심히 뛰어와서 빨개진 얼굴의 클레어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같이 뛰어줘서.”

“아니, 뭐, 나 때문에 늦을 뻔했잖아요. 나 깨우느라고.”

“그렇지만 함께 뛰어줘서 고마웠어요. 난 마녀라고해서 무서울 줄만 알았는데…….”

수줍게 말을 건내는 클레어의 얼굴에는 친근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저기, 있잖…….”

“쉿! 오신다.”

클레어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앞쪽에서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것이 들렸다.

일순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람들의 몸이 경직되고, 그 사이에서 긴장감이 감돌았다.

무슨 말을 하려던 클레어 역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바닥을 바라본 채, 눈만 도로록 도로록 굴리는 중에 저 멀리서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렸다.

‘수행원들과 함께여서겠지??’

점점 다가오는 발소리에 맞춰서 내 심장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두려움과 긴장에 입술마저 바싹바싹 말라올 때였다. 들리던 발소리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어?’

그것도 내 앞에서.

고개 숙인 내 시선 안에 검은색 가죽 부츠가 보였다.

그리고 갑자기 멈춰선 가죽 부츠 때문에 뒤따르던 갈색의 부츠들이 멈칫거리며 당황하는 것 또한 보였다.

그리고 고개 숙인 내 머리를 찌를 듯이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

시선의 압박에 홀린 듯이 고개를 들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 쌍의 날카로운 눈동자였다.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카르오 대공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을 입었는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는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 강렬한 눈이 내 시선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독사와 같은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시선 안에 먹이는 바로 나였다.

‘저 사람이…… 카르오 대공.’

아무런 표정도 없이 나를 쳐다보던 대공은 이내 흥미를 잃었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멈추어 설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말 없이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나 역시 얼른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카르오 대공의 매서운 눈빛은 내 머릿속에 날카로운 칼처럼 선명하게 새겨진 뒤였다.

저 독사 같은 잔혹하고 싸늘한 보라색 눈이라면, 제 아들을 충분히 죽이고도 남을 것 같았다.

“괜찮아요?”

퍼뜩 정신을 차린 것은 나를 향한 걱정스러운 시선과 목소리를 느꼈을 때였다. 비로소 고개를 들자, 하나둘씩 흩어지고 있는 고용인들이 보였다.

문 앞에 서 있던 테오도르도, 그 옆에 있던 대공비인 것같은 여자도, 무서웠던 카르오 대공도 안으로 들어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괜찮아요.”

나는 클레어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중에 불려가서 혼날지도 몰라요. 거기서 고개를 들면 어떻게 해요!”

클레어는 발까지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내 생각엔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같았다.

고개를 들라는 명령을 내린 것은 카르오 대공이었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들 수 밖에 없는 시선으로 나를 쏘아본 것은 그였다.

“혹시 오르디 님에게 불려가게 되면, 일단 무조건 잘못했다고 비세요. 진짜, 완전, 최선을 다해서 반성했다고 하면 아주 조금, 덜 혼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클레어는 아주 진지하게 내게 충고를 해주고 있었다.

“제가 자주 불려가 봐서 알아요.”

자신의 경험담을 말이다.

“자주 불려가요?”

“제가 좀 덜렁이거든요. 열심히 하지만, 오르디 님 성에는 차지 않는 것 같아요.”

클레어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란히 걸으며 별채로 돌아가고 있었다.

“솔직히, 오르디 님은 너무 완벽주의자예요. 테이블보가 좀 비뚤 수도 있고, 창문에 먼지가 좀 붙어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그렇죠.”

“그리고 사람이 가끔 파란색과 초록색이 헷갈릴 수도 있고, 오렌지와 사과가 헷갈릴 수도 있잖아요.”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제가 잘못하긴 했지만, 스무살먹은 성인에게 반성문을 쓰게하라고 하는 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해요!”

“어? 클레어 씨, 스무 살이에요?”

“네. 올해 스무 살이 된, 어엿한 성인이랍니다! 여기선 다들 나이 많으신 분들이 많아서 여전히 애 취급이지만요.”

“알죠, 알죠! 나도 이제 어른인데!”

“마녀 씨가 그걸 어떻게…… 아, 이름이 뭐죠?”

“레나티스예요, 레나티스 그라티아. 저도 올해 스무 살이 되어서 잘 알죠. 이제 어엿한 성인인데, 다들 아직 어리게만 보는 게 뭔지 잘 알아요.”

“어엇? 그럼 우리는 동갑인 거네요?”

“그렇죠!”

“저기, 그럼…… 음…….”

클레어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멈춰서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힐끗힐끗 내 눈치를 보며, 입술만 달싹이는 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짐작이 갔다.

왜냐하면, 나도 그 말을 하고 싶었으니까.

“우리 친구 할까, 클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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