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14
테오도르가 200만 루나를 주고 간지, 일주일.
나는 점점 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테오도르가 방에서 나가고 나서 곧장 다시 눈물 받기를 시도했지만, 하루에 두 번은 무리였는지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내일 해보지, 뭐! 라고 가볍게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눈물이 나왔던 것은 딱 그날 하루뿐이었다. 그 뒤로는 전혀 소식이 없었다.
이게 다 테오도르 때문이었다.
월급을 받기도 전에 벌써 200만 루나나 모았으니, 나중에 여기를 그만둘 때쯤에는 아주 부자가 되어서 언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그저 웃음만 나왔다.
“큰일 났네.”
그렇게 속절없이 하루하루가 지났고, 이제 내가 비타하우스에 온 지 열흘이나 지났다.
즉, 테오도르의 광증을 가라앉힌 지도 열흘이나 지났다는 이야기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체액의 효과는 점점 옅어지고 있을 터였다.
“스기엔! 부탁이 있어!”
창가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스기엔이 눈에 들어온 순간, 좋은 생각이 났다.
분명히 예전에 저 문틈으로 스기엔이 내 방에 들어왔었지? 그 말은 다른 방에도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예를 들면 테오도르의 방 같은!
“점심.”
눈을 뜬 스기엔은 나를 보자마자 당연하다는 듯이 먹을 것을 달라고 말했다. 늘어지게 하품까지 하면서. 그야말로 슬라임팔자가 상팔자였다.
“여기!”
주머니에 고이 넣어 온 당근을 내밀었다. 오늘 아침에 클레어와 함께 뽑은 싱싱한 당근이었다.
“지금 나더러 이걸 먹으라고?”
“왜? 당근은 싫어?”
“당근은 맛이 없어.”
스기엔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나는 그걸 이해할 수 없었다.
“당근이 왜? 아삭아삭하고, 은근히 달고, 맛있잖아?”
“아삭? 달달? 장난해?”
스기엔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먹기도 전에 비위 상하는 흙냄새가 나는 데다가, 생으로 먹으면 딱딱하고, 익혀서 먹으면 흐물흐물하잖아! 거기다 묘하게 들큼한 맛까지 난단 말이야!”
“오! 스기엔 냄새도 맡을 수 있어?”
“당연하지!”
“코도 없는데?”
“누가 코가 없어! 누가! 여기 있잖아!”
아니. 그렇게 들이대도 없어……. 콧대도 없고, 콧구멍도 없는데 어디가 코라는 거야?
역시 언젠가 몬스터대백과사전을 한번 봐야 할 것 같았다. 적어도 우리 반려 몬스터의 구조 정도는 알아야지.
“그럼 뭐가 좋아? 오이?”
“그건 비린내가 나잖아!”
“오이는 생선이 아니고 채소인데 무슨 비린내가 나?”
“오이는 나! 그래서 싫다고!”
스기엔은 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최 이해할 수가 없네. 채소에서 무슨 비린내가 난다고 그러는 거지? 오이도 맛있기만 한데.
“아! 그럼 이건 어때?”
나는 서랍을 열고, 손수건에 싸인 앵두를 꺼냈다. 정원의 어딘가에서 발견한 것이었다.
별로 양이 많지 않아서 나중에 스기엔이랑 같이 간식으로 먹으려던 것이었지만, 당근도 싫고, 오이도 싫다니까 지금 줘야 할 것 같았다.
“뭐, 그건 괜찮아.”
입으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몸은 이미 통통 튀어서 내 앞에 바싹 다가와 있는 걸 봐선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후훗- 역시 몸은 솔직하다니깐?
“이거 다 먹고 나서 내 부탁 좀 들어줄래?”
“싫어.”
“무슨 부탁인지도 안 들어보고?”
“응.”
단 1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스기엔은 거절했다. 내가 준 앵두를 옴뇸뇸 맛있게 먹으면서.
“어려운 부탁도 아니고, 쉬운 건데.”
“귀찮아.”
“그냥 누가 잘 있는지 좀만 봐주면 되는 건데.”
“싫다고.”
“먼데도 아니야. 여기 저택 안에 있는 사람이야.”
“싫어.”
“내가 맛있는 앵두도 줬잖아. 제발 부탁 좀 들어주면 안 돼?”
“안돼.”
스기엔은 마지막 앵두를 입에 넣은 채, 내 마지막 부탁을 거절했다.
“그래……. 싫다는데 어쩔 수 없지…….”
스기엔이 너무 강경하게 대답하는 바람에 더 조를 수는 없었다. 나도 누가 나한테 하기 싫은 일을 시키면 싫을 테니까.
다른 방법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내가 테오도르의 방에 가서 엿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 테오도르의 상태를 확인한다면 아직 아무 일이 없다고 안심을 하든지, 올 것이 왔구나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든지 할 텐데 말이다.
“하아…….”
한숨이 저절로 나오고, 어깨는 아래로 축 처졌다.
스기엔이 앵두를 다 먹고 난 손수건을 다시 접기 시작했지만, 그다지 의욕은 없었다. 기운없는 손가락을 겨우겨우 느릿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 누군데?”
“응?”
“누굴 보고 오면 되냐고.”
“보고 와줄 거야?”
스기엔의 말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슬쩍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스기엔이 보였다.
“아, 누구냐고.”
“테오도르 님 방에 가서 잘 있는지, 혹시 뭔가 변신을 하려는 조짐은 없는지 한번 봐줘! 눈이 빨개진다거나, 손톱이 길어진다거나 하는 걸 보면 돼!”
혹여나 스기엔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서 나는 얼른 소리쳤다.
“그게 누군데?”
“이 집 주인.”
스기엔은 여전히 그게 누구냐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슬라임에게는 소유권의 개념이 없나?
“검정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을 한 남자! 나이는 이십 대 초반이나 중반쯤이고…… 어…… 잘생겼어!”
급한 나머지 대충 설명하긴 했지만, 제법 잘 설명했다 싶었다.
자고로 주인공의 머리와 눈동자 색은 그 세계관에서 그리 흔하지 않은 것으로 설정하는 편이었다.
이 소설에서는 남주의 보라색 눈이 그랬고, 여주의 분홍색 머리카락이 그랬다.
그러니 이 저택에 젊은 흑발에 자안은 테오도르밖에 없을 터였다. 거기다가 테오도르는 특출나게 잘생겼으니까!
“아~ 걔?”
나의 훌륭한 설명에 힘입어 스기엔은 단박에 테오도르가 누군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잘 다녀와!”
통통 튀어서 문밖을 나가는 스기엔의 뒤통수, 아니면 뒤 몸체에 대고 인사했다.
“스기엔, 잘하고 와! 파이팅!”
.
.
.
“자고 있던데?”
“잔다고?”
스기엔의 말에 나는 밖을 쳐다보았다. 지금은 환한 낮이었다.
전생의 나는 <카르오의 인형>을 읽으면서, 대체 이 남주는 어떻게 밤마다 잠도 안 자고 그 짓만 하는데, 본인 뿐만 아니라 그 분신까지 늘 쌩쌩한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 비법이 바로 낮잠인 모양이었다.
그래. 어떻게 사람이 안잘 수가 있겠어? 낮에 자니까 밤에 그렇게 쌩쌩한 거지. 아니지. 사실은 반대인가? 밤에 잠을 안 자니, 낮에 자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19금 남주는 사실 2교대 야간직이었던 거다. 부디 비타민D가 부족하지는 않아야 할 텐데…….
“테오도르 님의 눈 색깔이 어땠어? 보라색이었어? 아니면, 빨갰어? 혹시 빨개지려는 조짐이라도 있었어?”
“자고 있었다니까? 눈동자는 못 봤지.”
아, 맞다. 낮잠 중이라고 했지?
“그럼, 이는 어땠어? 송곳니가 막 뾰족하지는 않았어?”
“입 다물고 자고 있었어.”
과연! 남주는 자면서도 잘생겨야 하니까 입을 벌리고 자지 않는구나? 아, 아니. 지금 그걸 감탄할 때가 아니잖아!
눈동자도 안 보이고, 송곳니도 안 보이면, 어디를 확인해야 테오도르가 지금 제정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아! 손톱!”
나는 지하 감옥에서 보았던 광증의 테오도르가 길고 날카로운 손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손톱은 어땠어? 길어졌다거나, 뾰족하다거나, 그렇지는 않았어?”
“그냥 평범한 인간의 손톱이었어.”
스기엔은 침대에 튀어 오르며 대답해주었다. 매우 피곤한 일을 했으니, 이제 쉬어야겠다는 태도였다.
“그랬구나. 다행이다!”
나 역시 테오도르가 정상이라는 대답을 듣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몸에서 기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노곤한 몸으로 휘청거리며 침대에 다가가 스기엔의 옆에 풀썩 쓰러지듯 누웠다.
“뭐가 다행인데?”
“테오도르 님이 정상이라서.”
“흐응~.”
스기엔은 내 대답에 콧바람 소리를 냈다.
어? 콧바람 소리? 그럼 진짜 코가 있는 건가?
“그 수컷을 신경 쓰고 있는 거야? 뭐 하고 있는지 그렇게 궁금해하고, 잘 있다고 하니까 좋아하는 걸 보면?”
“그런 것 아니야.”
“뭐가 아닌데? 뭐 하고 있는지 궁금했던 것 아니야?”
“그렇긴 한데.”
“정상이라고 좋아하는 것 아니야?”
“그것도 맞긴 맞는데.”
“그 수컷을 신경 쓰고 있는 거잖아.”
“아니, 신경 쓰고 있는 것도 맞긴 맞는데.”
“그럼, 내 말이 다 맞네.”
그래, 스기엔의 말이 다 맞긴 하다. 그런데 그 콧바람의 미묘한 뉘앙스와 같은 의미로 맞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어쨌든 아니야. 그리고 테오도르 님한테 수컷이라고 하면 안 돼.”
“암컷이었어?”
스기엔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아니. 사람한테는 수컷이라고 안 하거든. 남자나 남성이라고 하지.”
대공가의 후계자인 테오도르를 ‘수컷’ 같은 단어로 부르다가는 네가 몬스터 토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괜히 겁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렇군. 그럼 난 남성 슬라임이 되는 건가?”
“앗! 역시! 스기엔은 남자였구나?”
“당연하지! 내 어디가 암컷으로 보여?”
몸이 분홍색인 부분이…… 라고 하면 너무 성차별적인 발언이겠지?
“어휴! 당연히 그렇게 안 보이지. 이렇게 멋지고 늠름한 슬라임은 처음 봤는걸?”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내가 본 슬라임은 스기엔밖에 없으니까, 스기엔이 내가 본 슬라임 중에서는 제일 멋지고 늠름했다. 동시에 제일 귀여웠고!
“우리 스기엔이 제일 멋지고, 훌륭한 슬라임이야. 우주 최강 슬라임이야! 멋있다! 훌륭하다! 최고, 최고!”
“흥! 역시 너는 보는 눈이 좀 있는 인간이로군.”
우쭐대는 스기엔은 귀여웠다. 내 품에 꼭 안고 자고 싶을 만큼.
“우리도 낮잠이나 잘까, 스기엔?”
긴장도 풀어졌고, 딱히 할 일도 없었다. 거기다가 걱정거리도 없으니, 꿀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쪽 팔을 벌리자 스기엔이 통통거리며 내 팔 쪽으로 다가왔다. 덕분에 침대가 살짝 흔들리며, 가벼운 진동이 느껴졌다.
내 팔을 베고 눕는 스기엔을 확인하고, 눈을 감았다. 기분 좋은 낮잠이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