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12
고개를 돌리자 어디서 나타난 건지 불퉁한 표정의 스기엔이 침대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 점심은 뭐야?”
갑자기 나타나서, 당연한 듯이 밥을 내놓으라니! 거기다가 배가 고파서인지 살짝 불퉁한 눈에 빵빵하게 부풀린 저 볼!
세상에! 뭐 저런 건방진 슬라임이 다 있담?
“오늘은 사과를 준비했어.”
하지만 건방진 모습도 귀여워서 집사는 냉큼 식사를 대령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
“그렇게 안 먹여 줘도 된다고.”
라고 말하면서도 스기엔은 고분고분 입을 벌렸고, 나는 작게 자른 사과를 그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그러면 스기엔은 말랑한 몸을 움직이며 사과를 먹었다.
스기엔이 달콤한 과일을 좋아하는 게 참 다행이었다.
혹시나 마족이라며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를 선호한다거나, 파리나 귀뚜라미 같은 것을 좋아한다면 참으로 난감했을 거다.
스기엔이 사과를 먹느라 정신이 없는 틈을 타서 슬쩍 몸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살짝 촉촉하면서도 말랑한 표면이 그야말로 손에 착 달라붙었다.
살짝 손가락을 구부리자 탱글탱글한 촉감이 손가락 가득 느껴졌다.
내가 제 몸을 만지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스기엔이 슬쩍 눈을 돌리려고 했지만, 얼른 다른 한 손으로 사과를 입에 넣어주자 날름 받아먹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 반응을 사과를 주니 약간의 만짐정도는 허락해주겠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고마워, 스기엔.
새콤달콤한 사과 향이 은은하게 코끝을 맴돌고, 손에는 촉촉하고 말캉한 촉감이 가득했다.
그야말로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조금 전까지 끙끙거리며 고민했던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작게 조각난 사과를 입에 더 넣어주자 스기엔은 맛있게 오물거렸다. 투명한 그의 몸체로 사과 조각들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그것마저도 마치 하늘에 동동 떠 있는 구름처럼 보여 내 입에서는 저절로 미소가 감돌았다.
‘이런 게 바로 힐링이지!’
조급했던 마음이 느슨하게 풀어지자,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진 게 느껴졌다. 더불어 좀 더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나갈 마음의 여유까지도 생겼다.
좋아! 다시 고민해보자!
아, 스기엔에게도 한번 물어볼까?
“있잖아. 스기엔. 혹시 누가 너한테 땀을 먹인다면 어쩔래?”
“사과 맛 떨어지게 무슨 이상한 소리야?”
기분 좋은 표정으로 사과를 씹던 스기엔은 즉각 동작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너 혹시 사과에……?”
“아니야! 이건 깨끗하게 씻은 사과야.”
스기엔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자 나는 즉각 부정했다.
“그냥 만약을 물어본 거야. 만약에, 누가, 너한테 땀을 먹이면 어쩔 거냐고.”
“죽일 거야.”
역시나. 땀은 안되는 모양이었다.
슬라임의 의견이기는 했지만, 사람이라도 그리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나만 해도 누군가의 땀은 먹고 싶지 않은걸.
피는 내가 아파서 안 되겠고, 땀은 먹이기 좀 그렇고. 그럼 남은 체액에는 뭐가 있지?
“저기 그럼, 눈물은 어때?”
“그따위 걸 왜 먹어? 맛있는 사과도 있는데.”
내 질문에 스기엔은 인상을 팍 찌푸렸다.
“그러니까 만약에 꼭 먹어야 한다면 말이야. 땀과 눈물 중에 뭘 먹을 거야?”
“안 먹어.”
“먹어야 한다니깐? 안 먹으면 죽어.”
“죽는 게 아니라, 내가 죽일 거야.”
스기엔은 매우 매서운 눈을 하고 제법 비열한 표정으로 훗! 하고 웃었다. 까다로운 적을 마주한 암살자처럼.
하지만 분홍색 오동통한 몸으로는 그런 표정을 해봤자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마치 위협적으로 날개를 퍼덕이며 무섭게 적을 위협하는 뱁새처럼.
“꺄하하항~ 스기엔! 너무 귀엽다!”
나는 참지 못하고 스기엔을 와락 껴안고 말았다.
꺅! 이 말랑한 촉감! 너무 좋잖아!
“뭐, 뭐 하는 짓이야! 사과가 목에 걸리겠어!”
스기엔은 버럭 화를 내며, 뿅~! 하고 내 팔에서 튀어 나갔다.
“네가 목이 어딨어?”
“왜 없어! 여기 있잖아!”
스기엔은 바로 여기가 목이니 똑똑히 보라는 듯이 제 몸을 살짝 세로로 늘렸지만, 내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말랑 푸딩 같은 하나의 덩어리뿐이었다.
대체 어디가 목인 건데?
나중에 시간이 나면, 이 저택 어딘가에 있다는 서재에 가서 몬스터대백과사전 같은 것이라도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책이 만약에 있다면 말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우리 귀여운 스기엔이랑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아야지!
“너 때문에 사과를 못 먹겠네.”
“이미 다 먹어 놓고선?”
사과가 있던 접시는 이미 말끔하게 비워진 상태였다.
“아직 씹고 있거든?”
“아, 그랬어?”
“그래. 조용한 곳에서 혼자 사과의 맛을 음미해야겠어.”
“앗! 저기! 스기엔 아직 내 말 좀……!”
이미 늦었다. 스기엔은 통통 튀어서 창문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다른 체액도 좀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래도 눈물은 죽이겠다고는 하지 않았지?”
그래. 내가 생각해도 땀과 눈물 중에는 눈물이 나았다. 로맨스 소설의 슬픈 장면에서도 종종 눈물을 핥는 장면이 나왔다.
그러니까 적어도 눈물은 땀처럼 더러운 느낌은 아니었다.
“좋아! 그럼 눈물로 하자.”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뭔가 눈물을 담을 만한 것이 없나?
“아!”
집에서 챙겨온 물통이 떠올랐다. 비타하우스까지 오는 동안에 마차에서 잘 썼었지. 눈물도 물이니 거기다가 담아두면 될 것 같았다.
선반에서 물통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물병의 입구를 내 눈 바로 밑에다가 가져다 대었다. 이제 울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좋아! 도전!!
“흐아아아아앙~~!!”
입을 크게 벌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저절로 눈이 감기고 앞이 깜깜해졌다.
“흐어어어엉~~!!”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크게 내뱉으며, 단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음을 끌어올렸다.
“으어어어엉~~!!”
.
.
.
“아, 목 아파.”
그렇게 목청껏 울었건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목만 아플 뿐이었다.
헛기침이 켁켁나와 나도 모르게 손에 든 물통을 입에 가져갈 뻔했다. 그래봤자 빈 물통이었지만.
눈물을 받으려던 물통은 그저 바싹 말라 있었다. 내 눈알도 이렇게 바싹 말라 있겠지.
이제까지 몰랐는데, 나는 안구건조증인 모양이었다.
“역시 땀을 먹여야 하나?”
땀이야 밖을 몇 바퀴 뛰면 금방 나올 터였다. 거기다가 땀구멍은 눈구멍보다 훨씬 개수가 많으니까 더 많이 나올 테고. 그게 훨씬 쉬운 길이었다.
‘하지만…….’
테오도르를 생각하면 차마 그 쉬운 길을 택할 수가 없었다.
일단 나한테 돈을 주는 사람의 뒤통수를 치는 건 아주 못된 짓이었다.
거기다 항상 깨끗하고, 신선하며, 위생적인 것만 드시는 귀한 도련님일 텐데, 내 땀 같은 이상한 걸 먹였다가 배탈이라도 난다면 분명 또 며칠 동안 멀건 수프만 나올 텐데 그것도 안 될 말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하 감옥에서 보았던, 어쩐지 불쌍하고 가여운 아이 같았던 테오도르를 생각하면 더욱 그런 짓을 하기가 미안해졌다.
“그래. 조금만 더 해보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나는 물통을 꼭 쥐었다. 아무래도 거짓 울음으로는 눈물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방법을 달리해야 했다.
좋아. 그럼, 슬픈 생각을 해보는 거야.
슬픈 생각……. 슬픈 생각……. 뭐가 있지? 최근에 슬펐던 일…….
어제 점심때 푸딩이 남았었다. 그거 진짜 맛있어 보였는데, 나 같은 하녀에게까지는 돌아올 몫이 없었다.
멀리서 푸딩을 바라만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었다.
그 순간 나는 정말 슬펐다. 정말 맛있어 보였는데……. 꼭 스기엔처럼 말랑말랑했었어. 그러고 보니 스기엔은 무슨 맛이 날까? 꼭 딸기 푸딩이나 복숭아 젤리 같은 맛이 날 것같이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그런 맛은 아니겠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스기엔한테 한 입만 먹어보면 안 되냐고 물어봐도 될까? 아니. 안될 거 같다.
분명히 날 죽이겠다고 할 거야. 나 같아도 누가 내 엉덩이 한 입만 깨물어봐도 되냐고 물어보면 죽이겠다고 대답할 테니까.
아, 아니, 잠깐! 지금 슬픈 생각하는 중이었잖아!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레나티스. 집중하라고!’
그래.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지금 눈물을 흘리지 못하면, 나중에 테오도르에게 물려서 피눈물을 흘려야 한다고!
“슬픈 생각이 뭐가 있지? 슬픈 생각……. 슬픈 생각……. ……언니.”
내게 슬픈 생각이 뭐가 있지를 생각하다, 문득 떠오른 것은 언니였다.
“아스텔라 언니…….”
언제나 내 옆에 있었지만, 지금은 내 옆에 없는,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잘 도망갔을까? 내가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괜히 집 근처에 되돌아왔다가 아빠한테 붙잡히지는 않았겠지?
에뮬 오빠는 언니한테 잘해주고 있을까? 제발 그래야 할 텐데…….
언니는 지금쯤 내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에뮬 오빠와 행복해서 나는 벌써 잊었을까?
아스텔라 언니가 보고 싶었다.
“언니…….”
내 귀에 들리는 내 목소리가 살짝 울먹거리고 있었다. 아스텔라 언니를 떠올리자 어느새 코끝이 시큰해졌고, 눈앞도 막 희뿌옇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방안의 모습들이 점점 흐려졌다.
드디어 눈물이 나오고 있었다.
지금 물통을 잡아서 눈 밑에 가져다 대야 하는 건지, 그러다가 감정이 깨어져서 눈물이 다시 쏙 들어가 버리면 어쩌나 하며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이봐.”
내 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뜻밖에 사람이 방문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