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11
테오도르는 한 잔의 차와 함께 오르디로부터 자신이 기억이 없었던 동안 미뤄두었던 보고를 들었다. 사실, 별 내용은 없었다.
그는 아직 후계자였다. 제 선에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었다.
“대화를 나누며 레나티스 그라티아 양의 상태를 살펴보았는데, 별다른 이상은 없어 보였습니다. 그…… 물린 상처를 제외하면요.”
그리고 오르디 역시 후계자였다.
테오도르가 카르오 대공의 뒤를 이어 카르오 대공이 될 예정이듯, 그 역시 자신의 아버지 뒤를 이어 카르오 대공가의 집사가 될 예정이었다.
둘의 차이점이라면, 오르디는 아버지의 뒤를 잇는 일을 매우 자랑스러워했으며, 매우 열성적이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굉장한 식욕을 보이는 걸 봐선, 매우 건강한 듯 보였습니다. 의사 역시 그렇게 말했었고요.”
“그렇군.”
테오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나티스가 너무 건강한 것에 여전히 의문이 남았지만, 당장은 그 의문을 풀 방법이 없었다.
‘좀 더 지켜보는 수밖에.’
“내일부터 리타 아주머니께 차 시중드는 법을 배울 예정입니다. 그리고 이전에 말씀드린대로 테오도르 님의 차시중을 들게 될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아이가 평범한 하녀라고 여겨야할테니까요.”
“분홍머리 하녀를 퍽도 평범하게 여기겠군.”
“그건 그냥 미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인스트 님께서도 그러셨지 않습니까?”
테오도르는 저주받은 핏줄이니, 마녀니 하는 이야기에 비웃음을 띠던 자신의 호위무사를 떠올렸다.
자신이 변했을 때, 놀란 표정으로 그대로 굳어버린 그 역시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인스트는 태도를 바꾸었다.
“어떤 모습이시든, 제가 충성을 맹세한 카르오의 후계자이십니다.”
그는 붉은 눈의 괴물에게서 자신의 충성을 거두지 않았다.
“어쨌든, 레나티스 양에게 필요한 물품을 지급하였고, 내일부터 정식으로 근무하게 될 예정입니다.”
“좀 더 쉬는 게 낫지 않나? 팔도 다 낫지 않았다며.”
“차 시중은 그리 힘든 일은 아니니까요. 당분간은 배우기만 할거고요. 말씀드렸다시피 남들 눈에 평범한 하녀로 보이는 것이 중요하니, 바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아이가 건강체질이라서 참 다행이죠.”
그저 건강하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듯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테오도르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 테오도르의 의향을 알아차린 오르디는 좀 더 상세하게 레나티스의 상태와 조금 전에 나눈 대화를 그에게 보고했다.
“……해서, 그 옷을 그냥 두기는 하였습니다만, 역시나 그런 옷을 입고 다닌다면 카르오 대공가의 품위가 저하될까 걱정이 되긴 합니다. 어쨌든 눈에 띄는 머리니, 카르오 대공가의 하녀라는 것은 금방 소문날 테니까요. 아, 물론 레나티스 양에게 입막음은 단단히 해두었습니다.”
“어떻게?”
“고용 계약서에 자신이 실제로 하는 일에 대해서나 테오도르 님의 신변에 대한 부분을 발설하게 될 시, 계약은 즉시 파기되며, 받은 급여의 다섯 배를 배상하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걸 순순히 수긍하던가?”
“네.”
테오도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분명 독소조항이었다.
그저 말 한마디 했다고 계약 파기에, 계약금도 아닌 자신이 일해서 받은 급여의 다섯 배를 물어내야 한다니.
그의 생각에 레나티스는 둘 중 하나였다. 그것이 독소조항이라는 것을 모르는 멍청이던가, 어디에도 말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던가.
‘전자?’
붉은 눈의 토끼니, 테오도르에게 귀엽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던 레나티스를 떠올리며 테오도르는 생각했다.
‘아니면, 후자?’
흐릿한 기억의 파편 속에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레나티스의 얼굴을 생각하면 후자인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 얼굴이 진실한 기억인지,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난 환상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기억의 왜곡인지 테오도르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그 순간은 마치 꿈에서 막 깨어난 아이가 마주한 존재가 꿈속의 천사인지 현실의 엄마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찰나와 비슷했다.
그리고 그것을 또렷이 보려는 순간, 테오도르는 다시 꿈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같은 꿈이었지만, 레나티스를 본 이전과 이후는 확연히 달랐다.
이전은 괴물의 뱃속과 같은 검은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꿈이었다면, 두 번째 꿈은 마치 따뜻하고 아늑한 어머니의 품에서 잠이 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웃기는 일이지.’
테오도르는 그렇게 느낀 자신을 비웃었다. 자신은 한 번도 어머니의 품을 따뜻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아니, 그녀에게 안겨보기나 했는지 궁금했다. 적어도 자신이 기억하는 한은 없었다.
그러니 어머니의 품이 따뜻한지 차가운지도 모르는 주제에, 막연히 그렇다고 느낀 자신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집 형편이 어려워 보였나?”
테오도르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어머니를 지워내며, 오르디에게 물었다.
세 번째 가능성이라면, 그런 것을 따질 처지가 아닐만큼 사정이 급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집은 마을에서 외떨어져 있었고, 오래되어 보이더군요. 가구나 가재도구를 봐서도 분명 넉넉해 보이지는 않았고요.”
오르디는 레나티스의 집에서 보았던 때운 흔적이 많아 보였던 솥, 그리고 이가 빠져 있던 그릇과 컵을 떠올리며 말했다.
테오도르의 앞이라 돌려 말한 것이지, 레나티스의 집은 대놓고 가난한 것이 분명했다.
“가족은 아버지가 있는 것 같았는데, 아마도 주정뱅이나 망나니 쪽인 듯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소리치는 걸 들어선 어머니는 없고, 언니나 여동생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같았다는 건 뭐지?”
“아버지도, 자매도 직접 본 것은 아니어서요. 아버지는 문 너머로 소리치는 것만 들었고, 자매는 아예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군.”
테오도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레나티스가 다 떨어진 옷을 소중한 물건이라고 말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제 기억에 의하면, 그 옷을 망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옷에 난 구멍은 테오도르가 낸 것이었고, 레나티스를 피 흘리게 한 것도 자신이었으며, 그녀가 지혈을 위해 치마를 찢은 것도 결국은 자신이 그녀를 물었기 때문이었다.
“…….”
테오도르의 마음에 자꾸만 레나티스가 걸렸다.
* * *
내가 비타하우스에 온 지도 어느덧 사흘이 지났다. 그리고 내린 결론.
‘세상에 이런 일은 없었다. 이것은 꿀 직장인가, 설탕 직장인가!’
나는 이곳의 하녀지만, 하녀가 아니었다.
나의 시크릿 주업무는 테오도르의 진정제였다. 고로, 테오도르가 미치지 않으면, 나는 할 일이 없었다.
얼마 전에 광증을 발현한 테오도르는 현재 잠잠했다.
나의 표면적인 업무인 테오도르의 차 시중드는 법을 알려는 리타 아주머니는 친절한 성격은 아닌 듯했지만, 무서운 사람도 아니었다.
딱 필요한 만큼의 말로 내게 차를 끓이는 법을 알려주셨고, 내가 그녀의 지시대로 잘하지 못하면 딱 적당한 만큼만 화를 내셨다.
그나마도 리타 아주머니가 바빴기 때문에, 하루에 두시간정도만 일을 배웠을 뿐이었다.
나머지 시간은 컨디션 조절이라는 이름 하의 휴식 시간이었다.
배부르게 하루 세끼를 푸짐하게 먹고, 두 시간 정도 일하면, 나머지는 자유시간이라니!
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자거나, 스기엔과 쓸데없는 대화를 하거나, 멍하니 예쁜 정원의 나비와 꽃을 쳐다보고만 있어도 시간은 잘 갔다.
애초에 부지런해서 쉴 새 없이 할 일을 찾아다니던 언니와는 달리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게으름뱅이였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생활은 내 적성과 특기를 살린 최고의 직장이었다. 다만 문제는…….
“테오도르는 언제 다시 변하게 될까?”
내 특기가 채액을 이용한 치료라는 것에 있었다.
나의 이 뒹굴뒹굴 해피라이프는 시한부 평화였다.
테오도르의 광기가 발현되는 순간, 나는 바로 그의 방으로 달려가야 했다. 그리고 고이 내 팔을 내어주어야 할 것이다.
“아픈 건 싫은데.”
소매를 걷자, 이제 딱지가 앉은 상처가 보였다. 지금은 아프지 않았지만, 물린 그 순간의 아픔은 지금도 생생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아팠던 순간 탑3을 꼽자면, 그 안에 들어갈 게 분명했다.
아무리 그래봤자, 부동의 1위는 아버지가 던진 의자를 손으로 막다가 팔이 부러진 것이었지만. 그때는 진짜 아파서 죽는 줄 알았다.
퉁퉁 부어오르고, 이상한 곳에서 꺾인 팔을 붙들고 아스텔라 언니랑 함께 엉엉 울었었지.
생각해보니, 그것도 오른팔이었다. 아무래도 오른손잡이라서 내가 오른팔을 내미는 걸까?
“이번에는 왼팔을 물어 달라고 해야 하나?”
혼자 중얼거리며 다른 쪽 팔을 쳐다보았지만, 의미 없는 짓이었다. 오른팔이든 왼팔이든 다 내 팔이었고, 아픈 건 매한가지였다.
아픈 건 싫은데……. 뭐 다른 방법 없을까?
카르오 가문이 뱀파이어의 혈족인 것은 아니었으니, 꼭 피가 아니어도 되었다. 원작의 포인트도 체액 흡수였으니까 말이다.
“확실히, 원작에서도 뒤로 갈수록 여주가 피 보는 횟수는 줄었었지. 도망가려다가 잡혔을 때 빼고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중반부 이후부터는 여주도 아픔만 느끼는 게 아니라 점점 쾌락도 느끼기 시작했었다.
문제는 그런 걸 느끼는 자신에게 자괴감이 들어 그녀가 더욱 괴로워했다는 것에 있었다.
확실히 아픈 것보다 기분이 좋다면 그쪽이 더 나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방법은 좀 그렇지?”
애초에 그럴 리 없다는 확신으로 온 주제에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거기다가 테오도르가 그런 식의 방법으로 협조할 리가 없었다.
그도 딱 잘라서 말했잖아? 내가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말이다.
거기다가 나는 키 크고, 근육 빵빵하고, 나를 번쩍번쩍 들 수 있는 내 미래의 남편님을 위해서 순결을 아껴두겠다는 계획도 있었다.
그래! 현재의 아픔 때문에 미래의 남편을 배신할 수야 없지!
“그럼 피 말고…….”
“혼자 뭘 그렇게 중얼거리는 거야?”
불쑥, 목소리가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