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10
“제 편지 때문에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테오도르 님께 여쭤봤던 거예요. 그러니까 언제쯤 저를 찾으실지 라거나, 원래도 항상 어제 같은 상태인지 등등. 저는 아직 잘 모르니까요.”
이건 진짜였다. 귀족의 예법 같은 것에 맞지 않아 테오도르에게는 거슬리는 편지였을지 몰라도, 내 나름대로는 제법 열심히 쓴 편지였다.
어디서 주워들은 황송하다는 표현까지 동원한.
“흐음.”
테오도르의 코에서 콧바람이 흘러나오며 그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기분이 더 나빠진 건가 싶어서 힐끗 눈치를 보자, 오히려 아까보다 그의 기분은 나아 보였다.
“그런 건 나도 몰라. 증상은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고 들었으니까.”
“그런가요?”
그래. 만고의 진리이긴 하다. 사람 바이 사람. 케이스 바이 케이스.
“하지만 네가 제때 내게 체액을 공급해준다면, 어제처럼 증상이 심할 일은 없을 거야. 어제는…… 아마도 증상이 발현되고 꽤 시간이 지난 뒤였으니까.”
말을 하면서 테오도르가 살짝 뜸을 들이는 것이 느껴졌다.
두리뭉실한 단어 선택으로 봐서 첫 발현일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정확하게 모르는 것 같았다. 정말로 그는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군요. 며칠이나 그랬으면 엄청 힘드셨겠어요.”
내 말에 테오도르는 매우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 나한테 힘들었겠다고 말한 건가?”
“거기 엄청 춥고, 바닥도 딱딱한데다가 깜깜했잖아요. 며칠이나 먹고 자고 했으면 힘들었을 것 같아요.”
“괴물이 그런 걸 느낄 것 같아?”
“음…….”
매우 합당한 질문이었다. 미친 사람이 그런 걸 느끼는지는 정상인이 알 수 없었다. 테오도르 역시 지금은 정상인이고.
“네. 제가 봤을 땐, 테오도르 님은 그 안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셨던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쉬었던 목소리, 부러진 손톱, 생채기가 난 손, 그리고 하얗게 껍질이 일어났던 입술까지.
내가 본 어젯밤의 테오도르는 처음 본 내가 안쓰러운 마음을 느낄 만큼 그 감옥에서 힘겨운 나날들을 보낸 것으로 보였다.
“…….”
갑자기 테오도르가 말이 없어졌다. 그의 태도에서 나는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헉! 설마! 며칠이 아니라 몇 달이나 거기에 갇혀 있으셨던 거예요?”
“……몇 달이나 갇혀 있지는 않았어.”
“휴~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의 대답에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곳에서 몇 달을 갇혀 있었다면, 정상인이라도 광인이 될 것 같았다.
“뭐가 다행이라는 거지?”
“거기 계셨던 게 몇 달이 아니라 며칠이라는 거요?”
“어차피 기억도 없으니 며칠이든, 몇 달이든 상관없어.”
“기억은 안 나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힘드셨을 거잖아요. 전 하루 밖에 안 있었는데도 춥고, 무서웠는걸요. 아니, 집에 그런 지하 감옥은 왜 있는 거죠?”
“괴물을 가두려고.”
차갑게 내뱉은 테오도르의 말에 나는 흠칫했다.
그가 말하는 괴물이라는 것이 바로 테오도르 본인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그 감옥에 갇혔던 것도 바로 그였다.
시니컬한 미소, 매사에 빈정거리는 태도, 자기비하와 더불어 현실에 대한 화풀이까지.
‘광증이라는 게 사실은 사춘기였나?’
갑자기 새로운 이론이 떠올랐다.
보통 청소년기에 발현한다는 것도 그렇고, 충동적으로 된다는 것도 그렇고, 난폭하게 변한다는 것 역시 사춘기와 같은 증상 아니던가?
거기다가 지금의 테오도르는 손안에 흑염룡을 봉인하고 있다고 말해도 제법 그럴싸해 보일 것 같았다.
“농담이야. 혹시 전쟁이 났을 때 포로를 가두거나, 도둑이나 강도가 들면 잡아넣으려는 용도로 이런 저택에는 그 정도 지하 감옥은 다 설계되어 있어.”
굳어 있는 나를 보며 테오도르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친절한 설명도 덧붙여 주었다.
“그렇군요.”
집에 지하 감옥이 있는 게 기본이라니. 부자들의 사고방식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우리 집은 아니니까.
“저, 테오도르 님?”
“왜?”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는데요.”
“뭐지?”
사실, 이게 제일 중요한 질문이었다.
“밥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먹나요?”
* * *
“일단 표면적으로 너는 카르오 대공가의 하녀야. 하는 일은 테오도르 님의 차시중을 드는 거고.”
표면이 살짝 말라버린 빵을 씹으며, 나는 오르디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아쉽게도 점심시간을 이미 놓쳐버린 터라, 내가 먹을 수 있는 그 정도였다.
웃긴 건, 이 마른 빵이 언니가 갓 구워준 빵보다 더 맛있다는 사실이었다.
뽀얗게 흰 빵은 중간중간 밀 껍질이 씹히지도 않았고, 겉은 말랐지만 속은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귀족가의 하녀로 들어가면 배고플 걱정은 없다더니, 과연!
“저는 차 시중을 어떻게 드는지 모르는데요?”
“배우면 돼. 팔에 상처가 어느 정도 낫고 나면, 리타 아주머니께 차 시중 드는 법을 배우도록 해. 그리고 이건 네가 이 저택에서 입을 옷이야.”
“예쁘다아~.”
오르디가 건낸 옷을 받자마자, 나는 소리쳤다.
“이게, 예쁘다고?”
“네.”
“어디가?”
사실, 오르디가 준 옷은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메이드 복이었다. 그런 옷이 예쁘다고 하는 내가 이해되지 않는 듯, 오르디가 물었다.
“요기, 이렇게 레이스도 달려 있고, 소매와 목에는 예쁜 단추도 달려 있잖아요. 거기다가 제일 중요한 건 새 옷이잖아요! 새 옷 맞죠?”
“새 옷이긴 하다만…….”
오르디의 확인에 나는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그랬다.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새것!
나는 언니의 옷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언니의 옷은 마을의 누군가에게서 물려받은 옷이었다.
어쩌면, 그 역사가 300년쯤 될지도 모르는 옷을 나는 항상 입어야 했다.
새 옷이라고는 내 평생에 딱 두벌이었는데, 아주 옛날 엄마가 내가 태어나길 바라며 손수 만들었다는 아기 옷과 생일 소원권으로 언니가 시장에서 천을 사다가 만들어준 옷이었다.
아버지는 쓸데없는 곳에 돈을 썼다며 나와 언니를 걷어찼지만, 얻어맞으면서도 새 옷이 생겼다는 생각에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다음날, 멀쩡했던 나와는 달리 언니가 절뚝거리며 걷는 것을 보고 다시는 그런 소원을 빌지 않았지만.
나는 처음 만나는 테오도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바로 어제 그 옷을 입었었다. 내가 가진 것 중에서는 나름 제일 좋은 옷이었으니까.
그리고 잘 보이려 했던 상대방은 나를 보자마자 팔뚝을 물어뜯었다.
덕분에 옷은 소매에 구멍이 뚫리고, 핏자국이 군데군데 묻었으며, 치맛자락은 붕대 대신 쓰기 위해서 넝마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새 옷인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히 아주 예쁘고 귀한 옷이 될 수 있었다. 그 옷이 메이드 복이든 뭐든 말이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그럼 저건 내가 나가면서 버려주도록 하지. 아직 쓰레기를 어디다 버리는지 잘 모를 테니.”
오르디는 내가 어제 입었던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 안 돼요!”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그를 막았다.
“설마, 저걸 입겠다는 건 아니겠지?”
“입을 건데요.”
“이 저택에서 그런 옷을 입는 건 저택의 품위를 손상하는 일이야.”
“일할 때는 안 입을게요.”
“그걸 어떻게 입겠다는 거지?”
“잘~ 고쳐서 입어 볼게요.”
오르디는 미심쩍은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런 누더기를 어떻게 고쳐서 입겠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사실, 나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난 바느질에 젬병이었다. 뾰족한 바늘이 어디로 나올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고, 무섭기까지 했다.
내가 바늘에 찔려서 아파하면 언제나 언니가 웃으면서 바느질감을 가지고 가주었다.
“저한테는 소중한 옷이거든요.”
어떻게 바느질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버릴 수는 없었다.
언니가 내게 준 소중한 선물이니까.
“지금 네가 머무는 곳은, 카르오 대공가의 저택인 비타하우스의 별채야. 이 안에서는 자유롭게 다녀도 좋지만, 밖으로 나가선 안 돼. 혹시 나갈 일이 있거든, 꼭 내게 보고하도록.”
“왜요?”
“네가 저택 밖의 어딘가에 있을 때, 테오도르 님의 광증이 발병하면 안 되니까.”
오르디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나는 수도에 아는 사람도 없었고, 갈 곳도 없었다.
아! 그 유명하다는 신전의 시계탑과 아름답다는 광장 분수는 좀 보고 싶긴 했다.
“그리고 이전에도 말했지만, 절대로, 절대로, 테오도르 님의 병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돼.”
“네.”
“그리고 네가 어떻게 그 병을 치료하는지도.”
“네, 알겠습니다.”
병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면, 당연히 치료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을 것 같았지만, 어쨌든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혹시 질문있나?”
“네! 있어요!”
오르디의 말에 나는 힘차게 손을 들었다.
“뭐지?”
“저녁은 언제 먹나요?”
“……고용인들은 매일 저녁 7시에서 8시 사이가 식사 시간이야. 다른 질문이 있나?”
나는 이번에도 손을 번쩍 들었다. 오르디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혹시, 메뉴도 미리 알 수 있나요?”
“……그런 건 없어.”
오르디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다시 손을 번쩍 들었다.
이번에는 바로 말해보라는 말이나 행동 대신, 오르디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도 식사에 관한 질문인가?”
“헉! 어떻게 아셨어요?”
오르디의 놀라운 직관력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침은 언제 먹어요?”
놀라는 건 놀라는 거고, 알 건 알아야지 싶어 얼른 질문했다.
“아침은 오전 6시, 점심은 1시야. 메뉴는 미리 알 수 없어.”
대박! 그 다음 질문이 점심 시간인줄 어떻게 알았지?
오르디는 겉보기만큼이나 똑똑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