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09
“삐졌어?”
“…….”
아무래도 삐진 모양이었다. 스기엔은 말이 없었다.
거, 참. 슬라임을 슬라임이라고 말도 못 하느냐고.
“에이~ 삐지지 말고오~.”
스기엔의 삐짐을 풀어주기 위해서 나름대로 애교 섞인 목소리와 함께 그의 볼을 꾹 찔렀다.
“미쳤어? 지금 어딜 만지는 거야!”
“응? 내가 어딜 만졌는데?”
갑자기 스기엔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황한 나는 조금 전에 스기엔의 볼을 찔렀던 손가락을 얼른 접어서 오므렸다.
입 옆이면, 볼 아닌가?
“그걸 어떻게 내 입으로 말해?”
몸체를 붉히며 스기엔이 말하자, 나는 당황스러워서 내 손을 쳐다보았다.
뭔데? 나 어딜 만진 건데? 아, 아니다. 별로 알고 싶지 않다.
아무리 내가 19금 소설에서 살아가고 있기로서니, 몬스터의 은밀한 부위나 슬라임의 성감대 따위는 알고 싶지 않다고!
“그, 그건 됐고.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야?”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에 있는 괴상망측한 생각을 몰아낸 뒤, 스기엔에게 물었다.
“몰라. 그냥 나도 모르게 여기까지 왔어.”
“나도 모르게?”
이 동네는 기억상실이나 의식불명이 유행인가?
아까는 테오도르가 어젯밤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스기엔이 저도 모르게 여기까지 왔단다. 아무래도 이 커다란 집엔 수맥이 흐르나 보다.
“뭔가 달콤한 냄새가 났어.”
스기엔은 눈을 감더니 제 아랫몸체를 쭈욱 내밀었다. 코라고 내민 것인지, 턱이라고 내민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냄새를 따라왔더니, 여기였어.”
“달콤한 냄새?”
스기엔의 말에 코를 킁킁거려보지만, 특별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이불의 섬유 냄새나 약간 건조한 마른 먼지 냄새 같은 것이 났다.
그리고 내 상처에서 아주 약간의 피 냄새도 났다. 하지만 달콤한 냄새같은 것은 나지 않았다.
“달콤한 냄새는 안 나는데?”
“분명히 나.”
스기엔은 매우 단호했다. 어쩌면 슬라임은 후각이 예민한 것인지도 몰랐다. 코는 없는 것 같지만.
“너한테서 나는 것 같아.”
뿅~ 하고 스기엔이 한번 뛰어오르더니, 내 무릎 바로 앞에 착지했다.
“그래. 분명해. 너한테서 달콤한 냄새가 나.”
“나한테서?”
스기엔의 말에 팔을 들어 다시 킁킁 냄새를 맡아보지만, 여전히 별다른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내 냄새라서 나는 모르는 걸까?
“음……. 그냥 달콤하기만 한 게 아니야. 그것보다도 뭔가 오묘한 냄새야.”
내 쪽으로 좀 더 몸을 들이밀며 스기엔이 말했다. 덕분에 그의 몸체 어딘가가 내 무릎에 닿았다.
아까 자기 입으로는 거기가 무슨 부위인지 말 못 한다고 한 바로 그 부분이었다.
나는 순간, 이게 성추행이라면 대체 어디에 신고를 해야 하는 건가 고민했다. 게다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도.
아, 제가 말이죠. 슬라임에게 성추행을 당한 것 같은데요. 자기의 은밀한 부위를 제 무릎에 닿게 했거든요. 네? 은밀한 부위가 어디냐고요? 저도 잘 모르는 부위인데요.
됐다. 말을 말자. 저런 신고를 했다가는 정신병원행 응급마차를 타게 될 것 같다.
“뭔가, 뭔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냄새인 건 확실해!”
“나한테서 그런 냄새가 난단 말이지?”
“그래.”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테오도르도 그 비슷한 말을 했었다. 단 냄새가 난다고 했던가?
너무 긴장되고 겁을 먹은 상황이라서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지만, 무슨 냄새가 난다며 중얼거린 뒤에 나를 향해서 다가왔었다.
나한테서 무슨 냄새가 나긴 나는 모양이었다. 사람은 모르지만, 사람이 아닌 것들만이 맡을 수 있는.
‘그래서 마녀인 걸까?’
얼굴 근처에서 아른거리는 분홍의 머리카락을 보며 생각했다.
모름지기 작가라는 인간들은 글을 쓰는 것보다 설정이나 세계관을 짜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놓고는 글을 안 쓰거나, 글은 쓰지만 짜놓은 설정을 활용하지 않거나, 그냥 잊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러니 분홍 머리 마녀에게서 달콤한 냄새가 난다는 설정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런 건 하나도 필요 없는 기떡떡떡의 19금 피폐물에 그런 설정을 왜 넣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이유로 나는 앞으로 네 옆에 있을 거야.”
“뭐?”
“너한테서 좋은 냄새가 나니까. 이 냄새를 계속 맡고 싶단 말이야.”
스기엔은 당당했고, 나는 황당했다.
“나더러 널 키우라는 거야?”
“키우긴 뭘 키워! 내가 무슨 반려동물인 줄 알아? 나는 위대하신 고위 마족 스기엔 님이시다!”
“그러니까 나더러 위대하신 고위 마족 스기엔 님을 키우라는 거야?”
“나는 키움 당하지 않는다! 그저 네 옆에 있겠다는 거다!”
“그래. 그럼 내가 널 키우지는 않는데, 나더러 널 먹이고, 입히고, 재우라는 거잖아?”
“그래!”
그러니까, 반려동물도 아니고, 내가 키우는 것도 아닌데, 이 슬라임을 먹이고 입히고 내방에서 재워야 한다는 거지? 그게 대체 말이 돼?
“좋아!”
응. 된다. 왜냐하면 스기엔은 귀여우니까!
몸이 말랑말랑 푸딩같이 귀엽잖아! 한입 앙~ 베어 물면 달콤할 것 같은 느낌이야. 거기다가 묘하게 건방진 말투도 귀엽고, 잘 삐져서 놀려먹는 맛도 있잖아!
귀여운 건 무조건 다 옳다고!
“좋았어, 인간!”
“좋았어, 슬라임!”
“슬라임 아니야! 이름을 부르라고!”
“나도 이름을 불러 줘. 이제 우리는…… 친구니까.”
반려 관계라는 말을 꿀꺽 삼키고, 내가 정의한 스기엔과 나의 관계는 친구였다.
“친구?”
“응.”
그것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반려동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종관계도 아니고, 가족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인이라고 하기에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단어는 그거였다. 친구.
거기다 종족을 뛰어넘는 우정이라니, 멋지지 않은가?
“흐, 흐흥! 감히 인간 주제에 그런 가당찮은 요구를 한다니, 간도 크구나. 너의 용기를 가상히 여겨 이 위대하신 스기엔 님과 친구가 되는 영광을 내리겠다.”
스기엔도 아주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 * *
“슬슬 배가 고픈데.”
몇 개 되지 않은 짐을 정리하고, 옷도 갈아입자, 시간은 벌써 점심때였다.
항상 언니가 차려주는 아침을 먹었었는데, 오늘은 아침을 걸렀더니 더 배가 고팠다.
“밥은 가져다주나? 아니면 내가 알아서 찾아 먹어야 하는 건가?”
소설에서는 중요한 장면만 나오니 이 저택에서 내가 어떻게 식사를 해결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테오도르가 보냈다며 의사가 방에 들러서 내 팔을 치료해주었고, 내 짐을 든 하인도 이 방에 다녀갔건만, 제일 중요한 먹을 것이 내 방으로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스기엔이라도 있었으면 슬쩍 바깥의 동향을 살펴봐 달라고 말할 텐데, 광합성을 좀 해야겠다며 그는 밖으로 나가버린 뒤였다.
가만, 그는 확실히 맞나? 목소리는 소년 같았지만, 어쩌면 아닐 수도 있었다. 나중에 스기엔이 돌아오면 그 부분부터 물어봐야겠다.
“아니, 무슨 일을 시키든지 밥은 줘야지! 거기다가 남의 피를 빨아먹었고, 앞으로도 먹을 거면서 더 든든하게 챙겨줘야 할 것 아니야.”
배고픔에 투덜거리는 중에 방문이 노크도 없이 벌컥 열렸다.
“앗! 테오도르 님!”
나는 반가워서 소리쳤지만, 테오도르의 얼굴은 전혀 반가운 표정이 아니었다.
지금 테오도르의 표정은 ‘이 똥멍청이는 대체 뭐지?’라는 표정과 비슷했다.
“이 쪽지 네가 쓴 건가?”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종이 한 장을 내밀며 물었다.
“앗! 그 편지 제가 쓴 것 맞아요!”
아까 다녀갔던 의사에게 종이와 펜을 빌려서 쓰고, 내 짐을 가져다주었던 하인에게 테오도르에게 전해달라고 부탁을 했던 바로 그 편지였다.
“편지? 이게 편지라고?”
테오도르는 매우 가당찮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똑똑히 보라는 듯이 편지를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안녕하세요, 테오도르 님. ^-^
레나티스입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물어볼 것이 있어서요. O_<
혹시 테오도르 님께서는 언제부터 미치기 시작하셨을까요? 미치기 전에 어떤 증상이 나타나시나요? 예를 들어서 눈이 아프다던가, 이가 근질거린다던가? ㅇ0ㅇ
그리고 발작하시는 주기는 어떻게 되시나요? 저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해서요!
답변 꼭 부탁드립니다. >ㅁ<
“네. 제가 쓴 편지가 맞는데요.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감히, 내게, 언제부터 미쳤냐고 대놓고 물으면서 무슨 문제가 있냐고?”
아……. 대놓고 물어보면 안 되는 거였나?
“발작 주기? 내가 주기적으로 발작하는 미친 놈인 줄 아는 모양이지?”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테오도르는 약간, 음……. 미친놈 같았다.
“거기다, 문장 뒤에 있는 이 이상한 그림은 또 뭐지?”
거의 손가락으로 편지를 뚫어버릴 듯이 가리키며 테오도르는 물었다.
“웃는 건데요.”
“뭐?”
“여기 글자 옆에 있는 그림은 웃는 표시라고요.”
“편지가 웃는다고?”
테오도르가 되물어오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있어? 이게 웃는 표시라면, 마지막 것도 웃는 표시라는 건가?”
“오! 비슷해요!”
“…….”
“좋아서 꺄악~ 하는 표정이에요. 바로 이런!”
눈은 질끈 감고, 입은 양쪽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으며, 내 온 얼굴로 >ㅁ<을 표현했다.
“…….”
그리고 눈을 떴을 때, 테오도르는 참으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시선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