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08
‘도와주세요, 아버지.’
테오도르는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그 말을 하고 싶었다.
갑자기 돋아난 송곳니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몰라, 제 이가 제 살을 찢고, 흐르는 피를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것이었다.
비록, 제 아버지가 자신을 못마땅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한 번도 자신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한 적이 없는 사람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번에는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붉은 눈에 불안감을 가득 담은 채, 길쭉하게 돋아난 손톱 탓에 제 손 같지 않은 손을 파들파들 떨며, 테오도르는 받아본 적 없는 부정을 갈구했다.
먼저 이런 일을 겪은 그에게 해답을 바랐다. 괜찮을 것이라는 말을, 곧 지나갈 것이라는 말을 바랐다.
하지만 카르오 대공의 입에서는 결코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다.
“정신을 놓지 마라. 그리고 절대 마녀를 죽이면 안 돼.”
그것은 명령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따뜻한 조언이나 어른으로서의 충고가 아니라, 카르오 가문의 수장이 후계자에 하는 명령.
냉정한 목소리에서는 제 아들을 살인자로 만들지 않으려는 마음이나 마녀의 안위를 걱정하는 동정 따위는 한 톨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녀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네 형꼴을 봐서 잘 알 거다. 너도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않겠지?”
진짜 아들을 위하는 아버지였다면, 어린 나이에 형이 죽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 아들에게 그런 말을 했을 리 없었다.
심지어 그 아들이 죽은 형을 너무나 따랐고, 지금 그 형과 똑같이 눈이 붉게 변하고, 송곳니가 돋아나는 중이었다면 더욱 그랬다.
그는 오직 네 형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 마녀를 죽이지 말라는 경고를 해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당장 테오도르를 지하 감옥에 가두라는 명령을 내렸다.
비밀을 엄수할 아버지의 측근들 손에 이끌려 차디찬 지하로 끌려가면서 테오도르는 반항하지 않았다.
그저 붉은 눈으로 멍하니 제 아버지를 바라볼 뿐이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그저 같은 이름을 쓰고, 닮을 얼굴을 가졌을 뿐인 남자를 바라보며, 테오도르는 생각했다.
‘괴물이 되는 것보다야, 차라리…….’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그야말로 미칠 듯한 목마름과 고통이었다. 테오도르가 정신을 놓을 때까지.
“어찌나 눈물 나는 부정이었던지.”
테오도르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의식을 잃을 만큼 광증이 폭주했다면, 응당 마녀의 체액도 그만큼 많이 필요했다. 카르오 대공이 말한 최악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정신을 차린 테오도르가 제일 먼저 마녀의 생사를 물은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레나티스가 살아 있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은 쉬었지만, 분명 그녀의 꼴이 처참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직도 레나티스가 지하 감옥에 있다는 말에 화를 내며, 아직 몸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직접 그녀를 찾은 것이었다.
“너무 멀쩡해.”
테오도르의 걱정과는 달리, 레나티스는 너무나 멀쩡했다. 심지어 큰 소리를 낼 만큼 기운차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너무 멀쩡해서.
자신이 그녀를 해치지 않아서.
“후우…….”
테오도르는 레나티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긴장이 풀린 탓인지, 손이 다시 떨리고 있었다.
점점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이것이 끝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테오도르가 마지막으로 느낀 감정이었다.
이렇게 광기에 잡아 먹혀버린 채, 다시는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 생각했었다.
죽은 그의 형처럼.
아직 떨리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상처투성이이긴 했지만, 정상적인 사람의 손이 보였다. 손에 힘을 풀자, 꽉 쥐었던 주먹이 스르륵 풀렸다.
내친김에 손을 쫙 폈다. 그리고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사람 손의 형상이었고, 그가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졌다.
“…….”
다행이었다.
어쩌면, 아닐 수도 있지만.
* * *
“오!! 좋다아!!”
방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소리를 쳤다. 나 혼자 쓰게 될 방 하나가 우리 집보다 더 컸다.
게다가 몇 개 되지는 않았지만, 방 안에 있는 가구들이 원래 내 것보다 훨씬 좋았다.
“와! 침대도 좋다!”
이전의 내 침대보다 훨씬 푹신하고, 너무 많이 빨아서 끝부분이 헤졌던 내 이불과는 달리 거의 새것 같아 보이는 이불이 깔린 침대에 앉자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이 방과 침대만 보자면, 분명 나는 호강하고 있었다.
“언니는 잘 도망갔을까?”
원래대로라면 지금 이 방에 있을 사람은 언니였다.
밤새도록 남주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이 침대에 누워있었겠지. 지금쯤이면 주치의가 혀를 차며 진료를 보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잘 지내고 있어야 할 텐데.”
풀썩, 몸을 침대에 뉘자 더 언니 생각이 났다. 항상 좁은 침대에서 언니와 몸을 붙이고 잤었다.
어릴 때는 언니가 해주는 옛날이야기나 자장가를 들으면서 잠이 들었고, 커서는 일과나 내일의 할 일, 혹은 아주 먼 미래에 대한 상상을 나누다가 잠이 들었다.
눈을 감을 때 가장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도,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보는 사람도 항상 언니였다. 그리고 지금은 나 혼자였다.
“아스텔라 언니…….”
언니의 이름을 부르는 내 목소리가 울먹이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나 보고 싶어서.
“야, 우냐?”
얼마나 언니가 보고 싶은지 헛소리까지 들렸다. 분명히 이 방에는 나 혼자 있는데, 갑자기 나를 비웃는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잠깐? 그렇게 낯설지는 않은 것 같은데?
“엇!”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자, 방 가운데에 슬라임이 보였다.
어두운 지하 감옥에서는 그저 반투명의 젤리 같은 형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밝은 곳에서 보니 슬라임의 표면이 희미하게 핑크빛을 띤 것도 알 수 있었다.
“주서엔!”
“뭐?”
아, 이름이 이게 아니었나?
“소카엔?”
……도 아닌가?
핑크 슬라임이 점점 레드 슬라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스코……, 카……, 크……, 읏……?”
열심히 머리를 쥐어짜 보지만, 불행히도 다 틀린 모양이었다.
하나의 음절을 내뱉을 때마다 슬라임의 핑크빛은 점점 진해졌다. 저러다가는 핏빛의 슬라임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이 몸의 이름은 스기엔이시다! 이름도 하나 못 외우는 멍청한 인간!”
“아! 맞아! 스기엔! 스기엔!”
슬라임이 알아서 자기 이름을 소리쳐버리는 바람에 피의 슬라임을 목격하는 일은 없어졌다.
다행이었다. 아무리 귀여운 슬라임이라도 핏빛이라면 무서울 것 같았는데.
“근데, 어떻게 들어온 거야? 내가 분명히 문을 닫았는데?”
분명히 문 여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 게, 지금도 내가 들어왔던 방문은 물론이고 창문도 확실하게 닫혀 있었다.
변한 것이라고는 내 방 한가운데에 슬라임이 들어와 있다는 것뿐이었다.
“위대하신 마족에게 닫힌 문 같은 건 일도 아니지!”
스기엔은 의기양양한 목소리를 냈다. 만약에 사람이었다면 콧대가 높아졌다고 했겠지만, 슬라임은 코가 없었다.
“뭐야? 어떻게 한 건데? 혹시 시공간을 뛰어넘는 능력이라도 있는 거야?”
냉큼 침대에서 내려와 스기엔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 반질반질 윤이 났다.
뭔가 맛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입 베어 물면 젤리나 푸딩처럼 달콤할 것 같은 그런 느낌.
“저기, 있잖아. 그러면 날 우리 언니한테 데려다줄 수 있어? 잠깐 얼굴만 보고 오면 되는데.”
“그건 불가능해.”
“왜? 나 보기보다 안 무거워! 내가 옷을 헐렁하게 입어서 그래.”
“그런 문제가 아니야.”
“아! 그럼 뭔가 복잡한 마력의 문제나 그런 게 있는 거야?”
전생에서 주워 읽은 책의 지식으로 넘겨짚었다.
“그럼 그냥 언니가 지금 뭐 하고 있는지만 내가 볼 수 있게 해주면 안 돼? 그냥 잘 지내고 있는지만 확인하면 좋겠어.”
분명 나의 전생의 잡지식에 따르면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서는 통신을 할 수 있는 마법구라던가, 상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마법 거울 같은 것이 있는 설정도 있었다.
“불가능해.”
귀여운 얼굴에 그렇지 못한 단호한 목소리로 스기엔은 말했다.
“왜? 내가 네 이름을 똑바로 안 불러서 그래? 그건 진짜 미안해! 지금은 확실하게 외웠어, 스기엔! ”
“아니. 그런 거 할 줄 몰라.”
…… 뭔데? 할 줄 몰라서 못 하는 건데, 왜 이렇게 당당한 건데?
“그럼 방에는 어떻게 들어온 건데?”
“그냥 문틈으로 들어왔지!”
분명히 스기엔의 말대로 방문의 아래에는 약간의 틈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가느다란 틈이었다.
“저렇게 좁은데?”
“슬라임이잖아?”
스기엔은 훗- 하고 웃으며 제 몸을 납작하게 만들어서 보여주었다. 저 가느다란 문틈도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만큼.
“슬라임 아니라며?”
“…….”
나는 어젯밤에 스기엔이 극구 부인했던 사실을 되짚었다.
“슬라임 맞지?”
“…….”
“스기엔의 스는 스을라임의 스인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슬라임이 화를 냈다. 별로 무섭지는 않았다.
그래봤자 슬라임인데,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