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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6화 (6/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06

“어이.”

툭툭, 무언가가 내 발을 쳤다.

슬라임이 아닌 건 확실했다. 몰캉거리는 느낌이 아니라, 딱딱한 무언가였다. 거기다가 슬라임은 단단히 삐져서 사라져 버렸으니까.

기절해버린 테오도르. 사라진 슬라임.

적막한 지하 감옥 안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나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에는 딱딱한 지하 감옥 바닥에 몸을 뉘고 잠이 든 것이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어이!”

내가 빨리 일어나지 않자, 더 큰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아니, 호통쳤다.

거참, 성격 급하시네!

내가 지금 일부러 늑장을 부리는 게 아니라, 차가운 바닥에서 잤더니 몸이 삐걱거린다고요!

“으읏……!”

겨우겨우 눈을 뜨고, 겨우겨우 몸을 일으키자 눈에 보이는 것은 열린 문과 무서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남자였다.

옆에 찬 검을 봐선 아마도 그는 하인이 아니라 기사인 듯 했다.

“이분께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더욱 인상을 찌푸리며 그는 재차 나에게 물었다.

보자마자 사람을 의심하는 그 말투에 욱했지만, 그가 붉은 머리카락과 푸른 눈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내 화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거기다가 제법 잘생긴 이목구비가 그가 단순한 엑스트라가 아니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는 테오도르의 호위 기사인 ‘인스트 글라우스’가 틀림없었다. 언니에게 한눈에 반해서 탈출시켜주려다가 비극적인 죽임을 당하는!

언니를 구해주려 했던 인스트에게 당연히 나는 매우 호감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무례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싱긋 웃어주었다.

“뭘 쪼개는 거지?”

내 미소가 기분 나쁘다는 듯, 인스트는 더욱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생각보다 성격은 나쁜 모양이었다.

“만약 이분께 해를 끼치는 짓을 했다면…….”

해라니 억울했다.

깨물린 건 난데!

인스트의 눈에는 테오도르가 기절해있는 것만 보이고, 그가 깨문 내 팔뚝의 상처와 말라붙은 피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전 그냥 오르디 님이 하라는 일을 했을 뿐인데요.”

찌그러지려는 미소를 간신히 유지하며, 인스트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이분을 진정시켜드리는 일요.”

차분히 말했지만, 인스트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긴, 애초에 인스트는 소설 속에서도 마녀가 광증을 가라앉힌다는 것 자체를 믿지 않는 편이었다.

오히려 언니 때문에 테오도르가 더욱 미쳐가는 것 같다고도 생각했다.

그의 말이 꼭 틀린 말은 아니었다.

카르오 가문의 저주받은 광증은 아스텔라 언니의 체액으로 가라앉힐 수 있었지만, 테오도르의 언니를 향한 광기와 집착은 점점 더해갔으니까.

“지금은 주무시고 계세요. 매우 심하게 진정하셔서 말이죠.”

그는 여전히 나를 향해서 미심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더 말을 하지는 않았다.

모르긴 해도, 그가 이곳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나를 깨우는 것이 아니라 테오도르의 안위를 확인하는 것이었을 거다.

만약 그가 괜찮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어딘가로 끌려갔겠지.

“모셔가라.”

그가 손짓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들것을 든 하인이 부리나케 달려와 테오도르를 들것에 실었다.

그들이 문밖을 나가자 인스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그들을 뒤따라서 이 지하 감옥을 나가려 했다.

내가 허겁지겁 일어나서 그들의 뒤를 쫓자, 인스트는 휙 돌아서서 나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빛이었다.

“넌 여기서 기다려.”

“여기서요?”

나는 어둡고, 차갑고, 습하기까지 한 지하 감옥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여기 있을 만큼 있은 것 같은데!

“아니, 저기요! 으앗!”

나는 다급하게 감옥 문을 나서는 인스트의 뒤를 쫓았지만, 매정하게도 내 코앞에서 문은 닫히고 말았다.

또다시 깜깜한 곳에 갇히고 말았다.

“씨잉~ 배고픈데.”

꼬르륵거리는 배를 문지르며, 나는 조금 전에 내가 누워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으…….”

바닥에 쪼그리고 앉자 옷을 뚫고 들어오는 냉기에 나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까보다 더 추운 느낌이었다.

“…….”

느낌이 아니었다. 아까보다 더 추웠다.

나와 맞닿아 있었던 테오도르의 체온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새삼스럽게 혼자 남았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외로웠다.

조금 전까지 테오도르가 누워있었던, 이제는 그저 덩그러니 어둠만 남은 공간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괜찮을까?”

지금 지하 감옥에 남은 것은 나였다. 고로 지금은 테오도르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걱정을 하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도 어젯밤 보았던 테오도르의 길잃은 아이 같은 눈빛이 자꾸만 떠올랐다.

깜부기불처럼 어둠 속에서 스러져가는, 보고 있는 사람마저 꺼져버릴까 봐 걱정되게 만드는, 작은 불빛 같았던 테오도르의 붉은 눈이었다.

나도 모르게 호호 불어 생명을 주고 싶은, 그런 작고 여린 불빛이었다.

* * *

다시 지하 감옥의 문이 열렸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나가리라 다짐하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제 어두운 것은 질색이었다. 차갑고 딱딱한 바닥도 싫었다.

거기다가 가장 싫었던 것은 날 여기다가 가둬두고 아직도 식사를 안 줬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굶기는 건,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이건 계약조건이 틀리잖아요! 분명히 여기 올 때, 숙식 제공이라고 했으면서 이런 돌바닥에서 재우고, 공기만 먹이는 게 무슨 숙식 제공이에요? 심지어 공기도 곰팡내 나는 불량 공기이잖아요!”

씩씩거리며 단숨에 불만 사항을 털어놓고 나서야,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 깨달았다.

“…….”

테오도르의 눈빛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뭐야, 이건?’이라고.

아차 싶었다. 나는 테오도르는 이미 데려갔으니, 분명 하인이 나를 데리러 오든지 오르디가 올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테오도르가 직접 나타날 줄이야.

역광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던 탓도 컸다.

“불만이 많은 모양이군.”

콧방귀를 살짝 포함한 시건방진 말투로 테오도르가 말했다.

그가 사라지고 난 후, 내가 떠올리고 있었던 작고 여린 테오도르는 없었다.

지금 눈앞의 테오도르는 제국의 실세라고 불리는 카르오 가문의 고고한 후계자이자, 멋진 풍채와 잘난 외모를 가진 완벽한 귀족의 모습이었다.

한마디로, 내가 소설에서 보았던 남자 주인공인 ‘테오도르 드 카르오’의 모습이었다.

‘잘 보여야 해.’

나는 주먹을 꼭 쥐며, 이곳에 오기 전 다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내가 그의 취향이 아니라고 해서 무조건 세이프는 아니었다. 날 자기가 필요한 체액을 담아 둔 그릇 정도로 생각하면 곤란했다.

적어도 이 저택에 지내는 동안은 그에게 잘 보여야 내 심신이 편할 터였다.

내가 책에서 읽은 바에 따르면, 그리고 마차에서 오르디에게 들은 설명까지 더하자면, 카르오 가문의 광증은 대게 청소년기에 발현이 되었다.

이십 대가 되어서 증상이 나타난 테오도르는 상당히 늦은 감이 있었다.

외적으로는 날카로운 송곳니와 손톱이 자라나고, 힘이 세졌으며, 원래의 눈이 무슨 색이든 붉게 변했다.

그리고 내적으로는 그야말로 미친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이 광증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지만 대게 3~5년 정도 후에는 그 증상이 가라앉았다.

테오도르의 아버지인 카르오 대공이 멀쩡하게 잘 지내는 것도 그는 이미 중년이기 때문이었다.

즉, 나는 테오도르의 광증이 사라질 동안 이 저택에서 체액을 제공하며 지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내가 오르디와 맺은 근로계약 역시 그에 따른 것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소개장 하나 없는 하녀치고는 매우 후한 월급과 무사히 테오도르의 광증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더욱 후한 퇴직금까지 오르디는 보장해주었다.

“왜 굳어 있지?”

내가 의지를 단단히 다지는 모습을 보며, 테오도르는 피식 웃었다.

“내가 그렇게 무섭던가? 하긴, 그런 괴물 같은 걸 본건 처음이었겠지.”

그의 미소는 자조적이었다. 동시에 나를 비웃고 있었다.

그게 어떻게 동시에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한쪽 입꼬리만 끌어당겨 웃고 있는 테오도르의 모습은 그랬다.

그 모습은 마치…… 반항기 청소년 같았다.

‘크흐흐흣. 내 팔에 봉인된 흑염룡이 피를 원하고 있군.’ 혹은 ‘날아가는 저 새가 부럽군. 적어도 자유로우니까.’라는 오글거리고 소름 끼치는 대사가 어울릴 미소였다.

피폐물 남자 주인공에 딱 어울리는.

안돼, 남주야! 그쪽으로 가지 마! 거기는 에비지지야!

“아니요.”

내 대답에 테오도르의 미간이 좁혀졌다.

“별로 안 무서웠는데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나는 한 번 더 못 박았다.

나는 테오도르가 건너서는 안 되는 피폐물의 강으로 가는 꼴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비록 내가 테오도르의 취향이 아니라서 여자 주인공인 아스텔라의 처지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밉보여서 이 지하 감옥에서 계속 피만 쪽쪽 빨리면서 사는 것도 사양이었다.

“내가 안 무서웠다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며, 테오도르는 다시 물었다.

“네.”

최선을 다해 긍정적인 표정을 지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눈이 붉은색인데, 무섭지 않았다고?”

“토끼같고 귀엽던데요.”

붉은 눈을 가진 생물 중에서 가장 무해할 것 같은 생물의 이름을 대었다.

“뭐?”

“네?”

“뭐라고?”

“예?”

이게…… 아닌가?

토끼라는 대답을 들은 테오도르는 제가 뭔가 잘 못 들은 것이 틀림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내게 되물었다.

혹시 광증의 증상 중에 청력 이상이 있던가? 그런 건 없었던 것 같은데.

“나더러 토끼라고?”

“아니, 그게……. 테오도르 님이 토끼라는 것이 아니라, 토끼도 붉은 눈이고, 그런데 토끼는 안 무섭고, 그러니까 붉은 눈이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니고, 토끼는 귀엽고, 그러므로 테오도르 님도 귀엽고…….”

“나더러 귀엽다고?”

테오도르는 더욱 인상을 구기며 내게 물었다. 아무래도 이게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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