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3화 (3/169)

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03

“아침으로는 뭘 먹을래?”

아스텔라가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로 동생에게 물었다.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아직 자고 있는 탓이었다.

큰소리를 냈다가 그가 깨기라도 한다면, 쓸모없는 계집애들이 목소리만 크다며 두들겨 맞을 것이 뻔했다.

“선택의 여지가 있기라도 해?”

뾰로통한 동생의 말에 아스텔라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동생 말이 옳았다.

이 집에 지금 먹을 거라곤 어제 밭일을 하고 품삯 대신 받은 감자와 산에서 딴 찻잎으로 우린 차밖에 없었다.

“괜찮아. 난 감자도 좋아해.”

아스텔라의 표정을 본 동생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일주일 전 스무 살 성인이 된 동생은 제법 어른스러워졌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감자를 쪄 줄게.”

아스텔라가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똑똑.

낡은 문에 노크가 두 번 울렸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소설의 첫 부분이었다.

그리고…….

-똑똑.

지금 막, 노크가 두 번 울렸다.

늘 보던 우리집 문이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이 문을 여는 순간, 이제 시작이었다.

“할 수 있다. 넌 할 수 있어, 레나티스.”

스스로를 격려하며, 나는 그대로 문을 열어젖혔다. 익숙한 집앞의 풍경에 낯선 마차가 서 있었다. 그리고 낯선 사람도.

“진짜…… 있었군.”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을 가진 낯선 사람은 나를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찰나였지만, 그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쳐지나가기도 했다.

며칠 전의 나였다면, 왜 저렇게 저러지? 라며 의아해했을 테지만, 각성한 지금의 나는 그가 저러는 이유를 알았다.

내 분홍색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분홍색 머리카락이 신기하다는 것을 몰랐다. 왜냐하면 함께 자란 아스텔라 언니의 머리카락 색도 나와 같은 분홍색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을 몽땅 모아도 오십 명이 되지 않는 마을에서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이 둘이었다.

거기다가 돌아가신 엄마까지 분홍색 머리카락이라고 들었으니, 이 마을 출신의 분홍색 머리카락만 세 명이나 되었다.

그러니 좀 특이한 색깔이긴 하지만 마을 사람들 역시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가 깨달은 소설의 설정에서는 달랐다.

분홍색 머리카락은 매우 희귀했다. 어느 정도냐고 하면, 그 머리카락 색을 가진 사람은 마녀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사람을 유혹하는 마력을 가진 달콤한 색의 머리카락.

이라고 소설은 말했다. 물론, 나 말고 우리 언니의 머리카락을 보고 한 묘사이긴 했지만, 머리카락 색깔만은 언니와 나는 똑같았으니 내 머리카락에도 저 묘사는 해당하였다.

“누구세요?”

그가 카르오 대공가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에게 물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자신의 집을 찾아온 낯선 사람에게는 그렇게 물어야 했으니까.

“난 오르디 이콜르. 카르오 대공 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다.”

네네, 그러시겠지요.

“그런데요?”

이런.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살짝 까칠하게 나와버렸다.

소설 속에서 이 남자가 언니를 어떻게 협박했는지 아는 터라 그가 곱게 보이지 않아서였다.

“네게 할 말이 있는데, 들어가도 되겠나?”

이미 성큼 안으로 들어선 주제에 오르디는 뒤늦게 양해를 구했다.

“그러세요.”

나 역시 이야기가 진행되려면, 그를 집안에 들여야 했기에 선선히 그러라고 대답했다.

“저건, 뭐지?”

테이블이며 의자, 솥, 주전자까지 방문 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을 본 오르디가 인상을 살짝 쓰며 물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방긋 웃으며,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오르디와 물건 더미의 사이에 끼어들어서 시선을 차단했다.

물론, 오르디는 내 어깨너머로 아직도 그것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슬쩍 오른쪽으로 발을 옮겨서 그의 시선을 막아보려 했지만,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은 내 어깨 너머의 막힌 방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이거 뭐야?”

잠이 덜 깬 듯한, 혹은 술이 덜 깬 듯한 목소리가 방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평소라면 깰 시간이 아니었는데, 굳이 잠에서 깬 건 원작 버프일까?

소설 속에서 아버지는 바깥의 소란에 잠에서 깼다. 그리고 카르오 대공 가에서 내민 금화에 웃으며 언니를 팔아넘겼다.

작은 애는 필요 없냐며, 반값에 주겠다는 쓰레기 같은 발언도 했었다.

나는 언니를 카르오 대공가에 보낼 생각이 없었고, 내 몸값을 아버지에게 줄 생각도 없었다. 내 몸은 내 것이었고, 내 몸값도 내 것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방문을 저렇게 막아 놓은 것이었다.

“왜 안 열려? 어이! 밖에 누구 없어? 아스텔라! 레나티스!”

조금의 참을성도 없는 아버지는 열리지 않는 문을 마구 두드리며, 나와 언니를 찾기 시작했다.

헹~. 백날을 두드려 보시죠? 그게 열리나.

아버지의 힘으로는 절대로 문을 열 수 없었다. 누가 찾아오기 전에는 아마 저 안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할 거다.

“신경 쓰지 마세요.”

나는 다시 한번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의 난동 소리는 결코 신경 쓰지 않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지만, 방문을 단단히 막아 놓았으니 나올 수는 없었다.

“저 안에 있는 건 누구지?”

“아스텔라! 레나티스! 이 망할 것들이 밖에서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 당장 문을 열지 못해? 감히 낳아준 은공도 모르고, 나를 방에 가둬? 이 빌어먹을 계집애들! 내가 나가기만 하면, 너희 둘 다 가만히 두지 않겠어!”

마치 남자가 질문한 것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아버지는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저희 아버지세요.”

결국, 나는 오르디에게 아버지의 존재를 털어놓았다.

“처음 뵙는 분께 털어놓기 부끄럽습니다만, 저희 아버지는 광증이 있으시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 뒤에는 알아서 생각할 수 있도록 뒷말을 흐렸다.

사실, 그렇게 거짓말도 아니었다. 우리 아버지는 마을에서 ‘술 먹으면 미친개’라는 소리를 공공연히 들었으니까 말이다.

“광증?”

남자의 눈이 묘하게 빛났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던 그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 그의 표정은 이전보다 덜 딱딱해 보였다.

마치 작은 짐을 하나 덜어낸 것처럼.

“그런데, 무슨 일로 절 찾으시는 거죠?”

최대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표정을 하고, 그제야 생각난 것처럼 그에게 물었다. 사실은 오르디가 무슨 일로 날 찾았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

“내가 여길 찾아온 것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적당히 놀라는 척을 했고, 당황하는 척을 했고, 또 고민하는 척을 했다.

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카르오 대공가로 가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카르오 대공가의 호화스러운 마차를 타고, 남자 주인공을 향해서 출발했다.

* * *

“아니, 잠깐만요!”

분명 잘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무사히 소설 내용에서 탈출했고, 나도 무사히 카르오 대공가에 도착했다.

남주의 광증이 좀 무섭긴 했지만,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왜냐고? 나는 언니가 아니었으니까.

남주가 반한 아스텔라 언니와 나는 머리 색만 같을 뿐, 닮은 점이라고는 없었다.

바람 불면 날아갈 듯 가녀린 언니와는 달리 나는 튼튼한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언니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 맑은 파란 눈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는 아버지가 늘 멍청해 보인다며 욕을 퍼부었던 연한 물색의 눈동자였다.

게다가 성격마저 판이하였다.

상냥하고, 착하고, 다정하고, 의젓한 아스텔라 언니와 달리 나는 울보에, 떼쟁이였으며, 만사에 될 대로 되라는 막가파였다.

한마디로 아스텔라 언니와 나는 자매였지만, 정반대였다.

그러니 아스텔라 언니에게 반했던 남자 주인공이 나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사람의 취향이라는 것은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한 손으로 나를 번쩍 들 수 있는 체격에, 내 말이라면 그저 YES라고 대답해주는 순종적인 성격, 그리고 도끼 한 방에 장작을 종이처럼 찢어버리는 근육남이 내 취향이었다.

그리고 이 올곧은 취향은 12세 이후 한 번도 변한적이 없었다.

남자는 역시 힘과 근육이지!

소설 속 아스텔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가가 10페이지에 한 번씩 잘생겼다고 찬양한 남자 주인공이 아니라, 평범한 마을 총각1에 지나지 않는 자신의 첫사랑 에뮬을 끝까지 고수했으니까.

이런 근거로 나는 자신 있게 카르오 대공 가에 입성한 것이었다.

나는 남주의 취향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나에게 반할 리 없으며, 집착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암울한 결말을 맞이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잠시만요!”

저택의 정문이 열리고, 생각보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깔끔하게 다듬어진 정원을 통과해 처음 보는 으리으리한 저택의 앞에 당도했을 때까지도 좀 긴장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 믿음은 확고했다.

오르디가 저택에 도착해 얼굴을 심각하게 굳혔을 때도, 나는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한 오르디가 지하로 향하는 계단으로 내려갔을 때, 그것도 지하 1층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욱 내려갈 때, 비로소 나는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슬쩍 눈치를 보며 뒤를 돌아보자 험악한 인상의 하인 2명이 이미 내 뒤를 막아서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그냥 잘못된 것이 아니라 아주 단단히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다.

거기다가 육중한 철문 앞에 오르디가 멈춰 섰을 때, 비로소 나는 사기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이보시오, 작가 양반.

분명히 아스텔라가 남주를 처음 만난 것은 조그만 방이라고 하지 않았소?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는 작은 방이라며! 이건 방이 아니라, 완전 지하 감옥이잖아!

망했다. 오자마자 광증에 걸린 남주와 단둘이 지하 감옥에 가둬지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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