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02
“내 생일선물 말이야.”
“아, 그거~.”
언니는 나를 보며 예쁘게 웃었다.
“드디어 소원을 생각해냈어?”
거의 언니가 번 돈으로 세 식구가 생활하는 우리 집 형편에는 그럴듯한 생일 케이크도, 대단한 선물도 당연히 살 수가 없었다.
그 대신 우리 자매는 서로에게 늘 소원권을 주었다.
내 생일소원이야! 라고 말하면 상대방은 무조건 그것을 들어주어야 했다.
“좋아. 뭘 하고 싶어?”
내 생일 소원이라는 말에 언니는 손에 들고 있던 감자를 내려놓고, 짐짓 진지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봤자 내가 귀여워죽겠다는 눈빛을 숨길 수 없어서 전혀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내일은 일하지 말고 같이 호수로 소풍할까? 아니면, 보드라운 흰 빵을 만들어 줄까?”
언니는 이제껏 내가 언니에게 말했던 소원을 늘어놓았다.
19금 피폐물의 세계를 모르던 어린 내가 말했던 천진난만한 소원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언니가 야반도주했으면 좋겠어.”
난 이제 어린애가 아니었다.
“뭐?”
“내 생일 소원은, 언니가, 에뮬 오빠랑, 야반도주하는 거야.”
나는 다시 한번 내 소원을 또박또박 말했다.
여주가 남주에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은 이유이자, 남주가 여주의 입에서 그 이름을 들은 순간 그야말로 미쳐버렸던, 그녀가 마음에 품고 있었던 남자의 이름까지 확실하게 언급해주었다.
“야반도주라니? 그게 무슨 말인지는 알고 하는 말이야?”
“당연하지! 오늘부터 난 성인인걸?”
“에뮬과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에뮬과 나는…….”
“아직은 그런 사이가 아니겠지만, 서로 좋아하는 것은 맞잖아.”
사실, 이건 내가 각성을 하기 전에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에뮬 오빠는 대단한 미남도 아니었고, 엄청난 부자도 아닌, 평범한 소작농의 아들이었지만,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언니가 무거운 것을 들고 있으면 은근슬쩍 다가와서 대신 들어주는 사람이었고, 읍내에서 장날에 사 왔다며 촌스러운 리본을 언니 손에 쥐여주기도 했었다.
물론,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언니의 짝으로는 내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에뮬 오빠가 별로라고 말하곤 했지만.
그때마다 언니는 곱게 눈을 흘기며, 그런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고 말하곤 했었다.
난 그게 단지 언니가 착해서 그런 줄만 알았다. 뒤에서 남의 흉을 보면 안된다고 말이다.
좀 미친놈이긴 하지만, 잘생기고 부자에 대단한 귀족인 남자 주인공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언니가 에뮬 오빠를 많이 좋아하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깜깜한 지하 감옥에서 눈가가 짓무를 정도로 울며, 에뮬 오빠를 그리워할 만큼일줄은 정말로 나는 몰랐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그저 폭력만이 소통인 아버지에게서 어린 동생을 보호하며,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던 ‘아스텔라’의 인생에 ‘에뮬’의 다정함이 한 줄기의 빛이었음을.
“에뮬 오빠를 좋아하지?”
나는 흙투성이 언니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언니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런 언니의 얼굴에서 에뮬 오빠의 이름이 나오자 살짝 상기되는 뺨을, 반짝이는 눈빛을 나는 보았다.
“그러니까, 도망가버려.”
언니의 운명으로부터.
“그게 내 소원이야. 아스텔라 언니.”
이번에는 내가 언니를 지켜줄게.
* * *
“레나. 난 아직도 이게 맞는 일인지 모르겠어.”
깜깜한 어둠 속에서 아스텔라 언니가 속삭였다.
눈에 띄는 분홍색 머리와 그것보다 더 눈에 띄는 미모를 가리기 위해서 후드를 깊게 눌러쓴 상태라 어둠이 아니었더라도 언니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지만.
“이게 맞아.”
언니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조금만 더 숲길을 걸어가면, 에뮬 오빠가 언니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언니는 더는 걷지 않을 것처럼 멈추어 선 뒤였다.
“내가 이렇게 떠나버리면 넌 어떻게 해?”
지난 일주일 동안 언니와 나는 끝없는 실랑이를 벌였다.
그 끝에 도망이라는 결론에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언니는 마지막까지 망설이고 있었다. 내 걱정 때문에.
“말했잖아. 나는 귀족 저택에서 하녀로 일할 거라고. 거기서 일하면 숙식은 물론이고, 돈도 벌 수 있어.”
“하지만 그런 곳은 들어가기 힘들잖아. 시골 출신에 소개장도 없는 네가 어떻게 귀족 가의 하녀로 들어간다는 건지 난 아직도 이해를 못 하겠어.”
“힘센 하녀를 원한다고 했다니깐. 힘만 세면, 무조건 채용할 거래. 그런 자리라면 내가 딱 맞잖아.”
언니한테 거짓말을 하려니 양심이 콕콕 쑤셨지만, 최대한 밝게 웃으며 말했다. 제발 언니가 내 거짓말을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하지만…….”
“아버지에게 맞으면서 계속 살 순 없잖아. 혼자 돈 한 푼 못 버는 아버지가 우리를 놓아줄 리 없으니, 언젠가는 이렇게 떠나야 했어. 그건 언니도 동의했잖아.”
“같이 떠날 수도 있잖아.”
“지금 잠시 헤어지는 것뿐이야. 자리를 잡고 나면, 다시 만날 거야.”
언니는 내 걱정 때문에 끝내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발을 반드시 떼게 만들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언니에게 남은 것은 비극적 결말뿐일 테니까.
“정 그렇게 걱정된다면, 다음 달에 내가 마을에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봐. 만약에 내가 그 하녀 채용에 떨어져서 아직 여기에 살고 있다면, 그때 되돌아와도 되잖아. 아니면 내가 언니 있는 곳으로 가든지.”
나는 필사적이었다. 오늘 안으로 어떻게든 언니를 다른 곳으로 보내야 했다.
언니는 그걸 몰랐고, 나는 알았다.
소설 속에서는 동생의 생일이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대공 가의 사람이 여자 주인공을 찾아오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분홍색 머리카락의 여자를 데려가기 위해서.
말이 데려가겠다지, 스스로 가지 않으면 둘 다 끌고 가겠다는 협박이 동반되었음은 물론이었다.
소설 속에서 아스텔라는 당연히 어린 동생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신이 스스로 가겠다고 이야기를 한다.
만약 언니가 있을 때 그들이 온다면, 언니는 틀림없이 소설 속 아스텔라와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언니가 나를 보낼 리 없었다.
그렇게 언니가 카르오 대공가에 가게 된다면, 소설 속 아스텔라와 똑같은 파멸이 언니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레나.”
살짝 물기 어린 목소리로 언니가 나를 불렀다.
“이런 말 하면 정말 이상하겠지만, 며칠 전부터 네가 좀 달라진 것 같아.”
언니의 말에 속으로 뜨끔했다.
그야, 아무것도 몰랐던 ‘레나티스 그라티아’와 각성한 ‘레나티스 그라티아’는 다른 사람일 테니까.
나는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었다.
무슨 소리인지는 나도 설명은 잘 못 하겠지만, 여하튼 그랬다.
“무슨 소리야, 언니? 내가 달라지긴 뭐가 달라져.”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언니의 손을 더욱 꼭 붙잡았다.
“굳이 말하자면 어른스러워진 거겠지. 왜냐하면 난 이제 어른이잖아? 20살 성인이니까.”
“나한테는 아직 어린 울보 귀염둥이 내 동생 레나일 뿐이야.”
언니가 고개를 흔들자, 후드가 조금 흘러내리며 나와 똑같은 분홍색 머리카락과 나보다 조금 진한 언니의 파란색 눈동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언니.”
눈물이 살짝 고인 파란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언니의 예쁜 눈을 보는 것은 이제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언니가 행복하기를 바라.”
하지만 언니의 눈이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절망이 아니라 행복을 볼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언니와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었다.
툭.
언니의 이마에 내 이마를 맞댔다. 그리고 고백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아스텔라 언니.”
* * *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언니는 에뮬 오빠와 무사히 떠났고, 나도 조용히 내 짐을 챙긴 뒤였다.
살금살금 방을 나와서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탁자를 들어다가 아버지의 방문을 막는 일이었다.
보통은 해가 중천에 떠야 일어나는 아버지였지만, 혹시 모르니까.
“모자랄까?”
조심스럽게 집에 있는 의자를 몽땅 가져다가 탁자의 위에 얹어 무게를 더했다.
“음…….”
그래도 뭔가 부족했다.
이 정도면 주정뱅이 하나쯤은 방 밖으로 못 나오게 하기에는 충분해 보였지만, 늘 화내고 주먹과 발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겁이 더럭 났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아버지가 방 밖으로 나와서 언니가 없어진 사실을 알게 된다면…….
“끔찍해.”
상상만으로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틀림없이 아버지는 난리를 부릴 게 뻔했다. 말려줄 언니가 없으니 그 화를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것은 나였다.
아버지는 언니보다 나를 더 싫어했다. 아니, 사실 언니는 그렇게 싫어하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있었고, 늘 화가 나 있었다. 그리고 언니가 옆에 있었기에 언니에게도 화를 낸 것뿐이었다.
아버지가 싫어하는 것은 나였다.
엄마를 닮았다는 이유로.
“닮았는지 어쨌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말이야.”
나는 입술을 비쭉이며 솥을 꺼내다가 탁자 위에 놓았다.
내가 갓난아기 때 죽었다고 들은 엄마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도 나는 알지 못했다.
언니는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고 했지만, 나보다 고작 두 살 많은 언니 역시 엄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엄마가 없어도 난 상관없었다.
언니가 있었으니까.
아스텔라 언니가 나의 엄마이자 언니였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솥단지 안에 물까지 가득 채우자 그제야 든든해졌다.
“좋아!”
아버지가 절대로 방에서 나오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자, 비로소 안심되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소설이 시작되는 바로 그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