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폐물을 힐링물로 만드는 방법 001
모든 일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뎅……. 뎅……. 뎅…….
“20번째 생일을 축하해, 레나!”
“아앗!”
멀리 마을 한복판에 있는 교회 종탑에서 하루가 바뀌는 종소리가 울린 것과 그 소리에 맞춰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언니 아스텔라가 내 생일을 축하한 것, 그리고 갑작스러운 두통.
거기에…….
테오도르의 입술이 아스텔라의 희고 매끈한 피부에 닿았다.
“하앗……!”
그러자 속절없이 아스텔라의 입술에서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수없이 많은 경험으로 인해 이미 그녀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다.
눈앞의 흉포하고 잘생긴 남자가 자신의 육체를 유린할 것을.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이 쾌락으로 몸부림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누군가가 내 뇌 속으로 마구 쑤셔 넣고 있는 것 같은 기억들까지.
“왜 그래, 레나? 머리가 아파?”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아픔에 내가 머리를 감싸 쥐자, 언니는 화들짝 놀라며 내 안색을 살폈다.
언니의 다정한 손길과 걱정스러운 눈길이 느껴졌지만 나는 얼른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직도 끔찍한 두통과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수많은 단어들이 내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제발…… 그만……!”
아스텔라의 목소리는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만? 그만하라고? 이미 이렇게 진득하게 젖었는데 말이지?”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테오도르가 그것보다 더 비릿한 향이 나는 손가락을 들어 아스텔라에게 내보였다.
그의 번들거리는 손가락을 본 아스텔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스텔라. 야하기 짝이 없는 몸을 가진 나의 마녀.”
“아, 아니야…….”
“밤이면 밤마다 나를 유혹하는 마녀.”
“아니야!”
아스텔라 눈에서는 끝내 눈물이 후두둑 떨어지고야 말았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아스텔라는 매일 울었다.
자신의 아래에서 매일 밤, 신음과 거친 호흡과 함께 눈가가 짓무를 정도로 매일 눈물을 흘렸다.
오늘 밤도 마찬가지리라.
잠시 후, 두통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레나? 괜찮니?”
고개를 들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언니가 있었다.
제멋대로 뻗치고 구불거리는 내 곱슬머리와는 달리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분홍색 머리카락이 제일 먼저 보였다.
그리고 갸름한 턱선과 걱정을 가득 담고 있는 선한 푸른 눈, 오뚝한 코와 붉은 입술까지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언니 ‘아스텔라’ 그대로였다.
“언니…….”
하지만 조금 전에 제멋대로 내 머릿속에 들어온 기억이 말하고 있었다.
이 세계는 내가 전생에 읽었던 소설 속의 세계라고.
이 사람은 여주인공 ‘아스텔라 그라티아’라고.
곧 피의 저주를 받은 남자 주인공을 만나, 방안에 갇혀서 남주에게 체액을 빨아 먹히고, 집착 당하고, 육체를 유린당하다가,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불쌍한 여자 주인공이라고.
20번째 생일.
성인이 된 순간.
나는 각성했다.
* * *
<카르오의 인형>은 한마디로 19금 피폐물이었다. 아니, 19금 피폐물일 수밖에 없었다.
남자 주인공의 집안인 카르오 대공가는 제국에서 손꼽히는 세력가였다.
그 가문에는 은밀한 비밀이 있었는데, 바로 카르오의 피를 이어받은 자는 빠르게는 청소년기에, 대게는 성인이 되면 광증이 발현된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 중년이 되면 광증은 가라앉았지만, 문제는 중년이 되기도 전에 광증이 폭주해서 죽거나 죽임을 당한다는 데에 있었다.
이쯤 되면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좀 봤다면, 특히나 내가 19금을 좀 봤다~ 싶은 독자라면 다 눈치챘을 텐데, 그 광증은 마녀의 체액을 흡수함으로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 마녀는 여주였다.
남주가 여주의 다양한 체액을 다양한 방법으로 흡수하는 이야기가 바로 <카르오의 인형>의 줄거리였다.
그러니까, 어떤 다양한 방법이냐 하면……. 음…….
책의 내용을 떠올리자 갑자기 낯뜨거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다양한 방법이 바로 책의 내용이자, 19금이 된 이유였기 때문이었다.
“전생의 내 독서 취향은 어떻게 된 거야? 대체 뭘 보고 자란 거냐고!”
갑자기 자괴감이 느껴졌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19살 순진한 소녀였는데, 20살 성인이 되자마자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아니, 사람이 좀 차근차근 알아가는 맛이 있는 거지! 나는 먹은 적도 없는데 갑자기 이렇게 맵고, 짜고, 달고, 쓴맛을 한꺼번에 알아버리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억울해!
“왜 그래, 레나?”
저쪽에서 열심히 감자를 캐고 있던 언니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내 이름 ‘레나티스’대신, 언니만 부르는 내 애칭인 ‘레나’라고 부르며.
“아직 머리가 아픈 거야? 네 생일인데 오늘 하루는 쉬어도 된다고 했잖아.”
“내가 쉬면, 언니 혼자 넓은 밭의 감자를 다 캐야 하잖아.”
“괜찮아. 혼자 할 수 있어.”
언니는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찡해졌다.
언니는 늘 이랬다. 자신은 뭐든지 괜찮았고, 언제나 내 걱정만 했다. 어릴 적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서 날 키워준 것도 바로 언니였다.
자기도 어리면서, 남의 밭에서 일하고, 산에서 들에서 먹을 것을 구해오고, 그야말로 날 업어서 키운 것이 아스텔라 언니였다.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우리 언니, 아스텔라.
그런 우리 언니가 피폐물 여주인공이라니!
남주에게 밤낮으로 체액을 쪽쪽 빨리고, 갖은 집착은 다 당하고, 결국에는 지하 감옥에서 초점 없는 눈으로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는 엔딩을 맞이하는 비운의 여주가 될 운명이라니!
“그럴 순 없어!”
나는 우리 착하고 예쁜 언니가 그런 고초를 겪게 만들 수 없었다. 그런 비참한 엔딩을 맞이하게 하는 것은 더더욱 안되었다.
“얘도 참. 언니는 괜찮다니깐. 정 그렇게 도와주고 싶으면 저 감자 포대 좀 옮겨줄래?”
아……. 일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꼭 일을 도와주겠다는 의지로 소리를 지른 것으로 오해한 언니는 내가 기특하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걱정 마, 언니! 내가 옮겨줄게!”
상관없었다. 어차피 힘쓰는 일은 내 몫이었다.
언니는 선천적으로 너무 여리여리했고, 힘도 없었다. 어쩌면 늘 나한테 먹을 걸 양보해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어제저녁도 언니는 자기는 배가 부르다면서 내 접시에 자기 감자를 덜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신나서 그것을 받아먹었고.
그런 우리 모습을 본 아버지는 나한테 제 언니보다 못생기고, 돈도 못 벌면서, 식량이나 축내는 식충이라고 했다.
사실 그 평가는 억울했다.
내가 언니보다 예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우리 언니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착하니까.
이건 원래도 확고한 생각이었지만, 어젯밤 이곳이 책 속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욱 확실해졌다.
동네 사람들 손을 붙들고 자랑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희 언니가 세계관 최고 미녀예요! 사슴 같은 눈망울을 가진 가녀린 백합과 같은 청초한 미인이라고 작가가 대놓고 말했다고요.’
‘얼마나 미녀인지 미친 남주 놈도 한눈에 반하고, 세상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던 놈이 우리 언니한테 엄청나게 집착할 정도라고요!’
‘얼마나 예뻤으면 호위 기사마저도 반해서 언니를 탈출시켜주려다가 들켜서 그 자리에서 목이 잘리고, 더 미쳐버린 남주가 아무도 언니를 보지 못하게 지하 감옥에 가두고,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언니의 발에 족쇄를 채우고…….’
……자랑할 일이 아니었네.
어쨌든 내가 언니보다 예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돈도 못 벌면서 식량이나 축내는 식충이는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언니를 도와서 일을 하러 나갔고, 텃밭도 열심히 가꿨고, 산나물이나 열매를 따와서 열심히 내 몫을 하는 훌륭한 어린이 및 청소년이었다.
오히려 아버지야말로 우리 집에서 돈도 벌지 않고, 매일 술이나 마시며, 언니와 내가 번 돈과 식량을 축내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뭔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폭력까지 일삼는 사람이었다.
집에 돈이 없거나, 술이 떨어졌을 때는 물론이고, 날이 추우면 추워서, 날이 더우면 더워서, 음식이 짜면 짜서, 싱거우면 싱거워서 화를 냈다.
그리고 성질을 내는 것만으로 분이 풀리지 않으면, 항상 우리에게 주먹이 날아왔다.
“괜찮아, 레나.”
언니는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며 그렇게 말했다.
덜덜 떨리는 가녀린 팔로 나를 끌어안은 채로.
“넌 내가 지켜줄게.”
어린 내가 아버지가 무서워서 울음을 터트리면, 자기도 어린 주제에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언니의 눈에도 두려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으면서.
“언니.”
“응?”
고개를 숙이고 다시 감자를 캐고 있던 언니가 내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묶은 머리는 살짝 흘러 내려와 있었고, 이마에는 작은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아주 자연스러웠고, 매우 예뻤다.
더위와 고된 밭일로 발갛게 상기된 뺨은 생기 넘쳐 보였고, 나를 바라보는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저 모습은 곧 사라지게 될 것이다.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어지고, 총기를 잃은 눈이 바라볼 수 있는 것은 그저 새까만 어둠만이 되겠지.
지하 감옥 안에서 발목에 족쇄를 매단 채로는 아무 데도 갈 수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몸은 점점 쇠약해지고 말라가겠지.
생기 없는 인형처럼.
“왜 불렀어, 레나?”
저 예쁜 미소도 없어지고 말 거다.
깜깜한 지하 감옥 안에서, 마주치는 사람이라고는 그저 광기 어린 눈빛과 집착만을 보여주는 남자 주인공뿐일 테니.
“할 말이 있어.”
나는 이 소설을 바꾸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