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 식상하게도, 운명(6)
(91/95)
외전 6. 식상하게도, 운명(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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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6. 식상하게도, 운명(6)
2023.02.10.
“네가 와.”
연우의 말에 놀랍게도 선오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마치 그녀에게 복종하듯이.
연우는 고분고분하게 제 말을 따르는 선오를 떨리는 눈동자로 응시했다. 작은 솜털마저 그에게 끌리는 것처럼 일어났다.
코앞까지 다가온 선오는 그대로 연우를 와락 끌어안았다.
누구 것인지 모를 심장이 쿵쿵 뛰었다. 처음 만났을 때와 조금도 변함없이.
연우가 선오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는 서럽게 울었다. 무감각하던 몸이 그가 주는 자극을 따라 움찔했다.
“미안해.”
선오가 연우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사랑해.”
저 달콤한 사랑 고백이 정말 선오의 것이란 게 믿기지 않았다. 만약 이것이 깨어나면 모두 끝나 버릴 꿈이라면 연우는 절망스러울 것만 같았다.
더는 고칠 수도 없이 망가질 것만 같았다.
“너를 만나고, 단 한 순간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 없었어, 연우야.”
그가 제게 남긴 흉터를 보던 연우가 원망을 담아 선오를 때렸다. 선오는 얌전히 그녀의 분풀이를 받아 주었다.
“또 버리고 갈 거면, 너무 깊게 들어오지 마. 얕게 들어왔다가 나가.”
“안 버려.”
“강선오, 넌 정말…….”
연우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선오가 그대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입을 맞췄기 때문이다. 선오를 때리느라 분주하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내려가 선오의 허리에 닿았다.
연우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그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너는 언제나 나를 천국에도 데려갔다가, 지옥에도 데려간다.
너는 항상 나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었다가, 가장 불행한 여자로 만든다.
너는 매일 나를 살고 싶게 하고, 나를 죽고 싶게 한다.
강선오란 이름의 ‘너’는 나를 너무나 쉽게 가지고 놀아 버린다.
도연우란 이름의 ‘나’는 너를 너무나 쉽게 용서해 버린다.
“강선오.”
이 구구절절한 말을 짧게 요약해 보자면.
“나도 사랑해.”
내가 너를 참 많이 사랑한다는 소리다.
* * *
연우는 잠에서 깨어났지만 바로 눈을 뜰 수 없었다. 선오와 보낸 달콤한 밤이 현실이 될 수 없는 꿈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아침까지도 한 탓이다.
연우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그러고는 용기를 내 눈을 떴다. 쏟아지는 햇살에 잠시 앞이 보이지도 않았다.
“팔 저리니까 좀 비켜 줄래?”
그러자 낮은 목소리가 먼저 그녀를 맞이했다. 연우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침이라 더 멋진 그를 보다가 손을 뻗어 쓰다듬었다.
뜨거운 체온이, 보드라운 피부가, 포근한 숨결이 그가 그저 환영이 아님을 증명했다.
그는 아침이 와도 제 옆에 있었다.
물거품처럼 사라질 꿈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실제였다.
“아침부터 그렇게 야하게 굴면 좀 곤란한데.”
이윽고 연우가 아이처럼 웃었다. 그러는 동시에 눈엔 눈물이 맺혔다.
“아직 있네. 또 돈뭉치만 두고 가지 않았네.”
너무 좋아. 연우가 선오의 품에 폭 안겼다. 연애에 능숙한 그가 아주 살짝 경직된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 좋았다.
돈 한 푼 없는 가난한 강선오라도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로 좋았다.
“연우야.”
선오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거두고서 풍성한 연우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물결 같은 그것은 선오의 손가락 사이에서 마음껏 춤을 췄다.
“이젠 아무도 방해 못 할 거야. 앞으로 우리는 사랑만 하면 돼.”
“…….”
“내가 끝까지 너를 지킬게.”
“말은 똑바로 해. 지금까지 나 자신은 내가 지켰어.”
울먹이는 주제에 또박또박 대꾸를 했다. 그런 그녀가 밉진 않고 귀엽게만 보이니 우린 꽤 꼴사나운 세기의 사랑을 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래. 네 말이 다 맞다. 다 맞아.”
선오가 포기한 듯 그렇게 말했다. 연우가 키득 웃었다. 미간을 찌푸리던 선오가 새삼스럽게 물었다.
“네가 원래 기가 좀 센 편이었나?”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세져야만 해.”
“쉽지 않겠네.”
“그럼 쉬운 연애를 하려고 했어?”
기 센 커플의 탄생이다.
“여태까지의 연애완 다를 거야. 각오해.”
누구 한 명이 강하면 누구 한 명이 약해야 조합이 맞는다던데, 이상하게도 두 사람은 둘 다 강한 것이 더 조화로워 보였다.
첫 연애보다 더욱 단단해 보이는 것이 그 증거였다.
서로가 서로를 이겨 먹을 궁리를 하는 치열한 연애의 시작이었다.
“이야. 이제 막 닿았는데, ‘기대해.’가 아닌 ‘각오해.’라니. 역시 내 여자, 특별하다.”
“지금 비꼬는 거야?”
“어.”
“죽을래?”
연우가 방금 전까지 애틋했던 선오를 팍 밀쳤다.
“예전의 도연우가 아니야.”
분명 그를 팍 노려보며 주도권을 가져오려 했는데, 이상하게도 그와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 왜 웃었지. 하나도 안 웃겼는데.”
“귀엽게 노네, 진짜.”
선오가 연우를 확 끌어당기자 그녀는 그의 위로 떨어졌다. 선오는 눈에 보이는 곳엔 모조리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연우가 간지러운 나머지 이리저리 몸을 피했다.
“오늘 저녁 약속 있어?”
“스케줄.”
“밤엔?”
“스케줄.”
분명 이기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뭐, 그래도 상관없다. 진다고 한들 기분 나쁜 싸움이 아니니까.
“하, 진짜 바쁘네. 새벽엔?”
“으음. 새벽은 되겠다.”
“그럼 새벽에 만나.”
그저 치열하게 사랑하고, 싸운다는 자체가 중요하니까.
“내가 돌아올 때까지 집에서 얌전히 기다려.”
“어쭈. 오빠한테 막 까불어.”
* * *
선오가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짜증스럽게 내려놓았다. 연우가 슬그머니 선오의 눈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보지 말자고 했잖아.”
쓸데없이 큰 텔레비전에선 연우가 잘생긴 남자 배우와 격렬하게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자체 최고 시청률을 찍으면서 순항 중인 드라마였다.
“난 분명 키스 신 있다고 말했다.”
연기고, 일이라 상관없다는 둥 쿨한 척 굴더니 선오의 표정은 점점 썩어 갔다.
“근데 오빠가 보자고 한 거다.”
“저렇게 진한 키스라고는 말 안 했잖아?”
“요즘 드라마에서 저 정도는 다 해.”
“웃기네. 15세부터 시청이 가능한 드라마에서 저래도 돼? 어린 애들이 뭘 보고 배우겠냐고.”
누가 보면 베드신이라도 찍은 줄 알겠어.
“방송국에 항의를 하든지 해야지. 아니다. 너 앞으로 로맨스는 찍지 마라.”
“누구보다 프리한 사람이 왜 이렇게 보수적인 척해?”
“보기보다 보수적인 사람이야.”
“아, 그러셔?”
……뭐, 그렇단다. 누구도 믿지 않겠지만.
연우는 콧방귀를 뀌고서 새초롬하게 요구했다.
“그렇다면 우리 보수적인 분 휴대폰 좀 봐도 될까요?”
워낙 과거가 화려한 선오였기에 언젠가 한 번 전화번호 정리를 싹 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명분이 없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빨리 찾아오다니.
오히려 땡큐다.
이글이글한 연우의 눈과 달리 선오는 생각보다 흔쾌히 휴대폰을 내놓았다.
호기롭게 휴대폰을 주니 연우는 당황스러웠다. 심지어 그의 휴대폰은 잠금도 걸려 있지 않았다.
“마음껏 보세요.”
“미리 다 정리했지?”
연우가 다급하게 선오의 연락처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의 위치에 맞지 않게 내부는 단출했다. 화려한 인맥도, 어마어마한 셀럽도 없었다.
강태오놈, 아버지, 어머니, 준오, 진서령 여사……. 죄다 가족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멈춘 한 구간.
“이럴 줄 알았어. 정소유 씨는 누구야?”
“우리 형수님.”
“아…… 형수님을 이름으로 저장해 두는 사람이 어딨냐?”
머쓱해진 연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선오가 당당한 표정을 지은 채 턱을 괴었다.
“아무튼 미리 지우는 건 반칙이지!”
연우는 제가 생각해도 황당한 소리를 했다. 선오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럼 내 휴대폰에 다른 여자 번호가 있어야 했나?”
“아, 아니.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비겁해.”
어느새 드라마 화면은 바뀌어 연우와 남자 배우가 한 침대에 누워 있는 장면이 나왔다. 연우는 진땀이 났다. 오늘따라 애정 신이 왜 저렇게 길담.
선오는 팔짱을 끼고서 말했다.
“그리고 애초에 번호는 저장한 적 없어.”
“……뭐?”
“지금껏 만난 여자들 번호 말이야. 너 외엔 아무도 저장 안 했어.”
사귀는 사이에 번호 저장도 하지 않고, 정 없이 열한 자리 번호로 방치하는 탓에 기겁하고 떠난 여자가 한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선오는 딱히 바뀌지 않았다.
‘누구든’ 만나야 했지만, 그 ‘누구든’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어차피 연우를 제외하면 흥미가 없었다.
“어차피 금방 만나고 헤어질 건데, 지우기 귀찮잖아.”
“뭐 이런 몹쓸 놈이 다 있어?”
“이런 몹쓸 놈이 좋아 죽으려는 넌?”
“…….”
그들 사이에 놓인 과자를 와그작와그작 씹으며, 연우가 선오를 노려보았다.
“바보천치지.”
“우리 바보천치, 내가 책임져야지.”
선오가 연우의 목덜미를 살살 쓰다듬었다. 연우가 못 이긴 척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도연우, 나한테 키스해 봐.”
“갑자기?”
“그래. 빨리. 그놈한테 했던 것보다 더 진하게 해 봐. 그래야 분이 풀릴 것 같으니까.”
제가 바보천치라는 것을 인증하는 꼴이 됐지만, 그래도 질투하는 선오의 모습을 보는 건 썩 나쁘지 않았다.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픽 웃은 연우가 고개를 꺾어, 선오에게 살포시 입을 맞췄다.
가볍게 시작된 입맞춤은 점점 더 진해졌고, 분위기는 후끈해졌다. 수동적이던 선오의 상체가 서서히 연우에게로 기울여졌다.
이미 드라마 키스 신의 수위는 한참 넘어섰다.
“오빠는 정말 못돼먹었는데, 돌아버릴 정도로 매력적이기도 해.”
연우의 얼굴은 과일처럼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선오는 그런 연우의 입술을 약하게 깨물었다가 놓았다.
작은 탄성과 함께 오묘한 기류가 흘렀다.
아주 높은 산에 오른 것처럼 호흡이 급해졌다. 연우는 손을 뻗어 선오의 머리를 헤집었다.
그 순간 드라마는 끝이 나고, 다음 화 예고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침실로 가면 딱 좋겠다, 싶은데 대뜸 오묘한 기류가 끊겼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선오가 먼저 끊어 냈다.
“다음 주에 또 키스를 해?”
예고편에 또 나오는 키스 신에 분노한 까닭이었다.
못 살아.
연우가 선오의 눈을 가리고 다시 분위기를 내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뭔 놈의 힐링 드라마가 힐링은 안 하고 맨날 키스만 해?”
“오빠.”
“힐링이 아니라 아주 자극의 끝이다, 끝.”
연우가 뒤로 널브러졌다. 강선오와 사귀었던 다른 여자들은, 이런 유치한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못 하겠지. 저도 선오가 이토록 질투가 많은 줄은 몰랐는데.
“그래서, 오늘 밤 우리의 장르도 힐링으로 갑니까, 강 상무님?”
“그건 아니지.”
“그럼 분위기 좀 그만 깨지?”
연우가 혀를 쯧 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로 돌아와 기다란 머리를 묶고 있는데 선오가 예고 없이 뒤에서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두 사람은 동시에 침대 위로 쓰러졌다.
선오의 못된 손이 슬금슬금 연우를 건드렸다.
“오늘 밤 우리의 장르는 격정 멜로야.”
운명의 상대는 언제나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때론 아주 식상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운명에 쩔쩔매는 이유는 내 의지완 상관없이 이미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다. 어쩌면 에로?”
그렇게 우리는. 너와 나는.
식상하게도, 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