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식상하게도, 운명 (1)
(86/95)
외전 1. 식상하게도, 운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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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1. 식상하게도, 운명 (1)
2023.01.23.
유달리 일이 많은 날이었다. 오죽하면 선오는 걸으면서도 태블릿 PC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위풍당당한 그의 걸음이 강화 전자 본사를 가로지르고 있을 때, 저 멀리서 홍보팀장이 선오를 불렀다.
“상무님! 잠깐만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걸음을 붙잡는 음성에 짜증이 왈칵 올라왔지만, 선오는 가까스로 참아 내고서 걸음을 멈췄다.
트렌드에 민감한 전자기기의 특성상 홍보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용건만 간단히.”
“네. 그럼요. 이번 분기 강화 전자 모델로 발탁되신 배우 도연우 씨입니다. 상무님과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셔서요.”
도연우? 어쩐지 익숙한 이름 석 자에 미간을 찌푸리다가 낯이 익은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 강 이사님, 아니, 이젠 강 상무님이라 불러야 하나? 승진 축하해요.”
선오 머릿속의 ‘전 여자친구 파일’ 중 하나가 쑥 위로 떠 올랐다. 이름 도연우. 주인공의 친구 역만 줄곧 맡던 그저 그런 신인 배우.
선오가 잠깐 만나고 헤어졌던 짧은 인연 중 하나였다.
“뭘 그렇게 놀라?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그 순간 이질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몇 년 사이에 연우는 많이 바뀌어 있었다. 수수한 차림에, 소심하던 성격의 연우는 화려한 장신구를 걸치고서 당당하게 선오와 마주 보고 있었다.
잘나가는 스타의 모습 그 자체였다. 신인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얘가 왜 우리 회사 홍보 모델이죠?”
선오가 홍보팀장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두 사람의 묘한 기류에 안절부절못하던 홍보팀장이 흠칫 놀랐다.
“누구 마음대로?”
“상무님이 직접 결재해 주신 건입니다만.”
“내가?”
선오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홍보 모델 관련 건에 대한 서류에 서명한 것이 떠올랐다.
워낙 바쁜 시기라 그저 ‘대세 배우’란 소리에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결재를 해버린 것이 이 참사를 불러온 것이었다.
“그런 표정 하지 마. 이 연예계에서 오빠랑 안 엮였던 사람 찾는 게 더 힘들걸.”
“그래서.”
얄미운 표정으로 약 올리는 연우를 보며 필사적인 인내심을 발휘한 선오가 말을 끊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뭐죠, 도연우 씨? 인사가 목적이었으면 이제 돌아가시면 될 것 같은데.”
수려하게 올라갔던 연우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내려왔다. 왠지 선오도 많이 변한 것처럼 보였다.
아주 찰나의 순간 표정을 감춘 연우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랑 차 한잔하실까요?”
“이거 어쩌죠? 제가 좀 바빠서.”
두 남녀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예전의 포악한 선오였다면 상상도 하지 못할 놀라운 광경이었다. 홍보팀장은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달아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럼 여기서 이야기해? 우리 헤어질 때…….”
“도연우 씨.”
선오가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을 했다. 로비에 있던 모든 직원들이 심기가 불편한 강 상무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공기의 흐름마저 바뀌는 느낌이었다.
그가 이 강화 전자의 실질적 주인이라는 걸 방증하는 꼴이었다.
“딱 5분. 내가 우리 홍보 모델한테 할애해 줄 수 있는 시간입니다.”
뒤이어 나온 대답에 연우조차 놀랐다. 묘한 기분이 그녀를 둘러쌌다.
날카로운 표정으로 연우를 바라보던 선오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연우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뭐야, 강선오. 진짜 변했잖아. 시시하게.
“커피입니다.”
잠시 후 선오의 비서가 커피를 내려놓고 나가자, 호화로운 선오의 집무실엔 두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커피 향을 음미하던 연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개과천선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 봐. 근데 막상 변한 거 보니까 억울하네?”
“우리 연우 많이 컸네.”
선오가 소파에 등을 기대며 느른하게 말했다. 상위포식자다운 낮은 목소리였다.
“그럼. 나 예전 그 무명 배우가 아니거든. 오빠, 열심히 일하느라 요즘 연예계 돌아가는 사정을 도통 모르는구나? 내 몸값, 오빠 상상 이상으로 뛰었어.”
“네가 뜬 걸 자랑하러 온 걸 아닐 테고.”
물론 연우가 제아무리 대단한 배우가 되었다고 한들, 대한민국 재계 1순위 강화 그룹의 차남인 선오에겐 대적하지 못한다는 걸 그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여기서 깨져도. 어차피 이 자리에 오른 것도 선오를 다시 만나기 위함이었으니까.
“홍보 모델, 왜 한다고 했냐?”
“돈 벌려고? 강화 전자, 돈 많이 주잖아.”
“그래? 그럼 내가 그 돈의 딱 다섯 배 줄 테니까 그만둘래?”
“아무리 변해도, 이건 여전하네. 무조건 돈으로 해결하려는 거.”
선오와 헤어졌던 날 아침, 침대 옆자리엔 그가 아닌 엄청난 액수의 돈이 있었다.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아니라고 해도, 연우는 부정했다. 제게만은 다르다고, 자신만은 특별하다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은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그 믿음이 무너졌던 날, 연우는 다짐했다. 기필코 성공하리라. 그래서 선오가 다시 저를 찾게 만들겠노라고.
“사실 오빠가 보고 싶기도 하고.”
연우의 말에 선오가 진심으로 웃긴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의 눈만큼은 웃지 않고 그대로였다.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듣고 있기엔 난 너무 바쁜데, 이만 나가라.”
“오빠, 그거 알아?”
연우가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도로 앞으로 쏟아졌을 때, 누가 봐도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선오의 시선이 천천히 머리끝으로 내려갔다.
“오빠랑 사귀었던 여자들은 다 오빠가 죽었으면 해.”
곰곰이 돌이켜 보니 처음 연우와 만날 때도 저 윤기 나는 머리카락에 시선을 빼앗겼던 것 같다. 연예계에 연우만큼 예쁜 여자가 많았지만, 연우만큼 분위기 있는 여자는 없었다.
적어도 선오의 눈엔.
“나도 그렇고.”
“그럼 뭐, 죽어 주기라도 할까?”
“어. 가능하면 그래 줄래?”
그제야 흥미가 생겼는지 선오가 혀를 튕겼다.
“천하의 강선오가 나를 위해 죽어 준다니. 얼마나 영광이야? 다들 나를 부러워할걸?”
선오의 시선이 예고 없이 위로 올라와 연우와 눈이 마주쳤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탓에 연우는 신인 때의 그 처연한 눈동자로 선오를 마주하고 말았다.
선오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연우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하고 싶은 말을 해. 빙빙 돌리지 말고.”
“책임져.”
“뭐?”
“오빠가 나 책임져.”
하지만 그건 기어이 눈물이 되어 흐르진 않았다.
“오빠랑 헤어진 후로 연애를 한 번도 못 했어.”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너는 쓰레기라 나 같은 건 금방 잊었겠지만 난 아니야. 네가 준 상처에 아직도 허덕이고, 타인의 진심을 의심하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어. 네가 날 이렇게 망가뜨렸는데, 네가 날 책임져야지.”
연우가 커다란 선글라스를 꼈다. 그 탓에 선오는 더 이상 연우의 눈동자를 관찰할 수 없게 되었다.
“너는 잘 먹고 잘사는데, 나는 평생 혼자면 열 받잖아?”
“고작 결론이 그겁니까, 도연우 씨? 나랑 연애라도 하자고?”
연우는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아. 나를 위해 죽어 주든지.”
입도 대지 않은 선오의 커피에서는 여전히 뜨거운 김이 폴폴 올라왔다.
“아니면, 나랑 연애하든지. 선택해.”
“진짜 많이 컸다, 우리 연우.”
* * *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
“이름이 뭐라고?”
선오의 물음에 시끌벅적하던 실내는 고요해졌다. 당시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신인배우였던 연우는 시기 어린 동료들의 시선을 느끼고서 움츠러들었다.
대놓고 술잔을 세게 내려놓으며 불만을 표현하는 선배 배우도 있었다. ‘감히, 네가?’라는 의미를 대놓고 내비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연우는 선오와 가장 먼 곳에 앉았다. 그런데 선오가 굳이 연우를 콕 집어 이름을 물었으니.
“……연우.”
따가운 관심이 무섭지만 그렇다고 강화 그룹 차남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던 연우는 몹시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뭐라고?”
그러자 제대로 들리지 않았는지 선오가 몸을 기울였다. 그녀의 이름을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도연우예요.”
연우가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높였다.
“도연우.”
선오가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사실상 연우는 그때 처음으로 선오의 얼굴을 바로 보았다.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기에 관심을 주지 않았던 탓이다.
강화 그룹 삼 형제의 외모가 출중하다는 것은 예전부터 유명했다. 그들의 아버지인 강준영 회장도 젊었을 땐 웬만한 배우보다 멋진 외모의 소유자였으니.
분명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도, 막상 선오의 얼굴을 보니 예상보다 더 잘생긴 얼굴에 놀라고 말았다.
또렷한 눈썹과 콧대, 쌍꺼풀 없이 큰 눈, 붉은 기가 도는 입술, 작은 얼굴형까지. 그는 호불호 없이 모두가 좋아할 만한 얼굴이었다.
“야, 강선오. 이번엔 저 신인배우야?”
“오늘따라 좀 적극적인데?”
“하여튼 X끼. 지 취향은 귀신같이 잘 찾는다니까.”
이쪽 일을 하며 웬만큼 잘생겼다는 배우들을 많이 만나봤지만 선오보다는 뛰어나지 못했다. 특유의 아우라가 선오를 더욱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왜 다들 그의 눈에 들려고 하는지 그제야 이해가 되는 연우였다.
그리고 이 세상은 불공평한 게 맞다. 이따금 신은 특정 인물에게 모든 능력치를 몰아주곤 한다. 이를테면 눈앞의 저 남자처럼.
“데려다줄까?”
“네?”
“집까지.”
자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선오는 다시 연우에게 말을 걸었다. 두 번이나 말을 걸었으니 단순히 우연이 아님을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취한 거 같아서.”
사실 연우는 조금도 취하지 않았지만, 그의 물음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연우의 긍정적인 대답에 선오가 씩 웃고선 그녀에게로 팔을 뻗었다. 손목에서 은근하게 아래로 내려간 손끝은 마침내 연우의 손에 닿았다.
그 간지럽고 우글거리는 감각은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가자.”
연우는 언제나 조연을 맡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주연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사람들은 그녀를 부러워했고, 그녀의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와 동시에 선오는 연우의 마음속에 조용히 들어왔다. 그리고 나날이, 나날이 커져 갔다.
순수란 찾아볼 수 없는 이 바닥에서 마주친, 순수한 첫사랑이었다.
“머릿결이 좋네.”
“아…… 관리를 받아서요.”
“예쁘다고.”
그렇게 연우는 선오를 처음 만났다.
재미있는 파티가 열린다는 말에 끌려서, 인맥을 쌓을 수 있는 좋은 자리라는 꼬드김에 넘어가서, 예술계 유명한 인사들이 모두 모인다는 귓속말에 혹해서, 참석한 그 자리에서.
연우를 기다리고 있던 건 재미있는 파티도, 존경하던 영화 감독과의 만남도, 동경하던 대배우와의 친분도 아닌 전혀 다른 세계의 재벌, 강선오였다.
인생은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또 그 의외의 방향은 연우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 버렸다.
생소하면서 식상하게도 운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