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눈에는 눈, 이에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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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눈에는 눈, 이에는 이
2022.12.19.
강화 가(家) 남자들이 모두 모여 정기적으로 식사를 하는 날이었다.
표면적으로는 가족끼리 안부나 묻자는 취지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보기보다 무겁고, 심각한 대화가 오가는 자리였다. 사실상 강화 가(家) 주요 안건은 이곳에서 모두 결정된다는 말이 과장은 아니었다.
그랬기에 언제나 화기애애할 순 없었지만, 오늘은 유독 더 서늘한 분위기였다.
다들 불편한 심기를 굳이 감추지 않고 드러냈으며, 식어 가는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준오 놈은 어째 코빼기도 안 보입니다?”
오랜 침묵을 깨고서 입을 연 것은 태오의 고모부이자, 강화 증권의 사장인 조형만이었다.
“나이 많은 우리도 꼬박꼬박 참석하는데 지 까짓 게 뭐라고.”
“그러게나 말이야. 게다가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그러자 옆에 앉은 강문영 강화 건설 사장이 거들었다. 강문영 사장은 동생인 강준영 회장에게 왕좌를 빼앗긴 비운의 인물이었다.
“준오가 노지수 그 여자 집을 들락날락한다며.”
“그게 정말입니까?”
“거, 참. 무슨 그런 황당한 경우가.”
문영의 한 마디에 테이블이 웅성댔다. 태오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서 어른들을 차갑게 훑었다. 줏대 없이 흔들리는 노인네들을 보는 것도 지겨웠다.
“이보시게, 강 회장. 그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 먼저 상의했어야지. 그래도 내가 자네 형인데. 안 그래?”
대화의 주도권을 끌고 온 문영이 동생인 준영에게 몸을 기울였다. 준영은 대꾸 없이 노년을 향해 걸어가는 중인 제 형을 빤히 바라볼 뿐이다.
물론 문영이 제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진 않으리라는 것은 준영도 알았다. ‘후계자’ 자리는 즉 장남의 몫이라는 암묵적인 룰이 깨졌던 그 순간, 문영의 얼굴엔 치욕과 격노가 가득했다.
그날 이후 형제의 처지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문영은 2순위가 되었고, 모든 진리가 준영을 따라 흘렀다.
“자식이 다 컸어도 무릇 부모라면 잘 다스려야지. 그놈이 손에 쥐고 있는 우리 강화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게다가 백화점과 면세점 사업은 미래 전망이 아주 좋다고.”
오랜만에 건수를 잡아 신이 났는지 문영은 비열한 입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그 천박한 여자를 엄마랍시고 따르는 놈을…….”
쾅. 참다못한 선오가 테이블을 세게 내려쳤다. 선오는 당장이라도 문영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준오는 선오의 가장 예민한 부분이었다. 준영은 팔을 뻗어 감정적인 아들을 진정시켰다.
문영은 오만하게 턱을 들고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라도 적임자를 찾든가, 아니면 준오 그놈더러 노지수와 연을 끊고 우리에게 무릎 꿇고 빌라고 해. 명심해 두라고. 이건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야. 그 멍청한 자식이 우리 집안에 먹칠을 하고 있어.”
“형님. 심기가 불편하신 건 알겠습니다만.”
상기된 문영의 얼굴과 달리 맞받아치는 준영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했다.
“말조심해 주십시오. 그래도 제 아들놈인데.”
문영이 파안대소했다.
“아들은 무슨. 반쪽짜리 피가 흐르는 놈인데. 감쌀 걸 감싸. 이제 보니 강 회장 자네도 늙어 가나 보군. 퍽 감성적으로 변하는 것을 보니. 자네 진짜 아들은 태오 하나야.”
문영의 눈엔 선오와 준오는 아예 배제된 채 태오만 보이는 듯했다. 준영이 들고 있던 수저를 탁 내려놓고서 조소를 지었다.
태오의 모습이 보임과 동시에 그의 왕년의 모습이 보였다. 문영은 본능적으로 눈동자가 흔들렸다. 티를 내지 않으려 나름대로 애썼겠지만, 준영의 눈엔 고스란히 보였다.
“형님은 여전하시네요. 현명해질 나이가 되어서도 이토록 선을 넘는 것을 보니.”
“강 회장.”
이전의 굴욕이 떠오른 문영은 엄한 목소리로 동생을 꾸짖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무리 형님이라고 하시더라도 하실 말, 안 하실 말은 구별하셔야죠.”
이미 준영은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었으니. 예의상 이어오던 형님 대접을 집어치우기로 결심한다면, 애석하게도 문영의 존재감은 바람 앞 등불에 불과했다.
“뭐야?”
“그럼 저도 덩달아 형님께 무례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선오가 뜻밖이라는 시선으로 준영을 바라보았다. 그가 마치 저와 준오를 감싸 주려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오와 준오를 향한 멸시를 모조리 모른 척하던 준영이었다.
“작년 민오가 강화 건설 내에서 낸 적자가 얼마지요?”
민오는 문영의 첫째 아들이었다. 문영은 민오가 자신의 설욕을 갚아 주길 내심 바랐지만, 이번에도 틀려 먹었다. 문영이 보기에도 민오는 태오를 이길 만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 적자, 강화 백화점에서 다 메꾼 거로 아는데.”
“이봐. 민오는 내 아들이야! 감히 누구랑…….”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당신이 나의 아들을 건든다면 기꺼이 나도.
“준오도 내 아들입니다.”
준영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아들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며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줄 알았더니, 빛나는 안광은 여전했다. 문영을 포함한 모든 경쟁자들을 겁에 떨게 했던 그 안광이.
“그리고 형님께서는 강화 백화점 쪽 지분이 거의 없으신 거로 아는데, 무슨 상관이신지. 내가 자식들에게 합법적으로 물려준 재산인데.”
“섭섭하게 말하네. 난 그저 우리 강화 그룹의 미래를 걱정하는 거네.”
“형님으로 대접해드릴 때.”
언성이 아주 살짝 높아졌다. 그뿐, 노기(怒氣)를 드러낸다든가, 위협을 가하는 언행은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모두가 준영의 포스에 압도당했다.
문영은 견디지 못하고 준영의 눈을 피했다. 주제도 모르고 나불대던 입은 꾹 다물어졌다.
“얌전히 받아드시란 말입니다. 험한 꼴 당하지 마시고.”
그 자리에서 입꼬리를 비죽 올리는 것은 오로지 태오뿐이었다. 이질적인 웃음에 시선들이 태오에게로 모였다.
선오는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미친놈이라니까.
“아, 죄송합니다. 좀 웃겨서.”
“뭐가 웃긴다는 거냐?”
“아니, 제 동생들을 낳으라고 아버지께 종용하신 건 다름 아닌 큰아버지시잖아요.”
문영은 이 비극의 시발점이었고, 모두를 설득해 준영이 제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큰아버지께서 그러시면 안 되죠. 강선오와 강준오를 다른 계급인 양 취급하시고, 업신여기시고. 이 무슨 아이러니입니까?”
“태오 너까지 왜 그러냐?”
믿었던 태오에게까지 비웃음을 사자 문영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큰아버지께서 얘들을 제일 아껴 주셔야 하는 거 아니냔 말입니다. 이 엿 같은 집안이 누구 때문에 풍비박산이 났는데.”
“이, 이것들이 진짜 단체로 미쳤구먼, 미쳤어. 우리 강화 가(家)는 너희 일가의 소유가 아니야.”
문영이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닦아 냈다. 준영이 픽 웃었다.
“압니다. 그러니 적자를 내는 쓸모없는 계열사와 사람까지도 모두 안고 가는 것이겠지요.”
준영의 태연한 말에 찔린 몇몇의 얼굴이 붉어졌다. 준영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나이가 들면 몸도 굽는다던데, 준영은 여전히 30대처럼 풍채가 좋았다.
“전 앞으로 그 어떤 무능한 강 씨도 쫓아낼 생각 없습니다. 태오에게도 우리의 사람을 내치지 말고 끝까지 책임지라고 지시해 놓은 상태입니다.”
준영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테이블을 완전히 가로질렀다.
“단, 이것 하나는 꼭 명심하세요. 선오, 준오는 내 아들입니다. 태오와 다를 게 없는 내 손가락들입니다. 두 번 다시 이 아이들을 모욕하면 후회할 겁니다.”
선오는 위압감이 흘러넘치는 준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식이 궁지에 몰렸을 때 아비가 뭔 짓인들 못 하겠습니까. 설령 형님이라 해도 포악하게 변해야겠지요.”
그건 선오와 준오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강 회장의 첫 선언이자, 강화 가(家) 전체에 던져진 묵직한 경고였다.
* * *
밥 한술 뜨지 못한 사람들이 떠나고, 식당엔 세 부자만 남았다.
물을 한 모금 하신 강 회장이 아까부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선오에게 물었다.
“아직도 네 엄마는 안 찾아갔냐?”
“…….”
“그래. 마음대로 해라. 너도 이제 곧 서른이니.”
“갑자기 왜 그러세요?”
선오는 강 회장의 말에 대한 대답 대신 불쑥 그렇게 말했다.
“돌아가실 날이라도 받아 두신 거예요?”
“이놈, 아비한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잖아요. 이제껏 외면하시더니 왜 갑자기 저와 준오 편을 드시는 겁니까?”
저를 보호해 준 아버지에 대한 고마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선오는 따지듯 강 회장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강 회장은 제 마음을 몰라 주는 아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갑자기 변한 적 없다. 믿고 말고는 네 마음이겠지만.”
“하, 이제 와서? 그렇게 울고불고 손 내밀 때는 무시하더니, 이제 와서?”
“……미안하다.”
몹시 드문 일이었다. 강 회장이 누군가에게 사과하는 일.
누군가에게 사과를 할 만한 일을 만들지 않는 완벽주의자이거니와 그런 성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 강 회장의 사과를 듣는 것조차 아들들의 특권임을 선오는 몰랐다.
“행여나 내 눈치를 보느라 네 엄마를 만나지 않는 것이라면 그럴 필욘 없다.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난 너한테 강화 전자를 물려줄 거야. 물론 준오도 마찬가지고.”
선오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또한 오늘부터 집안사람들도 끽소리 못 할 테니 편한 대로 해라.”
거기까지 말한 강 회장이 자신의 재킷을 팔에다 걸치고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태오야. 새아가한테 건강 조심하라고 전해 다오. 난 정말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으니.”
절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소유는 기어이 시아버지에게도 태랑이의 소식을 몰래 전한 모양이다. 못 말리는 소유에게 당장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도 방을 나가려던 강 회장은 문득 뒤를 돌아 자신의 아들들을 응시했다.
“너희들은 나처럼 되지 마라. 형제지간에 원망만 남는 사이가 되지 말라고. 너희는 젊으니까, 아직 바로잡을 시간이 있잖아.”
태오와 선오가 무어라 대답도 하기 전에 강 회장은 완전히 사라졌다. 냅킨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선오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노인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거 아니냐?”
“아버지한테 말버릇하고는.”
“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냐.”
선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태오는 손으로 턱을 괴고서 테이블을 툭툭 치다가 말했다.
“강준오, 그 사람 집으로 아예 들어가서 같이 산다더라.”
“……뭐?”
“나도 소유한테 들었어.”
선오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안 그래도 요즘 들어 준오와 연락이 통 안 되던 참이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런데 상의도 없이 그런 짓을 벌였을 줄이야.
“너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태오가 무어라 말을 덧붙이려는데 때마침 태오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한 태오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
― 야아. 언제 와. 나 진짜 엄청 심심하거든? 늦어도 9시 전엔 들어온다며.
“가고 있어. 미안해. 그렇게 심심해?”
아까 전 큰아버지를 한 방 먹이던 인간과 생판 다른 사람 같았다. 꿀이 뚝뚝 흐르고, 다정함이 넘쳤다.
― 어. 심심해서 죽을 것 같아.
“죽으면 안 되지. 조금만 기다려.”
내부가 조용한 탓에 본의 아니게 형 부부의 알콩달콩한 대화를 들어 버린 선오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웩.”
결국 선오가 참지 못하고 토하는 시늉을 했다. 태오가 고개를 휙 돌렸다.
― 응? 방금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지나가던 개가 뭘 잘못 먹었는지 토를 좀 하네.”
태오는 눈을 부라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오는 어깨를 비쭉 올리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 헐. 불쌍하다. 병원 데려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안 그래도 될 것 같아. 못돼처먹은 개X끼라서 좀 아파도 돼.”
거참, 듣는 못돼처먹은 개X끼 기분 나쁘게. 선오는 얄미운 표정으로 태오를 약 올렸다.
“아주 보통 못돼처먹은 게 아니야. 언제 철이 들려는지. 쯧.”
― ……너 모르는 강아지한테 왜 그래?
영문을 모르는 소유만 어리둥절할 뿐이다.
― 불쌍한 강아지 괴롭히지 마, 강태오.
선오는 킥킥 웃으며 그곳을 떠났다. 역시 형수님은, 세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