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이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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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이혼해요
2022.12.05.
“하나 확실하게 해 두고 싶은 게 있어.”
태오와 선오의 설전은 밥상에서도 계속되었다.
이때만큼은 말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소유와 준오는 얌전히 있었다. 가끔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 내야 풀리는 일들도 있기 마련이니까.
“아버지와 네 흔적을 지우고 싶어서 발악하는 게 아니야. 너는 동의 못 하겠지만 강화 전자는 내 자존심이자 나의 큰 업적이야.”
누군가는 선오를 보며 낙하산이라 수군댔지만, 선오는 지금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몹시 치열하게 살았다. 밑바닥에서부터 이를 악물고 버틴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니 선오 역시 사적인 감정으로 강화 전자가 무너지는 꼴을 가장 용납하지 못하는 이 중 하나였다.
“국제 정세가 불안정하게 변하고 있어.”
지난 주주총회와는 달리 태오는 말을 끊는다거나 비아냥대지 않고, 그저 무표정으로 선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당장의 작은 손해를 감수해서라도 미래의 큰 손실을 막으려는 거라고. 이미 일이 벌어지고 난 후에 하는 수습은 의미 없으니까.”
태오가 수저를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러곤 선오를 빤히 쳐다보았다.
“할아버지가 강화 전자를 끔찍하게 생각하셨던 것도 알아. 네 말대로 할아버지는 날 손자로 받아들이지 않으셨을 수도 있겠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선오가 처음부터 이런 태도를 보여 줬다면. 회사 경영에 이토록 진지하다는 것을 알려 줬다면.
적어도 여자와 술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심한 놈이 할아버지의 유산을 망가뜨리려 발악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을 테니까.
“아버지가 나와 어머니를 버렸다고 생각했어.”
뒤이어 들려온 태오의 대답은 방금 전 맥락과 전혀 관련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삼 형제의 관계를 관통하는 제일 중요한 말이기도 했다.
“너희는 너희가 소모품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나도 내가 아버지의 소모품이라고 생각했어.”
‘강화 그룹’이라는 거대한 왕관을 쓰는 자, 그리고 그 왕관을 물려받을 자.
부자 관계가 아닌 그 기형적인 관계 속에서 태오도 강 회장의 다음을 위해 존재하는 소모품이었을 뿐이다. 만약 태오가 사라진다면 선오가, 선오가 사라진다면 준오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만일’이 그들의 전부라고, 집안 어른들은 주입해 왔다.
“나의 유사시를 위해 준비된 너희의 등장이, 어떻게 내게 달가웠겠어?”
소유는 가만히 듣고 있기가 어려워 고개를 푹 숙였다. 아마 동생들을 향한 태오의 첫 심정 고백이었을 테다.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받던 어머니가, 어떻게 너희를 사랑하겠어?”
제아무리 날고뛰는 집안의 딸인 서령이라 할지라도 강화 가(家) 사람들에겐 후계자를 낳아 줄 부품이었다.
그래서 난임 판정을 받고 난 후 서령은 내부에서의 입지가 좁아졌다.
그런 상황에서 등장한 선오와 준오는 그녀가 강화 가(家)엔 불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방증하는 꼴만 되었다.
“하나하나 따져 보자면 사정이 없는 사람은 없지. 다만 너처럼 힘들다는 티를 내지 않을 뿐이야.”
태오의 이야기를 듣는 선오의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그러니까 떼쓰고, 어리광 부리지 마. 적어도 강준오는 너희만이 피해자가 아니란 것쯤은 알잖아.”
“강태오.”
“그렇게 징징거리면서 말하면 나는 네 모든 의견에 반대를 할 수밖에 없잖아?”
소유가 테이블 아래 태오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선오를 대하는 태오의 얼굴은 여전히 덤덤했지만, 소유와 맞잡은 태오의 손은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뜨거웠다.
“그리고 이전에도 말한 적 있는데. 우리랑 잘 지내고 싶은지, 아니면 끝까지 우리를 원망하며 살 건지 노선 똑바로 정해. 그래야 네 장단에 맞춰 줄 수 있으니까.”
진작 이렇게 터놓고 이야기를 했다면 지금의 우리는 조금 달랐을까. 질문을 던져 보지만, 이미 지나온 과거는 답을 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랑 잘 지내고 싶은 거라면, 같이 엿 먹여 보자고. 그 엿 같은 노인네들.”
“…….”
선오의 생각까진 알 수 없지만, 준오는 이 상황이 꿈처럼 아득했다. 아무리 바라고 바라도 절대 오지 않을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 생각했다.
“우리 태랑이도 보고 싶으면 보든가.”
태오와 같은 편으로 엮이는 일. 태오가 아주 조금이나마 곁을 주는 일.
이번 해는 정말이지 여러모로 변화가 많은 해였다.
“생산 공장 이전 건은 네 뜻대로 해.”
* * *
“노지수 그 여자 집에 다녀왔나?”
언제나처럼 침묵만이 흘렀어야 할 저녁, 강준영 회장이 문득 서령에게 물었다. 서령이 자신의 귀걸이를 만지작대며 남편을 돌아보았다.
“이젠 내 뒷조사도 하고 다녀요?”
“당신 뒷조사가 아니라 노지수 그 여자의 일상이 내게 보고된다는 쪽이 더 맞겠지.”
서령이 그리 실망할 것도 없다는 표정으로 픽 웃었다. 그러나 강 회장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거긴 왜 갔어?”
“내가 당신에게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할 의무는 없어요. 아무리 아이를 하나밖에 못 낳은 와이프일지라도.”
분명 강 회장을 비꼬려고 한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말은 서령에게도 생채기를 냈다.
강 회장이 그대로 자신을 지나치려는 서령의 손목을 잡았다.
“당신 같은 사람이 만날 만한 여자가 아니야. 당신과는 부류가 다르다고.”
“그래서요?”
“두 번 다시 안 만났으면 좋겠군.”
“어머나. 이 이야기를 선오랑 준오가 들었다면 어떤 반응일지 궁금하네요.”
서령이 차갑게 강 회장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부류가 다르다고요? 아니요. 우린 비슷할지도 몰라요. 결국 당신의 후계자를 낳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니까.”
“그게 무슨…….”
“아닌가요? 이제 와서 홀로 고결한 척하지 말아요.”
강 회장이 지수를 사랑해서, 연분이 난 것이 아니다. 강 회장은 지수를 사랑한 적 없다.
차라리 불륜이었더라면 머리론 이해할 순 없었겠지만, 인간의 무수히 많은 죄 중 하나였노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테다.
하지만 강 회장과 그 일가가 한 짓은 인간이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그들에겐 푼돈이나 다름없는 돈으로 아이를 사 온 격이니.
“그런데 좀 웃기네요. 그렇게 경멸하는 여자가 낳은 두 아들은 또 끔찍이도 아끼니.”
선오와 준오가 입적된 후,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강 회장만큼은 첫째 아들인 태오와 똑같이 그들을 대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이 집안에서 가장 역겨운 건 위선자인 당신인지도 몰라요.”
서령을 붙잡은 강 회장의 팔이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서령이 팔짱을 끼고서 동등한 위치에서 강 회장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지금 그 애들 몸속에 흐르는 피의 절반을 외면하면서, 동시에 사랑해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신과 그 애들은, 노지수 그 여자와는 결이 달라. 어울리지 않는 편이 좋겠어.”
불쑥 어떠한 충동이 떠올랐다.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만약 오늘 강 회장이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서령도 끝내 묻어 두었을지도 모른다.
서령은 강 회장이 자초한 일이라 여기며 폭탄 발언을 했다.
“노지수 그 여자와 만나는 걸 허락해 줘요.”
서령의 가장 깊은 속에 은은하게 남아 있던 지수의 서러운 얼굴이 표면 위로 떠 올랐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평생을 고통받고 있는 그 어리석은 얼굴이.
“……뭐?”
서령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강 회장이 되물었다.
“선오와 준오가 친모를 만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요.”
서령은 또박또박 더 자세히 풀어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강 회장의 얼굴이 보기 좋게 찡그려졌다.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참았다.
“그건 안 돼.”
무거운 적막이 흐른 이후 강 회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표면적으로 선오와 준오는 당신과 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야. 괜한 짓을 했다가 이상한 소문이라도 들리면 낭패야.”
끝까지, 정말 끝까지 회사 걱정만 하는구나. 이 와중에도 체면을 차리는구나. 당신이란 사람은.
“게다가 노지수 그 천박한 여자한테 우리 애들이 물들어 버리기라도 한다면…….”
“그럼 이혼해요.”
서령이 강 회장의 말을 끊었다. 고작 여섯 글자뿐이었는데, 내뱉기까지 참 오래 걸린 말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어쩌면 난임을 판정받은 후부터였을까.
나는 줄곧 당신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당신 오늘따라 왜 이래.”
그리고 나는 당신이 내 부탁을 들어주길 바라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 계기를 핑계 삼아 당신을 떠나고 싶은 걸까.
스스로도 답을 낼 수 없을 정도로 서령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나는 당신 옆에서 반짝이는 액세서리가 아니에요.”
처음부터 둘의 관계가 이러진 않았던 것도 같다. 제아무리 집안끼리의 이익을 위해 맺어진 사이라고 하더라도 이따금 서령은 남편을 보며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강 회장도 서령과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차이를 뒀다. 조금은 자상한 남편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것도 같다.
“지금까지는 당신이 나를 시험에 들게 했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당신을 시험에 들게 할 차례예요.”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진.
“확실히 알고 싶어졌어요. 당신이 나란 존재를 어떻게 여기는지. 나와의 이혼을 막기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무슨 수를 써서도 돌아갈 수 없는 둘의 애틋한 시간에, 서령이 씁쓸하게 웃었다.
“과연 나를 위해 그 케케묵은 노인네들의 입김에 맞설 수 있는지.”
“여보.”
“만약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면, 난 정말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맞겠죠. 그럼 이혼을 해야죠.”
그 시간 속 나는 당신을 사랑했을까. 그래서 당신을 더 미워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혼하면 당신 입장에선 오히려 더 좋은 거 아닌가요? 당신 친구들처럼 젊은 여자들이랑 놀아나고, 더 이상 집에서 내 눈치 볼 일도 없을 테니.”
집안끼리의 이득도 적당히 봤고, 다음 세대로 권력이 옮겨 가고 있는 이 시점, 강 회장과 서령이 결혼생활을 지속할 명분은 없었다.
“뭐가 더 당신에게 유익할지 신중하게 생각해 봐요.”
서령이 미련 없이 강 회장을 지나쳤다.
강 회장이 머리를 대충 뒤로 넘겼다. 언제나 흠 없이 뒤로 넘기고 있던 머리들이 흐트러져 몇 가닥이 이마 아래로 내려왔다.
“오늘 정말 당신답지 않게 구는군.”
서령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난 원래 이런 사람이었어요. 그동안 억눌려 있었을 뿐.”
“…….”
“나란 사람에 대해 관심이 있긴 했어요?”
강 회장은 거칠어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때, 강 회장의 휴대폰에 전화 한 통이 날아들었다. 그의 수석 비서였다.
― 회장님. 저녁 시간에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강화 백화점 강준오 이사님께서 내일 단둘이서 뵙기를 원한다고 하십니다.
준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강 회장도 알고 있었다. 노지수 그 여자를 보던 준오의 시선은 마치 소년의 눈망울처럼 위태로웠다.
이래서 노지수 그 여자를 꼭꼭 숨겨 놓았던 건데.
욕심도, 미련도 없는 놈이라 언제든 훌쩍 떠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내일 일정 때문에 곤란하다고 전해드릴까요?
강 회장이 대답이 없자 비서가 되물었다.
“아니.”
강 회장은 고개를 저으며 넥타이를 풀어냈다. 갑갑했던 목이 그제야 좀 시원해졌다.
“편한 시간에 들르라고 해. 그리고 내일 일정은 모두 취소하고.”
― 네? 모두, 말입니까?
“그래.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