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해일 같은 환희
(63/95)
63. 해일 같은 환희
(63/95)
63. 해일 같은 환희
2022.11.04.
새해의 설렘도 어느새 가라앉고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유아 물산은 그야말로 일복이 터졌다.
의료기기 사업 정리로 인한 손실이 강화 섬유와의 계약 체결로 메꿔졌으며, 몇 배로 늘어난 수익만큼 일도 그만큼 늘었다.
“그럼 강화 섬유 본사엔 나랑 송 대리가 가는 걸로 하고, 정 팀장은…… 정 팀장?”
효율적으로 업무 분배를 하던 도진이 꾸벅꾸벅 조는 소유를 재차 불렀다.
“정 팀장.”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자 송승아 대리가 소유를 툭 찔렀다. 그러자 소유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떴다.
“……죄송합니다.”
“그럼 정 팀장이 카탈로그 번역하는 걸로 하고, 회의 마무리합시다.”
도진의 말에 직원들이 파일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직원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회의실엔 도진과 소유만이 남았다.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엄격한 정 이사에서 다정한 사촌오빠로 돌아온 도진이 물었다.
“미안해, 오빠.”
소유가 손을 모아 사과했다.
“몸이 안 좋나 봐.”
“요 며칠 계속 그렇던데?”
근래 들어 소유는 자주 졸았고, 몸을 가누지 못해 엎드려 있는 일이 잦았다.
소유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며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사촌오빠로서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진은 아직도 몽롱한 소유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뜨끈뜨끈한 미열이 느껴졌다.
“안 되겠다. 너 오늘은 반차 내고 집에 가.”
“괜찮아. 나만 어떻게 가. 다들 바쁜데.”
“네가 가도 되는 이유 세 가지를 말해 줄게.”
뭘 또 세 가지까지야.
사업설명회를 하는 것처럼 도진은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첫째, 이번 인원 증원으로 우린 작년만큼 안 바빠.”
“음.”
“둘째, 카탈로그 번역은 다음 주내로만 끝내면 되는 작업이야.”
“그렇긴 한데.”
“셋째, 너 작년에 연차 몇 번이나 썼지?”
“…….”
세 번째 이유에서는 소유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아버지 회사라도 근로법 위반하면 벌금 먹어요.”
도진이 엄하게 말했다.
“실질적 총책임자가 나인 상황에서 나를 엿 먹이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얼른 들어가 쉬세요, 정 팀장님.”
가만 보면 도진과 태오는 닮은 면이 많았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말문을 막히게 해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게 특기라든가.
“내가 강 서방한테 직접 전화해서 너 데리고 가라고 해?”
“안 돼! 연초라서 태오도 바빠.”
“그럼 썩 사라지렴.”
어쩔 수 없이 소유는 못 이긴 척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사실 회사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그렇지, 몸은 간절히도 휴식을 원하고 있었다.
“수고하십쇼, 정 이사님. 송구하지만 저 먼저 퇴근합니다.”
“아, 근데 너 혹시…….”
소유의 뒷모습을 보던 도진이 중얼거렸다.
증상이 제 와이프가 아이들을 임신했을 때의 증상과 무척 비슷했기 때문이다.
“응?”
“아니다.”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꼭 얼른 임신하라고 부담 주는 오지랖 넓은 집안 어른이 되는 것 같아서.
알아서 잘하겠지. 이제 쟤네도 벌써 서른인데.
“일 생각하지 말고 푹 쉬라고.”
* * *
한숨만 자고 일어나서 일을 좀 해 둬야지, 다짐했던 소유는 태오의 퇴근 시간까지 잠들어 버렸다.
“소유야. 소유야.”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태오의 손길에, 소유가 힘겹게 눈을 떴다.
“태오야.”
아픈 게 내심 서러웠는지 태오의 얼굴을 보자마자 소유가 어리광을 부렸다.
소유는 태오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아직도 몸은 무겁기만 했다.
왠지 모르게 속이 울렁이는 것 같기도 하고.
“왜 이 시간에 자고 있어? 회사는?”
“반차 썼어. 아파서.”
“아팠어?”
태오가 소유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아픈데 나한텐 왜 연락을 안 했어?”
태오가 서운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바쁘잖아.”
“아무리 바빠도 네가 아픈데 내가 모르는 게 말이 돼?”
“죽을 것처럼 아프진 않았어. 요즘 무리를 좀 했나 봐.”
“죽을 것처럼 아프든, 살 것처럼 아프든지 내가 알아야지!”
아픈 사람이 안 아픈 사람을 달래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하지만 소유의 기분은 그리 썩 나쁘지 않았다.
태오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알았어. 화내지 마.”
“화내는 게 아니라 걱정하는 거지. 약속해. 다음부터는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하기로.”
“제일 먼저 말하면?”
“회의 중이라도 뛰쳐나올게.”
이미 그런 전적이 있는 태오였기에 빈말은 아닐 게 분명했다.
어떤 중요한 일이 있더라도, 태오는 제가 아프다고 하면 다 내팽개치고 달려올 것이다.
평소였으면 그러면 안 된다고 그를 타일렀겠지만, 오늘은 왠지 그 장단에 맞춰 주고 싶어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알았어. 약속.”
그제야 태오가 표정을 풀었다.
“얼마나 아파? 병원은 안 가도 돼?”
“병원 갈 정도는 아니야. 그냥 약한 몸살기야.”
태오는 죽을 주문하고서, 소유 옆을 떠날 줄을 몰랐다.
“열나잖아, 내 새끼.”
태오가 소유의 뜨거운 얼굴을 찬 손으로 식혀 주었다.
몸살기 있으니까 당연히 열 있지.
“내 새끼, 하루 사이에 살도 빠졌나 봐.”
“그 정도는 아니야.”
“아니야. 남들은 못 알아보지만 난 알아. 아주 미세하게 빠졌어.”
정말이지 못 말리는 팔불출이다.
팔이라도 열심히 주물러 주려는 태오의 지극정성 간호를 받고 있자니 죽이 금방 도착했다.
“기다려. 내가 세팅해서 올라올게.”
태오가 이 말 들으면 크게 화내겠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픈 것도 나쁘진 않네.
꼭 공주 된 것 같아.
소유가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태오를 기다렸다.
잠시 후 태오는 쟁반에 여러 종류의 죽을 가지고 돌아왔다.
채소죽, 전복죽, 게살죽, 삼계죽, 녹두죽까지.
많이도 시켰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이것저것 시켜 봤어.”
분명 방 안에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할 것이다.
머리로는 그렇게 예상이 되는데 코가 받아들이는 냄새는 전혀 달랐다.
왠지 모를 역함이 느껴졌다.
태오를 보며 가라앉았던 울렁거림이 다시 심해졌다.
소유는 참다못해 입을 틀어막고 욕실로 달려갔다.
“소유야. 왜 그래?”
먹은 것도 없는 속을 게워 냈지만 속은 편치 않았다.
“죽에서 이상한 냄새나. 상한 거 아니야?”
방금 시킨 건데 그럴 리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태오는 가장 가까운 죽을 한 입 떠먹었다.
흔히 알고 있는 죽 맛이 그대로 느껴졌다.
고소하고 담백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보고서 소유가 다시 구역질을 했다.
태오가 소유의 옆에 털썩 앉았다.
여린 몸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는 게 더 어려웠다.
“너무 가까이 오지 마.”
그 와중에도 부끄러운지 소유는 태오를 밀어냈다.
하지만 그럴수록 태오는 더욱 가까이서 소유의 등을 두드리고 쓰다듬었다.
“부끄럽다니까. 조금 떨어져.”
“부끄럽긴 뭐가 부끄러워. 부부끼리.”
태오는 안쓰러운 소유를 꼭 끌어안았다.
한참 후에야 몸을 일으킨 소유는 입을 헹구고 나서 말했다.
“미안한데, 나 오늘 죽 못 먹겠어. 후각이 예민해졌나 봐. 그것 좀 치워 줄래?”
생각만 해도 다시 구역질이 올라오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금방 치우고 올게. 누워 있어.”
어느새 목소리가 가라앉은 태오가 쟁반을 들고 사라졌다.
“괜히 미안하네.”
태오의 정성을 무시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터벅터벅. 태오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유는 기운이 없는 몸을 침대에 파묻었다.
내일 진짜 병원이라도 가 봐야 하나, 싶을 때쯤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조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너.”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태오가 물었다.
“이번 달에.”
“응?”
“이번 달에…….”
“이번 달에, 뭐?”
무어라 대꾸할 힘도 없었다.
태오는 소유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비밀이란 없는 부부라 소유의 휴대폰 잠금을 푸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태오는 소유의 특별한 주기를 기록하는 달력 앱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소유도 무언가를 깨닫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너 이번 달에, 했어?”
“……아니.”
소유가 눈이 동그래진 채 입을 틀어막았다.
부부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설마. 설마.
태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어찌나 마음이 급했던지 태오는 소유의 휴대폰을 든 채 그대로 뛰쳐나갔다.
소유의 심장이 터질 듯 뛰기 시작했다.
마치 태오에 대한 마음을 처음 깨달았을 때처럼.
그리고 아직은 납작하기만 한 배를 쓰다듬었다.
실망할까 봐 기대하긴 싫은데, 자꾸만 저도 모르게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태오가 상심하면 어쩌지.
그러고 보니, 생일날 호텔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태오가 모두지 믿기지 않을 속도로 돌아왔다.
“종류별로 다 사 왔어.”
태오가 약국 봉투를 흔들었다.
“어떻게 벌써 왔어?”
초인적인 힘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태오가 가쁜 숨을 내쉬며 침대에 털썩 앉았다.
살면서 무언가를 위해 이토록 필사적으로 달려 본 적이 있었을까.
그런 태오가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소유야. 내 새끼야.”
“응?”
“잘 들어. 나는 결과가 어떻든 괜찮아. 그러니까 네가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상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서로를 너무 사랑하는 부부는 똑같은 걱정을 했다.
태오의 말 덕분에 소유의 마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우린 아직 젊어.”
소유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여러 종류의 테스트기를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저를 졸졸 따라오는 남편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이것까지 같이 하려고 하지 마. 여기서 기다려.”
“……응.”
함께 들어가려던 태오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소유는 홀로 안으로 사라졌다.
실제 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태오가 느끼는 시간은 마치 억겁 같았다.
1초에 한 번씩 앉았다가 섰다가 얼굴을 쓸어내렸다.
초조함에 온몸이 전소해 버릴 것만 같은데, 그렇다고 섣불리 노크를 할 수도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무의식적으로 문을 부숴 버리기 직전, 다행히도 소유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는 등 뒤에 테스트기를 감추고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봐도 돼?”
태오는 타들어 가는 입을 겨우 떼고서 말했다.
이윽고 소유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크고 동그란 눈망울이라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 더욱 선명히 보였다.
태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울지 마. 왜 울어.”
태오는 소유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동요를 감추고 그녀를 위로했다.
“괜찮아. 실망하지 않기로 했잖아.”
“…….”
“난, 지금은 너만 있으면 돼. 그러니까 너도…….”
“태오야.”
소유가 떨리는 목소리로 태오를 불렀다.
“그게 아니라…….”
“응?”
“그게 아니라, 두 줄이야.”
소유가 아이처럼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두 줄이야, 두 줄.”
태오가 소유를 떨어뜨려 놓고, 테스트기를 확인했다.
모든 회사의 테스트기가 선명한 두 줄이었다.
“나 임신했다고.”
소유가 기쁨을 주체하지 않고 남편을 세게 끌어안았다.
태오는 온 세상이 멈춘 듯 정적을 느꼈다.
오로지 소유의 소리만이 태오의 귀에 들어왔다.
해일 같은 환희가 뒤늦게 태오의 육체를 집어삼켰다.
잠겨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호흡을 빼앗겨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벅차올랐다.
“사랑해.”
사랑해.
언어 능력이 마비된 태오는 그 순간,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사랑해, 정소유.”
더 멋진 축하 인사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투박한 사랑 고백만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착한 소유는 태오의 마음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에게 새로운 가족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