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비정상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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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비정상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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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비정상 남편
2022.10.14.
분명 육체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피곤함을 호소하고 있었는데, 잠은 들 수 없는 기나긴 밤이 지나갔다.
소유는 조금의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모닝콜이 울렸기 때문이다.
지난 며칠 동안 얼마나 성대한 불꽃이 터졌든, 얼마나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든 일상은 어떻게 해서든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다.
한숨을 쉬며 문을 열었던 소유가 우뚝 멈춰 섰다.
“잘 잤어?”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르는 태오가 서 있었다. 그도 소유만큼이나 잠을 이루지 못한 듯 평소보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잘 못 잔 거 같네.”
소유가 대답이 없자 태오가 스스로 답을 냈다.
소유는 터질 것 같은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입 안의 여린 살을 꽉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태오에게 안겨 그의 향기를 맡고, 그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얼굴 보러 왔어. 그래도 하루에 한 번씩은 봐야 살 거 같아서.”
다해나 재현에게 한없이 포악하게 굴던 태오였지만, 소유 앞에서는 그도 한낱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매일 소유 곁을 맴돌며, 소유가 허락할 때까지 기다리기만 할 테다.
“나 먼저 출근할게.”
억지로 씩 웃은 태오가 걸음을 돌렸다. 남편의 등을 보던 소유가 괴로운 얼굴로 머리를 쓰다듬다가 그를 불렀다.
“태오야.”
태오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우리 저녁에 이야기 좀 할까?”
태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리고 그는 서서히 멀어졌다.
그 넓은 등이 오늘따라 왜 그리 좁아 보였는지.
그 강한 사람이 오늘따라 왜 그리 약해 보였는지.
소유는 종잡을 수 없는 감정을 잡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건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공기를 잡아 두려는 시도만큼이나 부질없는 것이었다.
* * *
“정 팀장 오늘 좀 이상하네. 넋이라도 나간 사람처럼.”
간단한 피드백 메일을 한 시간이 넘도록 잡고 있는 소유에게 다가온 도진이 문득 말했다.
뭐, 그렇다고 업무적으로 큰 지장을 주는 정도는 아니라 문제 삼을 건 없지만 사촌오빠로서는 그냥 보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아,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보낼게요.”
도진의 말에 화들짝 놀란 소유가 허리를 바로 세웠다.
소유의 파티션에 팔을 걸친 도진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그럴 필요 없어.”
“네?”
“그럴 필요 없다고. 지금 점심시간이거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소유가 목을 쭉 빼고 사무실을 살펴보았다. 도진의 말대로 직원들은 점심을 먹으러 모두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새로 오픈한 중식당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느라 작은 소란이 있었는데도 소유는 전혀 모른 모양이었다.
“뭐가 그렇게 또 심각해?”
“아…….”
“같이 점심이나 먹을까?”
도진이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커피와 샌드위치를 흔들었다. 소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태로는 거하게 먹었다간 체할 것 같았다. 샌드위치처럼 간단한 음식이 딱 좋았다.
눈치가 빠른 도진은 마치 그런 소유의 상황을 안다는 듯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남매가 책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샌드위치를 먹기 시작했다.
“정다해 이야기는 들었어. 그래도 수술 잘 끝나서 다행이다.”
“응. 앞으로 어떤 장애를 안고 살아갈지 모르지만, 일단은 살았으니까.”
“정신없었겠다. 파티하다 말고 달려가서.”
도진은 무심한 목소리였지만 소유에겐 더할 나위 없는 담백한 위로가 되었다. 이젠 도진도 소유에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친오빠는 아니었지만, 친오빠 그 이상처럼 느껴졌다. 아버지에게도 말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도진에겐 할 수 있었으니까.
“오빠.”
“응.”
“나 힘들어.”
소유가 목이 멘 채로 말했다. 도진은 손에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나 정말 힘들어.”
소유에게서 동그란 눈물방울들이 톡톡 떨어졌다. 연이어 떨어지는 그것들이 그녀가 굉장히 마음고생이 심했음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무서워.”
도진이 티슈를 뽑아 소유에게 내밀었다.
“태오가 어떤 사람인지, 나만 모르는 거 같아서 무서워.”
“…….”
“태오가 또 잔혹한 행동을 할까 봐 무서워.”
“그래서, 강 서방을 사랑하는 게 어려워?”
도진의 물음에 소유는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짜 무서운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조금씩 더 태오를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는 거야.”
왜인지 소유의 대답에 도진도 안도가 되었다. 알게 모르게 도진은 태오도 소유만큼이나 아끼고 있었다.
“태오가 내가 사랑하면 안 되는 사람일까 봐 걱정돼.”
“소유야.”
“오빠. 태오는 보통 사람들과 사고 자체가 달라. 그리고 제 사람이 아닌 타인에겐 놀라울 정도로 매정해. 꼭 처음 보는 사람처럼.”
태오의 그런 면을, 어쩌면 소유보다 도진이 더 일찍 알아차렸을지 모른다. 이런 순간이 닥쳤을 때, 소유에게 어떤 말을 해 주어야 할지 바로 감이 잡히는 걸 보니.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비정상으로 보이는 게 아닐까?”
“……어?”
“너는 모두에게 정상인일까? 나는? 송 대리는? 고 이사님은?”
“…….”
예상치 못한 질문에 소유가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남들을 재단하는 게 아닐까. 우리랑 달라. 비정상이네. 조심해야지.”
“……그렇긴 하지.”
“사실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는 명확하게 나눌 수 없는데. 수학 문제처럼 답이 나오는 게 아니잖아.”
도진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소유의 코를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내가 보기에 강 서방은 그저 소유욕이 유독 강한 것처럼 보여. 그리고 자기 사람을 지켜야겠다는 책임감이 다른 가치보다 우위에 있는 거지.”
“…….”
“설령 강 서방이 진짜 소시오패스라고 하더라도 모든 소시오패스가 나쁜 길로 빠지는 건 아니야. 오히려 이 사회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경우도 많고. 너 그것도 편견이다?”
소유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도진의 말로 태오에 대한 모든 의문이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도진에게 털어놓은 것은 아주 잘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볼 땐 너도 정상은 아니야.”
웃으라고 덧붙인 말에 소유는 도진을 툭 쳤다.
“그러니까 강 서방이랑 대화 많이 나누고, 생각도 많이 한 다음에 최선의 결론을 내.”
“……응. 고마워, 오빠.”
“아, 오늘도 미련한 동생 때문에 점심시간 통째로 날렸네. 나도 그 중식당 가 보고 싶었는데.”
“내가 조만간 밥 살게, 오빠.”
“그래. 꼭 그래라. 비싼 거 먹을 거니까.”
닮지 않은 듯 닮은 남매가 서로를 보며 픽 웃었다.
“대신 강 서방이랑 문제 해결된 다음에. 그때 사 줘.”
* * *
“우리 맥주라도 마실까?”
소유의 말에 태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맥주 두 캔을 들고 나타났다. 친절하게도 먹기 편하도록 개봉을 한 채로 소유에게 내밀었다.
“고마워.”
이럴 때 보면 적들에게 한없이 냉정하게 굴었던 사람과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소유는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태오는 그런 소유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기만 할 뿐 말리지는 않았다.
반 정도 비워 내니 빠르게 취기가 올라와 한결 말하기 편해졌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소유는 불쑥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보기에도 석재현은 너의 심기를 충분히 건드렸고, 네가 정말 많이 참았다는 것도 알아.”
단순히 태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태오가 제일 소중히 여기는 소유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했다.
태오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으리라. 어떠한 대처라도 해야 했으리라.
“그런데 네 방법이 옳은지는 솔직히 모르겠어.”
“…….”
“그리고, 태오야. 무엇보다도 넌 나와 했던 약속을 어겼어. 나한텐 한마디 상의도 없이.”
‘노력할게. 네가 실망할 만한 일은 안 하도록.’
할 말이 없는 태오는 고개를 푹 숙였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서라도 부부 사이에 가장 중요한 건 신뢰잖아.”
“미안해.”
“우리의 신뢰는 한 번 깨졌어. 그걸 다시 붙이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지금 넌 무슨 표정일까. 궁금했지만 소유의 시야에 보이는 건 숱이 빼곡한 태오의 정수리뿐이었다.
“네가 남들보다 힘이 있는 건 맞지만, 누군가를 심판할 자격은 없는 거라고 나는 생각해. 설령 정말 부정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정당한 방법으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게 맞고.”
소유는 거기까지 말하고서 맥주를 마저 마셨다.
맥주 때문인지 지금의 격한 감정 때문인지 얼굴이 뜨거워지며 붉게 달아올랐다.
“결국 다른 사람을 해치는 건 나의 소중한 걸 공격받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해. 너도 언니에게 그렇게 말했잖아.”
“…….”
“우리가 임신해서 애를 낳으면, 너의 적들의 타깃이 누가 될 거라 생각해?”
태오의 유일한 약점이자 나약한 존재들이 되겠지. 그건 즉 태오와 소유의 아이들이란 소리다. 소유는 그런 불안한 상황에서 아이를 키우긴 싫었다.
“네가 변하든, 내가 변하든…… 누구 한 명은 지금과 달라져야 해.”
“응.”
“그러니까 태오야. 우리 잠깐 시간 좀 갖자.”
이 말이 태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몹시 걱정되었다. 사람에 따라 이별의 뉘앙스처럼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
“나한테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그래서 소유는 덧붙였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얼마든지. 기다릴게.”
다행히도 태오는 생각보다 순순히 대답했다.
“혹시 넌 나한테 할 말 없어?”
소유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제야 태오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은 무척 잔잔하고 처연했다.
“고마워.”
“뭐?”
“고맙다고.”
고맙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소유는 얼어붙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내뱉은 태오는 잘못 말한 게 아니라는 듯 정정하지 않았다.
“……뭐가 고마워?”
한참 고민하다가 소유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 상황에서 뭐가 고맙단 말인가. 화를 내도 모자랄 판에. 태오는 제가 가진 모든 걸 바쳐 소유를 지키려 했고, 소유는 오히려 그 행동을 나쁘게 말하고 있는데.
“단순히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잖아. 나랑 헤어지겠다는 게 아니잖아.”
순간 뜨거운 숨이 밖으로 터져 나왔다. 애써 참고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 안 버려서 고맙다고.”
이 바보. 진짜 바보.
“난 그거면 돼. 기다리는 게 뭐 어렵겠어.”
심장이 쿵쿵 뛰었다. 태오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새삼스럽게 실감이 나서 뛰었고, 또 그만큼 자신도 그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달아서 뛰었다.
소유는 남은 맥주를 모두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그와 마주 보고 있다간 참지 못하고 그를 끌어안을 것만 같았다. 앞으로의 미래를 결정할 이 주어진 시간을 단숨에 내던지고.
“소유야.”
태오의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주인이 올 때까지 꼬리를 내리고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태오는 소유가 돌아오기만을 바랄 것이다.
“사랑해.”
소유가 눈을 질끈 감았다.
“너는 사랑한다고 말 안 해도 돼.”
“…….”
“그냥 내가 너 사랑한다고. 말해 주고 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