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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스토커 (50/95)


50. 스토커
2022.09.19.


맥주가 든 봉지가 바스락댔다. 생각보다 무게가 나갔지만, 소유는 들뜬 마음에 콧노래까지 불렀다. 곧 퇴근할 태오와 맥주를 마시며 수다를 떨 생각에 설렜다.

아무리 술을 못 마시는 소유라고 하더라도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따금 어쩔 수 없이 술을 찾게 될 때가 있다.

오늘이 딱 그랬는데, 일정 체크를 제대로 하지 못해 거래처에 피해를 줬다.

태오에게 울적한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흔쾌히 함께 술을 먹어 주겠노라고 말했다.


[태오야. 집에 맥주가 떨어졌어.]

[내가 가는 길에 사 갈게. 기다려.]

태오는 그렇게 말했지만, 소유는 직접 겉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굳이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오는 사람에게 심부름을 시키기 싫었고, 또 태오가 없는 공허한 시간에 혼자 집에 있으려니 자꾸 자책만 하게 되어 힘들었다.

차라리 몸이라도 움직이는 게 낫지.


[내가 사 뒀으니까 넌 바로 와. 최대한 빨리 와. 보고 싶어.]

늦었다고 걱정할까 봐 돌아오는 길에 태오에게 답장을 보냈다. 태오는 휴대폰을 못 보는 것인지 답장이 없었다. 소유는 가볍게 생각하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 아까부터 걸리적 대던 기다란 그림자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저 우연히 가는 길이 같은 행인인 줄 알았는데, 이상하리만큼 끈질기게 달라붙는 발걸음이었다.

탁. 소유가 걸음을 멈추자 뒷사람도 걸음을 멈췄다.

땀이 삐질 날 것만 같았다. 그저 과민 반응이고, 오해일 수도 있지만, 자신을 따라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절로 오싹해졌다.

먼저 지나가길 기다려도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어쩔 수 없이 소유가 달리듯 발을 빨리 움직였다. 그러자 소유의 추측이 맞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처럼 뒷사람의 걸음도 덩달아 빨라졌다.

어떤 목적인진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의도적으로 따라오고 있다고 생각하니 걷잡을 수 없는 겁이 피어올랐다.

들고 있던 편의점 봉지가 툭 떨어졌고, 맥주캔들이 사방으로 굴러갔다.

휴대폰을 꺼내 태오의 번호를 누르려던 찰나 그 사람이 소유의 어깨를 잡았다.

놀란 소유가 커다란 비명을 내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떨리고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린 것이다.


“소유야. 괜찮아?”

그런데 뜻밖에도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물범벅이 된 소유가 날카롭게 위를 올려다보았다.


“다친 덴 없어?”

두 번 다시는 볼 일 없으리라 생각했던 재현이었다.


“그냥 장난 좀 치려고 했는데 너무 놀라네. 미안.”

재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소유가 미간을 찌푸리며 재현의 손을 차갑게 내쳤다. 그러고는 스스로의 힘으로 바닥에서 일어났다.


“왜 그렇게 무섭게 쳐다봐. 그냥 장난이었다니까.”

“네가 이 동네는 웬일이야?”

“웬일이냐니. 내가 이 동네에 널 보러 오는 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겠어?”

문득 낯선 감정이 들었다. 그것은 타인을 향한 극단적인 혐오였다. 재현에겐 유감이었지만, 소유는 그런 그가 진심으로 혐오스러웠다.


“내가 제대로 사과를 못 한 것 같아서…….”

“우리, 이제 다시는 보지 않기로 하지 않았었나?”

소유가 딱히 숨기려고 하지 않았기에, 재현도 혐오라는 감정을 읽어 냈을 테다. 다른 사람처럼 표정이 변한 재현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글쎄. 그건 너 혼자 결정한 일이지, 난 그렇게 하겠다고 동의한 적 없는데.”

“석재현.”

“그리고 우리 아버지랑 계속 사업하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나랑 연을 끊을 수 있겠어?”

가장 멀리 굴러갔던 맥주캔 하나가 누구의 구두에 툭 부딪혔다. 이리저리 찌그러진 맥주캔을 내려다보던 태오가 서늘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는 귀가하던 중 소유의 비명을 듣고 단숨에 이곳으로 달려왔다. 예민한 그의 귀는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오는 소유의 소리도 놓치지 않았다.

더욱 섬찟했던 건 그럼에도 그에게서 숨이 찬 기색이나 흐트러진 기색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사람처럼 여유롭게 존재했다.

그의 눈동자가 마주 보고 선 ‘한때’는 친구였던 두 남녀에게 닿아 있었다.


“내가 잘못했어. 우리 다시 시작하자. 내가 강태오 그 사람보다 더 먼저 널 알았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가위로 잘라 내듯 남남이 될 수 있겠어?”

“너 이런 것도 스토킹이야.”

“스토킹? 그런가?”

“신고할 거야.”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닌데, 경찰한텐 뭐라고 말하려고?”

법의 허점을 찌른 재현이 비열하게 웃었다.


“소유야.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쉽게 갈 수 있어. 네가 나 한 번만 용서해 주고…….”

그때 태오가 맥주캔을 있는 힘껏 발로 찼다. 맥주캔은 정확하게 소유를 피해 재현의 근처 담에 부딪혀 터졌다. 깨진 틈 사이로 맥주가 사방으로 발사되었다.

그로 인해 재현은 흠뻑 젖어 버렸고 놀란 소유가 뒤를 돌아보았다.

무표정으로 서 있는 태오를 보자마자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 하마터면 그에게 바로 달려가 안길 뻔했다.


 


“왜, 왼쪽 손으로는 모자랐나? 기어이 오른쪽마저 망가뜨리고 싶은 거야?”

태오가 뚜벅뚜벅 걸어와 소유의 손을 잡아 제 뒤에 세웠다. 덕분에 소유에게는 맥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일을 어렵게 꼬고 있는 건 너 같은데.”

재현이 반발심과 두려움이 반쯤 섞인 오묘한 표정으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태오가 재현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려고 발을 뗐을 때, 소유가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절대 제 의지로는 멈출 수 없을 것 같던 태오의 몸이 일순간에 멈췄다. 재현의 눈에 그런 소유는 사나운 맹수를 길들이는 조련사처럼 보였다.

태오가 천천히 소유를 돌아보았다. 소유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말라는 듯.

태오는 차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가라앉히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언젠간 재현을 끝내야 했지만, 그게 소유가 보는 앞에서 행해져서는 안 된다. 소유가 그걸 원하니.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한 태오가 잠시 후 눈을 떴다. 놀랍게도 그의 눈동자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감정을 멋대로 통제하다니 역시 보통이 아닌 남자다. 재현은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태오는 소유에게 웃어 보이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서 지갑을 꺼냈다. 이윽고 그의 지갑 안에서 지폐가 뭉텅이로 나왔다.


“미안합니다, 석재현 씨. 다 젖었네요.”

그 지폐들은 나풀나풀 아래로 떨어졌다. 재현은 치욕스러움에 이를 갈았다. 돈이 많은 사람이 돈이 많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모욕이었다.


“이건 세탁비로 쓰세요.”

태오는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재현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소유에게는 들리지 않게.


“그리고 이만 꺼져. 이 동네엔 너처럼 고약한 냄새가 나는 사람은 있으면 안 되거든.”

재현이 뒤집어쓴 맥주는 서서히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혀를 쯧 차던 태오가 소유를 데리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불순한 종자는 엄두를 낼 수 없는 두 사람만의 온전한 공간이었다.


“미안해.”

대문이 완전히 닫히자 소유가 태오에게 사과했다.


“뭐가 미안해?”

“화나게 해서.”

“화난 건 맞는데 너한테 화난 건 아니야. 알잖아. 그런데 왜 사과를 해?”

태오는 재현과 소유가 털끝만큼이라도 관여되는 게 불쾌한 듯했다. 소유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댔다. 그러자 태오가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놀랐겠다.”

소유의 앞에서만 들려주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정말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 재현이, 요즘 좀 이상해진 것 같아.”

“이해하려고 하지 마. 애초에 넌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야.”

애초에 소유의 사고 범주에 있는 인간이었다면 그런 짓을 하지도 않았겠지.


“그나저나 맥주가 다 쏟아져서 어떡하나. 아, 도수 낮은 와인이 있는데 마실래?”

태오는 능숙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소유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거라도 마셔야겠어. 회사에서부터 지금까지. 정말 최악의 하루다.”

“석재현 이야기는 그만하고 회사 이야기나 하자. 무슨 실수를 했길래 그래?”

“아, 그게 내가 진짜 바보라니까? 벌써 일이 익숙해졌다고 자만해서는…….”

태오는 금세 방금 전 일은 잊고서 종알대는 소유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러다 불현듯 고개를 돌려 재현이 있을 법한 방향을 응시했다.

잠시 눌러 둔 분노가 조금의 누락도 없이 다시 피어올랐다. 살벌한 맹수가 이를 드러내자 주변의 모든 작은 생물들은 색을 잃었다.

사냥 본능이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 * *



“응. 아빠. 무슨 일 있어요?”

퇴근하기 위해 가방을 챙기고 있던 소유는 아버지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아직도 아버지 건강에 예민한 그녀였기에 웬만하면 아버지의 전화는 꼬박꼬박 받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 바쁜데 미안해. 아직 일하니?

“아니에요. 이제 퇴근하려고.”

어쩐지 아버지의 목소리엔 난감한 기색이 잔뜩 실려 있었다.


“진짜 무슨 일 있어요? 어디 아픈 거예요? 나 슬슬 걱정되려고 하는데.”

― 그런 건 아니고. 재현이가 우리 집에 와 있는데.

“……누구요?”

모든 행동을 멈춘 소유가 짜증스럽게 전화를 제대로 잡았다. 석영재 교수와의 의료기기 사업을 검토하던 도진이 파티션 너머로 소유를 바라보았다.


― 재현이. 너 혹시 우리 집에서 재현이랑 만나기로 했니?

“걔가 그래요?”

소유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쉬었다. 나를 괴롭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빠까지 귀찮게 하다니. 이건 너무하잖아. 스트레스받으시면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


― 응. 너희 집에서 보는 건 강 서방 눈치를 봐야 해서 힘들다더구나. 재현이랑 무슨 일 있니?

여태까지 재현과 있었던 일은 당연히 아버지에겐 비밀이었다. 혹시라도 충격을 받고 쓰러지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 내 앞에서 강 서방 험담을 하더구나.

“미안해요, 아빠.”

― 나한테 미안할 건 없는데, 우리 사위가 불편해하면 아무리 재현이라도 거리 두는 게 맞는 것 같아서.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빠. 제가 지금 집으로 갈게요.”

― 혼자 오지 말고, 강 서방이랑 같이 와.

“네?”

― 숨기지 말라는 말이야.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진 않았으나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하는 것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언제나 옳으시니까.


“네. 알겠어요.”

― 너무 급하게 오진 말고, 운전 조심하고.

아버지의 당부를 속으로 읊조리며 사무실을 가로지르는데, 도진이 말을 걸었다.


“소유야.”

“오빠, 미안. 나 집에 일이 생겨서 먼저 들어갈게.”

“작은아버지 아프신 건 아니지? 통화, 심각해 보여서.”

“응. 그런 건 아니야.”

“다행이네. 얼른 가 봐. 그리고 내일 출근하자마자 회의실에서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의료기기 건으로 상의할 일이 있어서.”

도진의 목소리는 결연했다. 무언가 큰 결정을 하나 한 모양이다. 그게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일단은 아버지가 우선이었다.


“알았어. 내일은 일찍 출근할게. 오빠도 얼른 퇴근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급히 올라탔다. 그리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동안 태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 집에서 볼 건데 웬 전화?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

“태오야.”

긴박한 소유의 목소리를 듣자 태오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아빠 집으로 바로 올 수 있어?”

― 왜? 장인어른 어디 아프셔?

“아니, 그게 아니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차를 향해 걸었다. 또각또각. 유달리 구두 소리가 크게 들렸다.


“재현이가 아빠를 찾아갔대. 아빠한테 허튼소리 하기 전에 말려야 할 것 같은데.”

― …….

“아빠가 너랑 같이 오라고 하셔서.”

― 당연히 나랑 같이 가야지. 알았어. 바로 그쪽으로 갈게.

태오가 낮아진 톤으로 대답했다.


― 소유야. 그런데 나, 정말 많이 참은 거 같은데.

“…….”

인정하는 바였다. 지금은 소유도 재현이 너무 끔찍하게 미웠으니까. 이렇게 진절머리 날 정도로 괴롭힐 줄은 몰랐다.


― 돌겠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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