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나에겐 초식동물
(48/95)
48. 나에겐 초식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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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나에겐 초식동물
2022.09.12.
“립스틱 새로 샀어? 못 보던 색이네?”
함께 간단한 저녁 식사 준비를 하던 중 태오가 문득 물었다. 역시 눈썰미가 좋은 태오가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소유가 씩 웃으며 되물었다.
“예뻐?”
“당장 키스하고 싶을 만큼 예뻐.”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낯부끄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소유가 콧잔등을 찡긋대며 태연하게 말했다.
“둘째 도련님이 사 주셨어.”
“안 예뻐.”
이번에도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어이가 없어진 소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나도 안 어울려.”
미간을 찌푸린 태오는 누가 봐도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소유가 고개를 비스듬히 둔 채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장 환불해.”
“이미 써 버린 걸 어떻게 환불해.”
“그놈이 너한테 립스틱 선물을 왜 해?”
“결제는 도련님이 하셨지만, 고르기는 내가 골랐어.”
“…….”
이랬다저랬다…… 누굴 놀리나. 태오는 울컥했지만 소유에게 짜증을 낼 순 없어 그저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소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가 컬러 고르는 센스가 꽝인가 봐. 내 눈엔 예쁘던데 네 눈엔 별로인 걸 보니.”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래서 키스도 하기 싫고?”
“사실 예뻐. 진짜 예뻐.”
태오가 다급하게 말을 바꿨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정말 소유에게 잘 어울리는 색이긴 했다.
평소에 주로 바르는 무난한 색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풍겼기 때문이다. 살짝 더 고혹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이랄까.
사실 무슨 색이었든 태오 눈엔 소유가 무조건 예뻐 보이긴 했을 테다.
“그냥 강준오가 사 줬다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걔가 이걸 어쩌다 선물해 주게 된 건데?”
소유의 기세에 한풀 꺾인 척 굴었지만, 그 기저에는 참을 수 없는 위압감과 소유욕이 숨어 있었다.
이제 소유는 태오가 제게만 숨기는 본 모습을 조금씩 알아갈 것 같다. 만약 태오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다면 자신도 태오의 진짜 모습에 겁을 먹고 말았겠지.
이 상황에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니 나도 어지간히 정상은 아닌 모양이다.
“내가 도련님 뵈러 백화점에 갔었거든.”
소유는 샐러드 볼을 옮기며 다이닝 룸으로 걸어갔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당황한 것인지 태오가 나머지 음식들을 들고 쪼르르 그녀 뒤를 따라왔다.
“네가 걔를 먼저 찾아갔다고?”
“응. 그러면 안 돼?”
“안 될 건 없지만 이유가 궁금해서.”
소유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포크로 양상추를 콕 찍어 입에 넣었다. 한동안 양상추가 아삭거리는 소리만이 다이닝 룸에 울려 퍼졌다.
태오는 소유가 음식을 모두 삼킬 때까지 기다렸다.
“너에 대해 확실히 알고 싶어서.”
“……뭐?”
소유가 포크로 방울토마토를 잡으려 애썼다. 그러나 방울토마토는 약이라도 올리듯 이리저리 도망쳤다.
태오의 눈에 포크는 자신, 방울토마토는 소유처럼 보였다.
“강태오란 인간을 가장 객관적으로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둘째 도련님인 것 같아서.”
태오가 작게 한숨을 쉬며 물을 들이켰다.
“그래서 뭐래? 냉혈한에, 사이코에, 몹쓸 놈이래?”
제 입으로 온갖 부정적인 표현을 갖다 붙이는 태오를, 소유가 빤히 바라보았다.
감히 태오 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이는 별로 없었겠지만, 태오도 귀가 있을 테니 저를 둘러싼 소문에 대해 모를 리 없을 것이다.
그게 이상하게 가슴이 아팠다.
소유는 끝내 방울토마토를 잡지 못한 채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아니. 이해가 된대. 너랑 어머님이 모질게 대했던 게. 본인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는 것도 안대.”
“웃기고 있네. 뭘 알아.”
“태오야.”
소유가 잔잔한 목소리로 태오의 이름을 불렀다. 그건 맹수를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주문이었다. 당장이라도 이를 드러낼 것 같던 태오가 소유의 부름에 잠잠해졌다.
“난 도련님들을 이해하기 위해 거기에 찾아간 게 아니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너에 대해 확실히 알고 싶어서 간 거야.”
“…….”
“지난 며칠간 곰곰이 생각해 봤어.”
부부의 눈동자가 하나의 것처럼 합쳐졌다.
“넌 다른 사람과 다른 게 맞아. 넌 이따금 잔혹해지고, 비정상적인 소유욕을 가지고 있어. 인정하지?”
태오는 대답 없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 순간 그는 두 가지 생각뿐이었다.
너도 그런 내가 무서울까. 그래서 나를 떠나고 싶어졌을까.
“그런 너를 보며 내가 내린 결론은…….”
“소유야.”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우리 태오는 스스로 그런 성격을 선택한 게 아니라 강요받아 왔구나.”
거짓말처럼 모든 소음이 아득해졌다. 귀에 이명이 들리더니 서서히 멀어졌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소리는 오직 소유의 목소리뿐이라는 듯.
태오의 성격을 피하거나 험담하는 사람은 여럿 봤지만,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소유가 처음이었다.
선오에겐 자신만만하게 말하긴 했지만, 실은 태오도 회의적이었다. 제 본모습을 알게 되면 여린 소유는 실망을 하게 되리라 예상했다.
소유는 저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선하고, 따뜻하고, 사랑스러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랐다. 옆에 머물러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정도로.
“태오도 참 힘들었겠다.”
하지만 소유는 가끔 태오를 상상도 못 할 깊이로 이해해 주곤 했다. 지금처럼.
저 말을 건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뇌를 거듭했을지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유는 이번에도 태오를 받아 주려 한다. 나약한 존재 같으면서 이럴 때를 보면 저보다 더 단단한 존재 같기도 했다.
태오는 그런 소유를 사랑하지 않을 방법을 찾지 못했다.
“감정까지 통제받으며, 지금에 이르느라 참 고생이 많았겠다.”
“…….”
“왜 나는 너를 이제야 만난 걸까.”
끼이익. 태오가 의자를 뒤로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이라도 사랑하는 그녀를 안고 싶었다.
내 유일한 안식처. 내 유일한 사람.
“립스틱이 예뻐서 그러는데, 당장 키스해도 될까?”
태오가 소유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허리를 숙여 쪽 입을 맞췄다. 태오의 입술에 소유의 립스틱이 묻어나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그 야릇한 광경을 보니 덩달아 열이 오를 것 같았지만 겨우 참은 소유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런데, 태오야.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정도의 잔혹한 부분은 고쳤으면 좋겠어. 부탁이야.”
소유의 손이 위로 올라가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너를 향한 내 감정엔 변함이 없겠지만, 다른 사람이 너에 대해 함부로 생각하는 게 싫어. 그리고 모든 사람을 적으로 돌리면 너는 점점 더 외로워질 거야.”
태오를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해 줄 수 있는 조언이었다. 태오가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나로 인해 불안해할 필요 없다는 거 알잖아. 나도 너 사랑하고, 너도 나 사랑하잖아. 네 사랑이 더 큰 거 아니야. 나도 그만큼 똑같이 너 사랑해.”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다. 둘 다 양방으로 주고받는 공평한 사랑이다.
“나는 적어도 우리가 서로에 대해선 확신을 가져도 된다고 생각해.”
“……응.”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누가 끼어들고, 거슬리게 한다고 지금껏 했던 것처럼 무자비하게 굴지 않았으면 좋겠어.”
소유는 그저 태오에게 보호받고 사랑받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자신도 똑같이 그를 보호하고 사랑하고 싶었다.
물리적인 힘이나 재력 등에서 태오를 이길 순 없겠으나 다른 쪽으로는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 너의 가치관 문제, 가족 문제 등은 나랑 대화하고 함께 풀어 나갔으면 좋겠어.”
똑 부러지게 말하는 소유를 보는 태오의 눈이 유달리 반짝였다. 그건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도저히 흉내 낼 수조차 없는 찬란한 눈빛이었다.
태오는 큰 몸을 구부려 작은 그녀의 품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 줄 수 있어?”
태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소유가 그를 꽉 끌어안았다. 태오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익숙한 향기와 부드러움이 얼었던 그의 마음을 녹였다.
“아까 한 말, 내가 비정상적이어도 변함없이 사랑한다는 말, 진심이야?”
“그럼 넌 내 사랑이 쉽게 변할 것처럼 보였어?”
태오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래도 여전히 소유는 키 큰 태오를 한참 올려다봐야 했지만.
“너만 대단한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 나도 지금 나름 세기의 사랑 중이라고.”
태오의 엄지가 살짝 번진 소유의 립스틱을 닦아 냈다. 그 모습마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나도 내가 가진 모든 걸 걸고 널 지킬 거야.”
“설레는 말이었네. 누가 날 지켜 준다는 말.”
항상 무언가 지켜야겠다는 생각만 했었지, 반대로 보호를 받는 것은 처음이라 태오는 벅차올랐다.
태오가 쿵쿵 뛰는 소유의 심장을 느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노력할게. 네가 실망할 만한 일은 안 하도록.”
그러자 이번엔 소유가 참지 못하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까치발을 들고 갸우뚱대는 소유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안정적으로 고정한 태오는 그녀가 선사해 주는 따뜻한 입맞춤을 만끽했다.
그녀의 숨결을 들이마시고, 그녀와 같은 속도로 뛰는 심장 소리를 느꼈다.
소유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태오에게는 이대로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느껴질 만큼 완벽한 순간이었다.
접시를 살짝 옆으로 민 태오는 소유를 번쩍 들어 안아 테이블에 앉혔다. 그 와중에도 계속 까치발을 들고 서 있는 소유의 다리를 걱정한 것이다.
잠시 끊어진 입술을 틈타 소유가 말했다.
“사랑해.”
“내가 더 사랑해.”
지지 않겠다는 듯 태오가 맞받아쳤다.
“내가 더.”
“내가 더, 더.”
“내가 더, 더, 더.”
별것도 아닌 일로 기 싸움을 하던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웃음이 터졌다.
“태오야.”
그러다 소유가 다시 진지해진 얼굴로 태오의 이름을 불렀다.
“뜬금없지만, 너랑 대화가 잘 끝나면 가장 먼저 해야겠다고 다짐한 말이 있는데.”
“뭔데?”
“우리, 낳을까?”
덩달아 태오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기 말이야.”
과거를 끊어 내자마자 바로 떠오른 미래에 대한 계획이 태오와의 아이였다. 이런저런 고민이 생겨 말하기를 미루고 있었지만.
“사실 일이 바쁘다느니, 준비가 필요하다느니 하는 건 다 핑계였는지도 몰라. 나는 그냥 두려웠는지도 몰라.”
소유를 향한 도진의 조언이 그대로 적중하는 순간이었다.
“내가 누군가의 엄마가 되고, 내가 낳은 아이가 누군가의 자식이 되고…… 그런 게 은연중에 무서웠나 봐.”
“…….”
“그런데 이젠 이겨내 보고 싶어졌어. 너와 함께라면 두려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태오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방금 전 껄끄러운 이야기를 했던 것도 모두 잊을 정도였다.
소유는 멍해진 귀여운 태오의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의 볼에 새로운 입술 자국이 생겼다.
“내가 트라우마에 갇혀 끙끙 앓으면 네가 꺼내 줄 거잖아. 그리고 내가 아이에게 잘못된 사랑을 주면 네가 바로잡아 줄 거잖아. 그렇지?”
목에 가시라도 걸린 듯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태오는 그저 거세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낳자.”
“…….”
“너와 날 반반씩 닮은 사랑스러운 아이를.”
태오는 소유의 얼굴을 감싸 쥐고 다시 입을 맞췄다.
접시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소유는 태오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은 채 떨리는 숨결을 받아들였다.
남에겐 맹수 같지만, 제겐 이렇듯 초식동물 같은 내 남자.
나만 아는 사랑스러운 우리 태오.
그와 동행한다면 어떤 두려운 가시밭길도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당장 오늘부터 노력해 볼까?”
“오, 오늘? 지금 당장?”
“마음먹었을 때 시작해야지.”
“아니. 일단 저녁은 먹고…….”
저녁부터 먹자고 말하려고 했지만, 태오는 이미 그녀를 안아 들고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이렇게 앞만 보고 걸을 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소유는 바로 포기하고 몸에 힘을 뺐다.
“우리 남편 추진력은 진짜.”
뭐, 이렇게 된 거 그의 템포에 맞춰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쇠뿔도 단김에 빼라’라는 옛말이 그냥 있진 않을 테니까.
“어? 못 들었어. 뭐라고?”
“됐어요. 아저씨.”
사랑하는 연인에서 진정한 부부로 거듭나는 터닝포인트를, 두 사람은 그렇게 맞이하고 있었다.
소유와 태오는 서로가 아니면 안 될 정도로 각자의 모서리를 접고 접어 서로에게 딱 맞췄다.
이젠 다른 사람은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