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수용번호 4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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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수용번호 4180
2022.07.25.
“공연옥, 면회다.”
표정을 지을 줄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가던 연옥에게 오랜만에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연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신의 딸인 다해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껏 편지 한번 써 주지 않았지만, 이제는 자신을 용서하고 찾아올 때가 되었다고.
딸이 무척 보고 싶었고, 이곳에서 나갈 방법을 함께 강구하고 싶었다.
“다해야!”
하지만 면회 신청을 한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연옥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그곳에 다해는 없었다.
자신이 죽이려고 부단히 노력했으나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난 자신의 전남편이 있을 뿐이었다.
“원하는 손님이 아니었나 보군.”
의식이 또렷한 희훈은 아직 낯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차갑게 변한 희훈이 낯설었는지도.
“여보. 오랜만이에요.”
연옥이 과장된 몸짓으로 의자에 앉았다.
금세 눈에 거짓 눈물이 글썽이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연기에 소질이 있었다.
“나 정말 놀랐어요. 당신이 찾아올 줄은. 내가 지금 당장 무슨 말을 해도 용서가 되진 않겠지만, 일단 제 말을 좀 들어 줘요. 오해가 있었어요.”
“오해? 무슨 오해?”
움직이지 않는 신체에 갇혀 있는 동안 희훈은 지옥 그 이상을 맛봤다.
그중 특히 치가 떨렸던 건 악랄한 연옥과 윤범의 대화였다.
그는 육체만 움직이지 못할 뿐 모든 감각이 살아 있었다.
물론 청각을 포함해서.
“나를 죽이려고 한 건 맞지만, 나를 사랑했었다?”
“여보. 그 일은 김윤범 그놈이 독단적으로 꾸민 일이에요. 난 그저 물증을 잡기 위해 장단을 맞춰 주고 있었어요.”
희훈이 표정의 변화 없이 연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요. 내가 당신과 결혼 생활 내내 김윤범과 부적절한 사이였던 건 맞아요. 하지만 그 외엔 전부 나와 관련 없는 일이에요.”
“이제야 제대로 보이는군. 당신의 실제 얼굴이 말이야.”
저 가여운 얼굴, 서러운 목소리, 따뜻한 체온…… 모두 거짓이었다.
너무나 어리석게도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우리 소유한테 왜 그랬어?”
저를 배신한 것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희훈이 가장 화가 나는 것은 연옥이 어린 소유에게 저질렀던 학대였다.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올 만큼 착한 아이에게 왜 그랬어?”
더 이상 이전의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연옥이 가증스러운 연기를 내려놓았다.
그 표정 변화가 어찌나 순식간에 일어났는지 약간의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내 눈엔 그렇게 안 보이던데. 이보세요, 정희훈 씨. 그러는 당신은 우리 다해랑 소유를 공평하게 사랑했어? 아니잖아. 본래 자기 눈엔 자기 자식만 보이는 법이에요.”
연옥은 팔짱을 끼고서 희훈을 비웃었다.
“그리고 우리 다해와 달리 소유는 태어날 때부터 부족함 없이 자랐잖아? 그래서 가여운 언니한테 양보 좀 하라고 타이른 게 뭐가 나빠?”
“잘못을 뉘우치는 기색이 전혀 없군.”
“죄가 나에게만 있겠어요? 당신은요? 그렇게 걱정되면 좀 들여다보지 그랬어요?”
행복하다기에 진짜로 딸이 행복한 줄로만 알았다.
제가 끼어들면 가뜩이나 어색한 계모와 되레 더 어색해질 줄 알았다.
그래서 최대한 개입을 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야 인정하건대, 그건 희훈의 큰 실수였다.
“누구나 죄는 짓고 살죠. 다만 감옥에 들어갈 만한 죄인가, 아닌가의 차이일 뿐. 그러니 나를 일방적으로 비난하진 말아요.”
“뻔뻔하기 그지없네.”
“그리고 잊었나 본데, 지금 소유가 그렇게 행복해하는 결혼 생활, 내가 만들어 준 거예요.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 당신이 만들어 준 게 아니라 내 사위가 내 딸을 구원해 준 거지.”
연옥이 진심으로 웃긴다는 듯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뭐, 됐어. 뉘우치는 기색이 없다니 나도 마음 편하게 당신의 죗값을 물을게.”
확인 끝.
방문 목적을 달성한 희훈이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연옥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우리 다해는 어떻게 지내고 있죠?”
“…….”
“설마 다해를 버린 건 아니죠? 이건 내 잘못이고, 우리 다해는 아무것도 몰라요.”
불안하도록 희훈은 대답이 없었다.
초조해진 연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애는, 혼자서는 살지 못해요. 당신이 책임져 줘야죠. 다해도 당신의 딸이었잖아요.”
희훈이 여유롭게 웃으며 뒤로 돌았다.
“글쎄. 방금 당신이 말했잖아. 자기 눈엔 자기 자식만 보이는 법이라고.”
“정희훈!”
연옥이 자리에서 일어나 난리를 쳤다.
그러자 교도관이 다가와 그녀의 팔을 결박했다.
“진정해, 공연옥!”
“우리 다해 지금 어떻게 됐어!”
희훈은 다시 뒤로 돌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공연옥, 아니, 공미리 씨.”
“이 나쁜 놈아!”
“그렇게 걱정이 되면 당신이 직접 들여다봐.”
* * *
임신 시기를 두고 토론이 며칠간 이어졌다.
당장 하고 싶다는 태오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다며 미루자는 소유가 팽팽하게 대립했다.
“할 일이 산더미인데, 무슨.”
소유가 서류 더미에 얼굴을 폭 묻었다.
“정 팀장, 이번엔 컨택한 선박 회사 말이야……. 왜 그래?”
도진이 소유에게 업무 이야기를 하러 왔다가 부스스한 소유를 보며 물었다.
“오빠.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어?”
“5분 정도는 괜찮아. 곧 연락 올 거래처가 있어서.”
도진은 하루 24시간을 촘촘히 나눠 쓰는 사람이었다.
그런 철저한 도진의 도움으로 일들이 수월하게 진행되었지만, 그래도 소유는 아직 여유롭지 못했다.
“남편 이야기지?”
탕비실에 도착하자마자 도진이 그렇게 말했다.
“애 낳자고 하디?”
연이어 속마음을 간파당하자 소유가 깜짝 놀랐다.
설마 이마에 글자가 적혀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손바닥으로 지워 보기까지 했다.
“어떻게 알아? 귀신이야?”
“남자란 동물은 같은 남자란 동물이 잘 알아서라고나 할까.”
도진이 픽 웃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도진은 태오를 딱 한 번 봤지만, 그가 얼마나 제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지 분명히 느꼈다.
“그리고 금실 좋은 신혼부부가 심각해질 문제는 그것 말곤 없지.”
“오빠도 그랬어?”
“아니? 잊었어? 나 속도위반으로 결혼한 거.”
아, 맞다. 그랬었지.
그래서 서른세 살이란 나이에 벌써 애가 둘인 것이다.
모범생이었던 도진의 파격 행보에 소유의 아버지도 무척 놀랐었던 기억이 있다.
“요즘 너무 바빠서 임신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태오는 그게 서운한가 봐.”
“바쁘면 당연히 그럴 수 있지. 그래서 그 말을 듣고 넌 어땠는데?”
“음…… 낳으면 좋기야 하겠지. 그런데 나는 이왕이면 제대로 준비가 된 상태에서 하고 싶어.”
“그런데 재벌들도 그런 걱정 하나? 어차피 키워 주는 사람 따로 있는 거 아니야?”
도진이 장난스럽게 소유를 놀렸다.
그러나 소유는 웃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우리 애는 꼭 우리 손으로 키우고 싶어. 다른 사람 손 거치지 않고.”
그 말에 은은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깔려 있어 도진이 장난을 멈췄다.
“미안.”
사실 도진도 처음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가끔 만나는 연옥은 분명 도진이 보기에도 좋은 엄마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뒤에서 그런 짓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정 결정하기 어렵거든 직접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네.”
도진은 드디어 조언다운 조언을 해 줬다.
“어떻게?”
“나 이번 주말에 와이프랑 1박 2일로 여행 떠나거든? 요즘 통 바빠서 같이 시간을 못 보냈잖아.”
그렇긴 하지.
갑작스럽게 유아 물산에 투입된 그는 숨 돌릴 틈 없이 바쁘게 지내 왔다.
충분히 즐길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준이랑 훈이 둘 다 처가에 맡기려니까 눈치가 보이네. 특히 훈이가 너무 어려서. 그렇다고 호주에 있는 엄마를 부를 수도 없고.”
이럴 때는 또 눈치가 빨라지는 소유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요. 제가 훈이를 맡아 드리겠습니다, 오라버니.”
“그럴래?”
이게 바로 윈윈이 아닌가 싶다.
“응. 태오랑 열심히 육아 공부해서 잘 데리고 있어 볼게. 걱정 안 하도록.”
“그래. 그럼 부탁한다.”
“오빠. 오빠가 한국 들어와서 너무 좋아.”
“이럴 때만?”
도진이 귀여운 사촌 동생의 코를 꼬집고서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난 이만 가 봐야겠다.”
“네. 더 이상 방해 안 하겠습니다, 정 이사님. 어서 가십시오.”
소유가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벌써부터 설렜다.
오랜만에 훈이의 얼굴을 보는 것도, 어린 훈이를 돌보는 태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참.”
문을 열고 나가다 말고 뒤로 돌았다.
“네 남편이 너 정말 좋아하나 보다.”
“어? 왜?”
“일평생 아쉬울 것 없이 살아온 사람이 자존심도 다 굽히고 너한테 매달리잖아.”
“…….”
“원래 더 사랑하는 쪽이 초조하고 안달 나거든. 뭘 자꾸 조르게 되고.”
아닌데. 나도 태오 정말 많이 사랑하는데.
“강 서방이 어느 부분에서 서운한지 난 알 것 같은데?”
단지 임신의 문제는 아닐 것이라 도진은 확신했다.
* * *
“아무튼 그래서 이번 주 주말에 우리가 훈이 돌봐 주기로 했어.”
회사에서 집으로 오는 내내 소유는 종알종알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우리 한번 겪어 보고 다시 이야기하자.”
“좋아. 형님 많이 닮았어?”
사실 소유와 낳은 아이가 좋은 거지, 아이 자체를 별로 좋아하진 않는 태오였지만 신난 소유의 얼굴을 계속 보고 싶어서 맞장구를 쳤다.
“응. 근데 진짜, 완전, 귀엽게 생겼어. 볼이 얼마나 오동통한지…….”
캉.
그때, 무언가가 날아들어 차 창문과 세게 부딪혔다.
그대로 차고로 들어가려던 태오의 차가 멈춰 섰다.
고개를 돌리자 잠시 잊고 살았던 익숙한 인영이 서 있었다.
소유가 곧장 미간을 찌푸리며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소유야, 잠깐만.”
태오가 말릴 틈도 없었다.
“언니가 여긴 무슨 일로 왔어?”
소유가 환멸을 느낀다는 얼굴로 다해와 마주 보았다.
“이야, 네 집이 여기였구나. 다 똑같이 생겼길래 헷갈렸는데. 이제 확실히 기억해 둘게. 자주 와야 하니까.”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다해였다.
“술 마셨니?”
“왜, 술 마시는 것도 잘못이니?”
단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저분한 다해가 비릿하게 웃었다.
위로 치켜 올라간 입술엔 흉한 물집이 있었다.
“그런데 너 잘산다. 남의 삶은 파괴해 놓고.”
“…….”
“가만 보면 넌 참 가식적이야. 그런데 왜 다들 널 착하다고 좋아할까?”
다해의 질 낮은 말들이 이어졌다.
“그래도 재현이만은 이제 네 실체를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태오에게 미안한 나머지 소유가 연신 한숨을 쉬었다.
“이제 재현이는 내게로 돌아올 거야.”
“관심 없어.”
“……뭐?”
“관심 없다고. 언니랑 재현이가 다시 사귀든 말든. 그러니까 찾아오지 마.”
“야, 정소유.”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충분히 괴롭혔잖아.”
“아니? 지금 꼴을 봐. 진짜 괴로운 게 누군지.”
다해는 이 와중에도 자신의 불행을 소유에게 떠넘기고 있었다.
마치 제겐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듯.
“어머니 면회는 갔었니?”
소유의 질문에 다해가 광기 어리게 웃었다.
그러다 불쑥 소유에게 팔을 뻗었다.
“이 가방 뭐야? 명품이네? 이거 나 주라, 응?”
다해의 강한 힘에 밀린 소유가 휘청거리자 태오가 재빨리 그녀를 잡았다.
다해는 가방을 완전히 거꾸로 쏟아 그 사이에서 지갑을 찾아냈다.
그러는 동안 소유의 다른 소지품은 사방으로 흩어져 굴러갔다.
소유는 이런 상황이 익숙했지만, 태오는 처음이라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박하네, 진짜.
그는 굳이 제게 떠오른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 태오와 눈이 마주친 다해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제부.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면 안 되죠. 그래도 난 소유 언니인데. 대접은 못 할망정…….”
그 순간, 태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제안을 했다.
“그럼 잠깐 안으로 들어오실래요?”
소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태오가 다해의 손에서 소유의 지갑을 빼앗으며 말했다.
“대접해 달라면서요, 처형.”
그러나 태오의 눈은 전혀 누군가를 대접할 눈처럼 보이지 않았다.
차갑고, 아무것도 살지 않을 듯한 불모지처럼 삭막한 눈이었다.
“그럼 들어와서 대접받아.”
태오는 손수 대문을 열어 줬다.
“여기서 개같이 굴지 말고.”
다해의 눈앞에 호화스러운 정원이 펼쳐졌다.
소유가 아니라 제가 가졌어야 할 그런 탐나는 정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