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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불순한 과외 (23/95)


23. 불순한 과외
2022.06.17.



 
태오의 계획대로 과외는 좋은 명분이 되었다.

희훈도 매일 저녁 찾아오는 태오를 모르는 척 넘어가 주었다.

덕분에 둘은 깊은 밤까지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해상 운송 계약 시에 선박회사가 화물주인에게 발행하는 증권은?”

“어…… 어, P/L?”

아니,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소유에겐 마냥 달콤한 시간만은 아니었다.

태오는 생각보다 더 엄격한 호랑이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틀렸어.”

“아, B/L!”

“이미 늦었어. 일하면서도 그렇게 헷갈릴 거야? 무역 용어는 기본 중의 기본이야.”

평생 무역 일과는 거리가 멀었던 소유에겐 다소 가혹하리만큼 빠른 진도였다.

거참, 헷갈릴 수도 있지.

처음인데.


“무역 용어 틀리는 순간 전문성은 떨어지고, 바이어한테 신뢰를 얻기 힘들어.”

소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태오가 단호하게 말했다.

소유가 엎드린 채 머리를 쥐어뜯었다.

너무 어려워, 무역 세계.


“이리 와.”

그러자 어림도 없다는 듯 태오가 소유를 일으켜 세웠다.


“벌 받아야지.”

태오가 능글맞게 웃었다.

그는 이 순간을 즐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체벌은 조금 특별한 방식이었다.


“이번엔 어디에다가 할 건데.”

“글쎄.”

소유가 문제를 틀릴 때마다 태오는 그가 원하는 곳에 입을 맞출 수 있었다.

오늘만 해도 벌써 볼과 입을 내어줬다.

점점 수위가 세지는 체벌에, 소유는 약간 긴장되었다.

마음을 확인한 이후 태오는 곤란할 정도로 직설적인 말을 이어 왔다.

이런 분야에 둔한 소유조차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챌 정도였으니.


“태오야.”

잠시 대화로 그를 달래 보려는데, 태오는 불쑥 다가왔다.

그의 향수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힐 무렵, 생크림처럼 부드러운 감촉이 귓바퀴에 닿았다.

소유는 여린 몸을 움찔했다.

지금까지의 입맞춤과는 왠지 다른 느낌이었다.

알 수 없는 전율에 육체가 휘청댔고, 당장이라도 그의 옷자락을 잡지 않고서는 못 견딜 정도로 아득해졌다.

그리고 태오가 평소보다 더욱 야하게 느껴졌다.


“기분이 어때?”

태오가 턱을 괴고서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상해.”

“어떻게 이상해?”

태오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원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걸 뭘 더 어떻게 자세히 설명해.


“몰라. 그냥, 이상해. 그러니까 묻지 마.”

소유가 웅얼거리며 얼버무렸다.


“내가 대신 말해 줘? 귀 안에 작은 털이라도 들어간 것처럼 간지럽지? 몽롱하지? 불쑥 이상한 상상이 떠오르지?”

“…….”

“그게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스킨십이야.”

그토록 노골적으로 말하니 자꾸만 시선이 태오의 입술에 닿았다.


“지금까지의 ‘아빠가 출근할 때 뽀뽀뽀’ 같은 키스는 네가 하고 싶은 스킨십이고.”

“겁주지 마.”

“겁 좀 먹어. 그래야 마음의 준비를 하지.”

눈앞에 있는 태오는 달라진 게 없는데, 묘하게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앞으로 소유가 발을 들일 세계는 전혀 경험해 본 적 없는 미지의 것일 테지.


“네가 싫다면 억지로 하지는 않겠지만, 미리 알아는 둬. 처음은 누구든 아파.”

분명 저속한 단어는 하나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저속한 말을 들었을 때처럼 귓가가 달아올랐다.


“내가 널 너무 사랑해서 널 울릴지도 몰라.”

달아오른 귓바퀴에 태오의 말이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귀가 먹먹해지고, 세상이 핑핑 돌았다.

맛만 보고 돌아온 다음 단계에, 소유는 달아 어쩔 줄 몰랐다.

두려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와 동시에 강렬한 충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그녀를 알고 있다는 듯 태오가 느긋하게 웃었다.


“우, 우리 이제 공부하자.”

그에게 더 말려들기 전에 소유가 다시 책을 내려보았다.

그녀의 말을 못 들은 척한 태오는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지다 반대쪽 귓바퀴에도 입을 맞췄다.

소유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왜 그래.”

“아, 미안. 네가 내 입술을 하도 쳐다보기에 이런 걸 바라는 줄 알고.”

태오가 얄밉게 어깨를 으쓱였다.

소유가 따지듯 말했다.


“내가 공부하자고 했잖아.”

“공부하고 있잖아. 스킨십에 대해서.”

태오는 과외비를 두 배는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자신은 무역 업무 교육과 성교육을 동시에 하고 있으니.


“그런 건 내가 알아서 배울게. 혼자서도 충분히…….”

“영상으론 한계가 있을 텐데.”

아버지가 계시는 집에서 못 하는 말이 없다니까.

소유가 괜히 콩닥콩닥해진 마음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너 그런 말 계속하면 쫓겨날 줄 알아.”

첫 만남에서 그토록 차가웠던 태오가 이토록 뜨거워질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 더워.”

태오의 열기에 덩달아 체온이 오른 소유가 머리를 높이 묶고, 카디건을 벗었다.

태오의 진한 눈이 얇은 티셔츠를 걸친 그녀를 진득하게 바라보다가 불평했다.


“난 억울해.”

“뭐가?”

“이렇게 대놓고 꼬시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잖아.”

태오가 커다란 강아지처럼 소유에게 달려들었다.

소유가 그 힘에 밀려 뒤로 털썩 넘어갔다.

그 와중에도 태오는 그녀의 뒤통수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 충격을 막아 주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서로의 몸에 소유가 숨을 세게 들이켰다.


“야, 강태오.”

“나도 내가 왜 이렇게 어린애처럼 구는지 모르겠는데…….”

태오의 단단한 몸이 소유의 말랑한 몸을 가두듯 꽉 끌어안았다.

그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자극이 되었다.

스물아홉이 되어 처음 느껴 보는 대책 없는 조바심이었다.

그러니 태오에게도 나름 첫 경험이라면 첫 경험이었다.


“일단 키스 한 번만 하자.”

소유의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태오는 급하게 소유에게 입을 맞췄다.

그녀에게로 파고들면서 생각했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시도 때도 없이 안고 싶어진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슬그머니 올라온 소유의 팔이 허리를 꼭 끌어안자 태오는 더욱 흉포해졌다.

어느새 책과 연필은 바닥으로 떨어져 형편없이 나뒹군 지 오래였다.

목에 머물던 태오의 손이 위로 올라가 귓불을 어루만지자 소유의 입에서 작은 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의 마른 몸이 살짝 들썩였다.

이윽고 당황스러운 눈망울이 태오를 올려다보았다.

태오는 그녀의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너도 나랑 같은 걸 원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실 나는 진작 알고 있었지.

우리의 이 과외가 결국엔 불순해질 것이라고 말이야.

너와 단둘이 있는데 내가 온순하게 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 * *

태오의 화끈한 과외 덕에 소유의 업무능력은 일취월장이었다.


“공부 정말 열심히 했나 보네.”

고재상 이사도 감탄할 정도였다.


“남편이 공부 도와준다더니, 꽤 잘 가르치나 봐?”

고 이사는 특별한 뜻 없이 한 말이었지만 소유는 지난밤의 낯부끄러웠던 행위가 떠올라 얼굴을 붉혔다.


“어라, 얼굴은 왜 빨개지고 그래? 남편이 그렇게 좋아?”

아무것도 모르는 고 이사는 흐뭇한 얼굴로 소유를 놀렸다.


“……아니에요, 그런 거.”

“아마 사장님도 곧 허락하실 거야. 지금은 공연옥 그 여자가 벌여 놓은 짓들 때문에 예민해지셔서 그렇지, 네가 진짜로 좋아한다면 별수 없지 않겠니? 소문난 딸바보인 양반인데.”

“그렇겠죠?”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씁쓸하게 웃고 있는데, 직원 하나가 와서 말했다.


“저기,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 아, 거래처 변 사장님? 금방 간다고 전해드려.”

“아니, 그게 아니라…… 정소유 씨를 뵈러 오신 분이에요.”

고 이사의 손님이 아닌 듯했다.

아직 일을 배우는 단계라 소유를 직접 찾아올 사람은 없을 텐데.

고 이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소유도 마찬가지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뒤로 돌았다.


“누가 저를…….”

“시어머님이세요.”

“……네?”

“강화 그룹 사모님이요.”

뜻밖의 손님에 놀란 소유가 바로 뛰어갔다.

직원의 말대로 그곳엔 정말 서령이 서 있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유아 물산’의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어머니!”

그새 정이라도 든 것인지, 아니면 태오를 낳아 주신 어머니라 더 친밀감을 느낀 건지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연락도 없이 어떻게 오셨어요.”

소유가 기쁜 얼굴로 서령을 맞이했다.


“안 그래도 한번 찾아뵈려고 했었는데…….”

“아버지 일, 회사 일로 요즘 정신이 없지?”

그런데 서령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달라져 있었다.

차가운 기운을 내뿜는 서령을 보며 소유의 미소도 멎어 들었다.


“일단 들어오시겠어요? 사장실이 비어 있는데.”

소유는 서령을 사장실로 안내하고, 급히 물과 커피를 준비해 돌아왔다.


“지난 분기 대비 매출이 300%나 넘었다고?”

서령이 고고하게 다리를 꼬며 물었다.


“네. 강화 전자와 협력을 맺은 덕분에…….”

“그래. 우리 강화 그룹 덕분에 유아 물산이 이만큼이나 성장할 수 있었지.”

그저 제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로 서령에게선 숨겨지지 않는 적의가 드러났다.

하지만 소유는 연유를 알 수 없었다.

그동안 두 사람의 사이가 틀어질 만한 사건은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그동안 모임에 참석하지 못해서 그런 걸까.

서령이 상황이 편해지거든 나와도 된다고 먼저 배려를 해 줬지만, 내심 마음에 걸렸었다.


“어머니. 지난 몇 달 동안…….”

그러나 서령은 소유의 말을 잘랐다.


“너희 집안에게 우리 태오는 귀인이나 마찬가지이지 않니?”

뜬금없이 나온 태오의 이야기에 소유가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정말 많은 도움 받았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웬만하면 말을 끊고 싶지 않았지만 서령의 인내심은 바닥났다.

자신의 행동이 그다지 우아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소유를 향한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태오가 왜 너희 집안에게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하지?”

소유에게 서서히 마음을 주고 있던 터라 더 화가 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서령이 뜨거운 커피 대신 차가운 물컵을 집어 들었다.


“전부 들었다. 사돈어른께서 우리 태오를 반대한다는 것도, 사돈어른의 마음을 돌리려고 우리 태오가 우스운 꼴까지 당하고 있다는 것도.”

“어머님, 그건…….”

“우리 태오가 널 좋아한다고 해서 감히 그렇게 대해도 된다고 생각했니?”

서령이 그대로 소유에게 물을 뿌렸다.

순식간에 온 얼굴이 젖어 버렸다.


 


“은혜도 모르고, 염치도 없고.”

하지만 물벼락을 맞았다는 사실보다 서령에게 미움받고 있다는 사실이 더 서글퍼졌다.

서령은 비웃을지 모르겠으나 소유는 그녀에게서 엄마의 온정 비슷한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 여사에게선 느낄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더 가까워지고 싶었고, 더 사랑받고 싶었다.

그러나 서령은 아주 잠깐 열어 주었던 마음의 문을 다시 닫아 버렸다.


“이 나이를 먹어도 사람 속은 알 길이 없구나. 난 적어도 네가 태오에게 좋은 사람일 줄 알았다. 우리 태오를, 소중히 여겨 줄 줄 알았어.”

저도 모르는 새에 꼬여 버린 사이를 풀고 싶었으나 빗장은 굳게 잠겨 절대 열리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너희 집안에서 내 아들을 그렇게 반대하고 괄시한다면 우리도 너를 받아 줄 마음이 없구나.”

서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가 귀한 딸이면 우리 태오도 귀한 아들인 걸 알아야지.”

“어머니.”

소유의 미약한 시도도 서령은 칼같이 끊어 냈다.

전혀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말아라. 난 더 이상 네 어머니가 아니니까.”

소유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유달리 애달팠지만, 더는 속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서령은 사장실 문을 열었다.


“가증스러운 것.”

서령은 또각또각 걸어가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유아 물산 직원들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또 속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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