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나의 필연
(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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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나의 필연
2022.05.30.
“사장님. 그 여자 체포됐답니다.”
몇 시간 후 유아 물산의 창립 멤버였던 고재상 이사가 병원으로 찾아왔다.
그는 연옥이 회사를 운영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던 사람 중 하나였다.
희훈에 대한 믿음과 존경이 컸기 때문이다.
희훈은 잠든 딸에게 다정하게 이불을 덮어 주며 말했다.
“힘들겠지만, 고 이사가 당분간 회사 좀 맡아 줘요. 이것저것 변하는 것이 많을 테니.”
아직 희훈의 몸은 완벽하게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혼수상태에 빠질 정도로 심각한 사고를 겪었으니.
하지만 희훈은 필사적으로 힘을 내야 했다.
비정상적인 상황을 정상적으로 돌려 놔야만 했기 때문이다.
소유를 위해서라도.
희훈의 눈앞에 소유를 몰아붙였을 연옥과, 그 남자 태오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시고 얼른 회복이나 하세요.”
그런 희훈을 아는 고 이사가 단호하게 조언했다.
진짜 친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사장님을 기다리고 있는 직원들이 많습니다.”
그동안 유아 물산은 공연옥이라는 폭군 아래 삭막한 공간이었다.
인간적으로 직원들을 대해 주었던 희훈의 경영과는 사뭇 달랐다.
그랬기에 희훈이 깨어났다는 소식만으로 직원들의 사기는 올라가고 있는 상태였다.
심지어 사직서를 썼던 직원들도 다시 돌아오겠노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사장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미리 준비를 해 두는 게 어떻습니까.”
고 이사는 전부터 생각해 왔던 의견을 전달했다.
버젓이 살아 있는 희훈에게는 실례일 수 있는 말이었지만,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다른 회사들이 그렇게 하고 있듯이.
고 이사의 시선이 아이처럼 잠든 소유에게로 향했다.
“유사시 하이에나들이 달려들지 않도록 소유에게도 슬슬 회사 일을 가르쳐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고 이사의 말에 동의하듯 희훈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은 딸에게 고되고 복잡한 일을 시키기 싫어 미뤄 왔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회사 일이란 게 때론 지저분하고, 지치겠지만 소유는 잘 해낼 겁니다. 사장님의 따님이니까. 보통 영특한 게 아니잖아요.”
“그래요.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합시다.”
“네. 프로그램 짜 놓겠습니다.”
고 이사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사라졌다.
희훈은 복합적인 표정으로 딸을 내려다보았다.
그로부터 한참 뒤 소유가 깨어났다.
“아빠.”
깨어나자마자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방긋 웃었다.
“어제 일이 꿈인 줄 알았어요.”
“아니야, 꿈. 이제부턴 아빠가 계속 소유 옆에 있을 거야.”
소유는 아버지를 한 번 꼭 끌어안고 몸을 일으켰다.
쏟아지는 햇살을 보며 태오를 떠올리고 있을 때쯤,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너, 결혼했다며?”
살면서 이토록 황당한 경우는 보지 못했다.
아버지도 모르게 결혼한 딸이라니.
희훈은 연옥에 대한 분노를 애써 내리누르고서 자조적으로 말했다.
“내가 누워 있는 사이에 정말 많은 게 변했네.”
소유가 먹먹해진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어제 그렇게 싸워 놓고서, 아니, 일방적으로 태오에게 화를 낸 주제에, 뻔뻔하게도 그가 보고 싶어졌다.
모진 말을 내뱉고선 그대로 집을 뛰쳐나왔다.
태오가 그런 그녀를 따라 다급하게 나왔지만, 소유는 바로 잡힌 택시를 타고 떠나 버렸다.
룸미러로 보았던 그의 모습이 계속 잔상으로 남았다.
“아빠는 네가 이만 그 결혼 생활을 끝냈으면 하는데.”
어느새 애틋한 눈빛으로 변한 딸에게, 희훈이 내내 생각하던 말을 건넸다.
“뭘 그렇게 놀라? 당연한 일인데.”
죽음의 문턱을 밟고 돌아온 희훈은 변했다.
독해지고, 냉정해졌다.
할 일이 많았다.
그중 단연 먼저 할 일은 딸에게서 연옥의 흔적을 지워내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 딸은 아빠가 보호할게. 더 이상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할 필요는 없단다.”
연옥의 강요로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했던 딸의 남편, 강태오.
딸이 연옥의 탐욕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서 살았으면 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진정한 결혼을 했으면 했다.
강화 그룹보다 초라한 집안이어도 좋다.
미남이 아니어도 좋다.
그저, 소유가 자유 의지로 선택한 남자라면 누구든 좋았다.
그런 의미에서 희훈은 태오를 사위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태오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줬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과 딸의 행복은 별개이므로.
“……어?”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소유가 얼어붙었다.
“공연옥 그 여자가 시켜서 억지로 한 결혼이잖아.”
“…….”
소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명 시작은 연옥의 강요가 맞았다.
하지만 짧은 결혼 생활을 이어 나가며 태오와 많은 것을 나누고, 깊은 위로를 받았다.
이제는 누구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태오와 살고 싶어졌다.
태오를 좋아하게 됐다.
“아빠, 나는 이제…….”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마음이 무겁겠지만, 그래도 이혼하자. 아빠가 부탁할게.”
소유의 말은 마무리를 맺지 못했다.
아버지가 너무나 간곡하게 부탁했기 때문이다.
“난 우리 딸이 그런 결혼 생활 하는 거 죽어도 못 보겠다. 그럼 나중에 아빠가 엄마 얼굴을 어떻게 보겠어.”
아버지가 울었다.
강한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의 나약한 눈물은 소유의 마음을 푹 적셨다.
“잘 키우겠다고 약속했는데.”
“아빠.”
“그러니까 이제라도 바로잡자, 우리.”
푹 젖은 마음은 너덜너덜해져 당장이라도 찢어지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아빠는 네가 유아 물산을 물려받았으면 좋겠다.”
끝내 소유는 아버지에게 진심을 고백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반대하는 바로 그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고백하기엔 아직 아버지의 몸 상태가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잠들었던 사이 이어졌던 결혼 생활과, 그사이에 싹 튼 제 감정들을 털어놓기엔 아직 벅찬 상황 같았다.
비록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그임에도, 짝사랑을 멈출 수 없었던 방대한 심정에 설명하기엔 다소 일렀다.
소유는 아버지의 건강이 조금 더 나아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이 결혼은 자신의 의지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 * *
옷을 갈아입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겨우 하룻밤 외박을 한 것뿐인데, 아주 오랜만에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웃기지. 마침 처음부터 여기서 살았던 것처럼.
소유가 소리 없이 웃고서 3층으로 올라갔다.
태오는 출근을 하고 없을 시간이었다.
내심 보고 싶었는데.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고서 드레스룸에서 옷을 몇 벌 챙겨 나왔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내려가는데, 문득 2층 침실에 시선이 닿았다.
태오와 함께 잠을 자고, 태오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던 소중한 공간이었다.
그곳을 한 번 더 둘러보고 싶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리웠던 태오의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내가 너무 말이 심했나.”
소유는 이미 열 번이고 어제의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물론 다 알면서도 저에게 감쪽같이 숨긴 태오의 행동은 옳지 않았지만, 그 의도가 저를 위한 것이란 걸 너무 잘 알았기 때문이다.
미안하다는 사과와 아빠의 일로 상의를 하고 싶다는 내용의 쪽지를 남겨 두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도 테이블 위에 종이와 펜이 있었다.
침대를 지나쳐 테이블로 걸어가던 소유의 걸음이 순식간에 멈췄다.
침대 위에 올려진 까만 무언가를 보고 만 것이다.
소유가 숨을 들이쉬며 옆을 바라보았다.
“이게 왜 여기에…….”
차라리 귀신을 봤더라면 이토록 놀라진 않았을 것이다.
소유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가방이 아래로 툭 추락했다.
소유가 떨리는 팔을 뻗었다.
그곳엔 소유의 기억 속에만 존재해야 하는 노아의 블랙 가면이 있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 화려했던 불꽃놀이가 재생되었다.
다만 달라진 것은 소유를 잡아 준 이는 낯선 소년이 아니라 가면을 벗은 태오였다는 것이다.
‘내가 원할 때까지 내 옆에 있어.’
소유가 철퍼덕 쓰러졌다.
‘여기에. 나랑 함께. 다시는 떠나지 말고.’
그제야 지난 태오의 의미심장한 말들이 모두 이해되었다.
‘그 애가 너에게 초대장을 보낸 게 정말 아무 의미도 없었다고 생각해?’
태오는 한 번도 속이려고 한 적 없었다.
‘있다면 네가 기억해 내겠지. 늦게라도.’
자신의 정체를.
‘그리고 네가 나한테 직접 말해 줬었어.’
‘네?’
‘네 영어 이름 말이야.’
언제나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남자주인공 이름이 뭐더라?’
자신이 노아라고.
‘Noah. Noah예요.’
‘그렇구나.’
바보 같은 자신이 깨닫지 못했을 뿐.
‘솔직히 누구나 첫사랑과 결혼사길 바라잖아요?’
‘안 그런 사람도 있나?’
엇나갔던 대화가 그제야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왜 보잘것없는 집안의 저를 결혼 상대로 지목했는지도.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바보 같은 말을 내뱉은 저를 보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참, 많이 답답하고 애가 달았겠다.
서운함은 눈 녹듯이 사라졌고, 그의 첫사랑을 빌어 주는 행위 따위는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 얼른 달려가고 싶었다.
내내 자신만 기다려 왔던 그에게로.
* * *
“이렇게 와 줘서 고마워요.”
그날 저녁, 태오는 희훈의 병실을 찾아갔다.
제정신인 장인어른과는 첫 만남이었다.
연옥과 윤범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전면에 나섰던 건 태오의 변호사였기 때문이다.
여러 의미로 긴장되었다.
살면서 태오를 이토록 긴장시킨 사람은 소유 이후로 처음이었다.
“바쁠 테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태오는 사 들고 온 과일바구니를 놓고서 우두커니 섰다.
희훈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깨어나자마자 소유의 인생에서 ‘공연옥이 없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들을 생각해 봤어요. 그리고 이제라도 되돌릴 수 있는 일은 되돌려주자고 다짐했고.”
“네.”
간결하게 대답하려고 했지만, 태오의 목소리는 거칠게 갈라졌다.
“그중 제일 크고, 소유의 인생을 뒤흔든 중요한 사건이 바로 결혼이더군요. 강태오 씨가 우리 소유를 소중히 대해 주고, 나를 위해 많이 애써 준 건 익히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것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눈앞의 남자는 분명 딸에겐 새로운 도피처였을 테다.
“하지만 공연옥이 떠밀지 않았더라면 소유는 당신이랑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
“그건 즉, 당신은 공연옥이 남긴 가장 또렷한 흔적이라는 거예요.”
분했지만 모두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이런 내가 너무 염치없어 보이겠지만, 이만 우리 소유랑 정리해 줘요.”
분명 예상했던 상황이건만 커다란 물체와 부딪히기라도 한 듯 온몸에 커다란 진동이 느껴졌다.
“일방적인 통보로 오는 불이익은 모두 감수할게요. ‘강화 그룹 협력체’라는 타이틀을 박탈해도 좋아요.”
태오는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바로 세워야 했다.
“나는 우리 소유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남자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강태오 씨도 이익 관계에 의한 결혼이 아닌 진짜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합니다.”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 제멋대로 그 다섯 글자가 튀어 나갔다.
당사자도 아닌 아버지에게 먼저 하는 고백이라니, 상황이 제대로 꼬여 버렸다.
“소유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미 던져 버린 고백을 다시 주워 담을 생각은 없었다.
희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조차 소유와 닮아 있어 태오는 도무지 그를 미워할 수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든 유아 물산에서 받게 될 불이익은 없을 겁니다. 협력 관계도 유지될 겁니다.”
희훈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아버지도, 유아 물산도 제가 지킬 겁니다.”
“강태오 씨.”
“약속했으니까요. 공연옥이 아니라 소유와.”
태오의 의지는 강경했다.
* * *
소유는 벽에 기대어 문틈에서 새어 나오는 두 남자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사랑한단다, 나를.
그토록 기다리던 고백인데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잠시 후 태오가 병실에서 나오다 소유를 발견했다.
소유는 조용히 병실 문을 닫고서 태오에게 물었다.
“여긴 무슨 일이야?”
“아버지 보러.”
소유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시 집에 갔었어. 옷 가지러.”
“어.”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그러다 태오가 먼저 용기를 냈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이번 일은 내가 정말 생각이 짧았어. 절대 너를 무시하거나, 얕봐서 그런 게…….”
하지만 곧 소유에 의해 입을 다물어야 했다.
“태오야. 첫사랑과는 잘되어 가고 있니?”
문맥과 전혀 맞지 않는 말이었기에 태오는 그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고민하던 태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
그러자 소유가 곧바로 그의 말을 부정했다.
“잘되긴 뭐가 잘돼. 하나도 안 되고 있잖아.”
“뭐?”
잔잔하던 소유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당황한 태오가 눈물을 닦아 주려는데, 소유가 등 뒤에 있던 무언가를 꺼냈다.
그녀는 노아의 가면을 들고 있었다.
태오가 모든 행동을 멈췄다.
그녀가 집을 떠난 후, 사무치는 그리움을 해결할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소유와의 추억이 깃든 물건을 몇 시간이고 오롯이 바라보고 있는 것.
그렇게 기나긴 밤을 정신없이 견디다 보니 ‘그 물건’을 치우는 것을 그만 깜박하고 말았다.
소유가 잠시 집을 들를 수도 있다는 사실도 망각해 버렸다.
“찾았다.”
태오가 얼어붙은 사이 소유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가면을 위로 들어 올려 태오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고작 그것뿐인데, 그날 그 파티의 감각이 모두 되살아났다.
노아, 아니, 태오의 새까만 눈동자가 그때처럼 소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지.
이렇게 똑같은데.
의심할 여지 없이 같은 사람인데.
소유의 울음이 더욱 커졌다.
가장 찬란한 시절 속 그 소년이 눈앞에 있었다.
아주 멀리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 제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때와 조금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 맞지?”
소유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전학생.”
병원으로 오는 동안 답을 찾았다.
우리의 연이은 만남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우리는 어쩌다 만난 인연일까. 반드시 만났어야 할 인연일까.
“Noah.”
답은 간결하게 나왔다.
필연이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다.
너의 노력과 나의 간절함이 만들어 낸 필연이었다.
“드디어, 찾았다.”
나의 노아.
나의 소년.
나의 첫사랑.
나의 구원자.
나의 남편.
나의 운명.
나의 필연.
그 모두가 너를 가리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