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누가 불청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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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누가 불청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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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누가 불청객?
2022.04.11.
현재의 삶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일까.
정말 좋은 꿈을 꿨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꿈이었다.
그 시절은 소유의 인생에서 손에 꼽힐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제 Hazel은 없어. 넌 정소유야.”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소유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깨질 듯 머리가 아팠다. 숙취였다.
어제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태오는 곁에 없었다. 아침부터 얼굴을 보면 부끄러울 것 같았는데.
그러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작은 쪽지를 발견했다.
[거래는 성사됐어. 네 말대로 내 결혼엔 네가 꼭 필요하거든.]
아버지에 대한 요구를 받아들여 주기로 한 모양이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그를 믿어도 될 것 같았다.
대기업의 후계자 수업을 받았으니 거래라는 단어의 무게를 모를 리 없을 테고, 또…… 무엇보다, 어제의 그는 와인까지 들고 직접 찾아와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적어도 새어머니보다는 신뢰해도 된다는 직감이 생겨났다.
[그러니 너도 약속 지켜. 내가 마음에 안 들더라도 나의 와이프가 되어 줘.]
글자도 주인을 닮아 단정하고 깔끔했다.
거기다 맞춤법과 띄어쓰기까지 강박적일 정도로 완벽했다.
그다운 쪽지에 힘없이 웃고 있는데, 마지막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첫날밤은 즐거웠어.]
화들짝 놀란 소유가 자신의 옷차림을 확인했다.
다해가 뜯어놓은 단추만 거슬릴 뿐 나머지는 그대로였다.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무엇보다 신체에 이질적인 느낌이 들지 않았다.
단언컨대,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거다.
“설마, 농담한 거야?”
만약 그런 거라면 그의 썰렁한 농담에 적응하는 데에 다소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헛웃음을 짓고 있는데, 공손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소유가 태오의 쪽지를 곱게 올려놓고 문으로 다가갔다.
“정소유 씨?”
방문자는 호텔의 직원이었다.
“부사장님께서 전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직원은 가격표도 떼지 않은 새 옷을 내밀었다.
“일부러 가져다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개인적인 심부름을 하게 한 것이 미안해서 소유가 고개를 푹 숙이고 그것을 받았다.
“제가 할 일인 걸요. 그리고 기사를 보고 너무 놀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드디어 기사가 난 모양이구나.
언론이 주목하는 거대한 재벌가인 만큼 아마 연예인의 결혼만큼이나 폭발적인 관심이 쏠릴 테다.
그 뒤에 무슨 반응들이 따라올지는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소유가 어색하게 웃었다.
“네. 알겠습니다.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집이라 생각하시고 쉬세요. 청소는 편하신 시간대 말씀해 주시면 그때 하겠습니다.”
직원이 두 손을 모아 공손하게 인사했다.
직원을 돌려보내고, 소유는 백화점 신상으로 보이는 명품 원피스를 펼쳐 들었다.
이런 거액의 옷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물하다니 새삼 그가 엄청난 재벌이라는 게 체감되었다.
소유는 엉망이 된 헌 옷을 벗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신기하게도 소유의 사이즈와 딱 맞았다.
거울에 제 모습을 비춰 보던 소유가 픽 웃었다.
그의 취향에 맞춰 입으니 그만큼 화려해진 느낌이었다.
고맙다고 문자라도 해야 하나.
쑥스러운 마음으로 휴대폰을 집어 드는데, 달갑지 않은 전화가 걸려 왔다.
[석재현]
수신인의 이름을 확인하고서 소유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연락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었니?”
― 너 이 기사 뭐야? 진짜로 강화 그룹 아들이랑 결혼하는 거야?
재현은 소유가 태어나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언니랑은 화해했어?”
그리고 동시에 다해가 그토록 죽고 못 사는 남자 친구이기도 했다.
다해의 열렬한 구애 끝에 두 사람은 몇 년째 연애 중이었다.
“언니랑 싸우면 괜한 불똥이 나한테 튀니까 사랑 다툼은 적당히 해 주라.”
― 내 말에 먼저 대답해. 너 진짜 그 남자랑 결혼하는 거냐고!
재현이 소유를 다그쳤다.
언제나 다정하기만 하던 재현의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 아니다. 일단 만나. 만나서 이야기해.
“안 되는 거 알잖아.”
― 네가 좋아하는 카페에서 기다릴게. 만약에 안 나오면 나, 정다해 영영 안 봐.
재현은 제 말만 하고 통화를 끊었다.
시련 하나를 넘으면 또 하나의 시련.
이 시련을 넘으면 또 기다리고 있을 다른 시련.
너무나 지쳤다.
언제쯤 끝이 날까.
소유가 피곤한 듯 눈가를 매만졌다.
결국 태오에게 고맙다는 말은 전하지도 못했다.
* * *
재현은 소유가 가장 좋아하는 카페,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소유는 착잡한 표정으로 재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언제부턴가 소꿉친구와도 불편해진 상황이 그녀라고 달가울 리 없었다.
“처음 보는 옷이네?”
재현은 소유를 보자마자 그렇게 말했다.
고급스럽고 화려한 옷이 소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낯설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강태오 부사장이 사 준 거야?”
이렇게 서서히 소유의 본래 모습이 지워지고, 강태오라는 물이 들까 봐 두려웠다.
으레 연한 색일수록 짙은 색 옆에 있으면 쉽게 물들어 버리기 마련이니까.
“할 말이 뭐야?”
그러나 소유는 그런 애달픈 재현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얼른 이 자리를 끝내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나부터 말할게. 언니랑 화해해. 진짜로 헤어질 작정이 아니라면 말이야.”
어린 다해는 재현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저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어른스럽고 자상했던 재현에게 첫눈에 반했던 것이다.
그래서인가. 소유와 재현의 관계를 광적일 정도로 질투했다.
소유가 재현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재현은 소유와 다시 사이를 되돌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재현아. 다시는 언니 물고 늘어지면서 나 협박하지 마. 너까지 그러면 나 너무 힘들어. 우린 친구잖아.”
“친구? 네가 최근 들어, 날 친구로 대한 적은 있었나?”
재현이 쓴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그야…….”
소유가 말끝을 흐렸다.
재현의 근처만 가도 다해가 유독 가시를 세웠기에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재현에겐 미안하지만 그래야만 삶이 덜 고달팠다.
“나 정다해 안 좋아해. 좋아한 적 없어.”
“무슨 말이야, 그게?”
소유의 눈썹 사이가 좁아졌다.
“모르는 척하지 마. 알고 있었잖아.”
재현은 당황스러운 소유의 심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몰아붙였다.
소유는 머리가 지끈했다.
“그럼 언니 고백은 왜 받아 준 건데?”
소유가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네가 그러길 바랐으니까.”
“……뭐?”
재현의 묘한 말에 소유가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정작 폭탄 발언을 한 재현은 덤덤하게 자신이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야만 정다해가 널 덜 괴롭힐 것 같았으니까.”
“재현아.”
“그리고 너와 더 멀어지기 싫었으니까.”
“너 지금 그게…….”
하고 싶은 말이 잔뜩 있었지만, 턱 끝에만 걸릴 뿐 더 나아가지 못했다.
“오롯이 널 위해서였어.”
재현은 무책임하게 시작한 연애의 비참한 말로를 전부 소유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소유는 당혹스러움에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리고 다해만큼이나 재현이 불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넌 왜 나한테 상의도 없이 결혼을 하는 건데?”
재현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고성에 트라우마가 있는 소유가 몸을 움츠렸다.
“너야말로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소유야. 내가 누구 때문에 그 역겨운 연애를 이어 나갔는데.”
“재현아. 미안하지만,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얼른 이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제는 집보다 편해진 호텔 객실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 그런 놈한테 절대 너 못 보내. 우리 그냥 도망갈까?”
“무슨 소리야. 몇 주 후가 결혼식이야.”
“너도 그 사람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 아니잖아. 미국 갈까? 너 미국 좋아하잖아.”
“석재현.”
소유가 재현을 성까지 붙여 부르는 것은 흔하지 않았다.
재현은 쏟아내던 말을 멈추었다.
그 순간 소유에게 또렷하게 생각나는 건 병실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모습과, 참 이상하게도 제게 멋대로 굴던 태오의 얼굴이었다.
“난 네가 언니와 사귀었으면 하고 바란 적도 없고, 네가 언니 고백을 받아 준 건 오로지 네 의지야. 내가 왜 그사이에 끼어 있는지 이유도 도통 모르겠어.”
재현의 말은 폭력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젠 언니 때문이 아니라 그냥 너 자체가 불편해지려고 한다.”
“소유야.”
“언니랑 헤어지고 싶으면 헤어져.”
커피잔 안의 커피가 차갑게 식어 버렸다.
소유의 목소리처럼.
“더 이상 바보 만들지 말고.”
소유가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 그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
분명 처음은 연옥의 강요가 맞지만 이젠 소유 스스로가 태오와의 결혼에 동의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소유의 생채기에 진심으로 반응해 준 것도, 소유가 안심할 수 있도록 확답을 준 것도 태오가 처음이었다.
태오가 착한 사람이라는 것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소유에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믿고 싶었다.
“그러니 그 사람까지 우습게 만들지 마.”
.
.
.
“정소유!”
소유를 소리 없이 따라오던 재현은 강화 호텔 앞에서 그녀를 크게 불렀다.
“아무리 생각해도 넌 지금 그냥 좀 지친 거야.”
소유가 한숨을 쉬며 걸음을 멈췄다.
“그래서 제대로 된 결단을 못 내리는 거라고. 제정신이 아니야.”
“…….”
“정신 돌아오면 마음도 바뀔 거야. 그때 다시 연락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무어라 말을 하려고 뒤로 돌았지만, 재현은 바로 택시를 타고 떠나 버렸다.
“뭐야. 내가 불청객이었던 거야?”
그러다 우두커니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어두운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 태오 씨.”
오늘 외부 출장이 있었다고 했던가.
그의 뒤에 서 있던 비서들이 눈치 빠르게 사라졌다.
“숨겨 둔 연인이 있었다면 미리 말하지 그랬어. 내가 꼭 방해꾼이 된 것 같군.”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쟤는 우리 언니 남자 친구예요.
당장이라도 이렇게 변명하고 싶었으나 심사가 뒤틀린 태오는 소유의 말을 끊었다.
“난 적당히 이용당해 주고, 떨어져 나가 주면 되나?”
그런데 어쩐지 그의 말의 뉘앙스가 묘했다.
마치 질투라도 하는 것처럼.
진짜 좋아하는 사람의 숨겨진 연인을 발견한 사람처럼.
“강태오 씨.”
소유가 태오의 미묘한 태도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거예요?”
“뭐?”
“그렇잖아요. 누가 보면 강태오 씨가 나를 진짜로 좋아하는 줄 알겠어요.”
말을 내뱉으며 생각했다.
그의 화를 돋우고도 남을 무례한 말이었다고.
그런데 의외로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런 말이 없어 더욱 불안했다.
소유는 곧바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말이 막 나가서.”
태오는 대꾸 없이 그녀를 지나쳤다.
그의 뒷모습을 빤히 보다가 소유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미쳤어, 정소유.”
지금 저 사람 비위를 맞춰도 모자랄 판에.
그런 헛소리나 하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