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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왕자 길들이기 (123)화 (120/123)

123화

그 후로 아셰라드렌은 먼저 얼굴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 마치 황성으로 돌아가는 배를 다시 탄 기분이었다.

물론 그때처럼 갇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의 허락 없이는 황성을 떠나지도 못했으니 사실상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내 관심은 오직 디트리히를 향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이 아이를 싸고도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이따금씩 디트리히와 고요함 속에서 눈을 마주할 때에는 문득 의문이 일기도 했다.

아셰라드렌의 마음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 그의 곁에 있어 주기는커녕, 반발하고 화를 내고.

“근데 요즘 프리지어님이 오질 않으시네.”

게다가 최근에는 디트리히를 찾는 사람의 수가 부쩍 줄었다. 초반에 아기를 보러 왔던 이들은, 디트리히의 얼굴만 보고 간 뒤 좀처럼 나타나질 않았다.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잊힐 존재였던가. 나는 통통한 엉덩이를 쭉 빼고 앉아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는 디트리히를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전에 왔을 때 바쁘다고 했잖아. 집안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 아닐까?!”

“그런가…?! 난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는데.”

“아서라, 살롱 한 번 안 가는 애가 대체 어디서 소식을 듣는다고?! 정 마음에 걸리면 밖에 있는 기사님께 물어보면 될 거 아냐.”

젤라는 디트리히 옆에 쪼그려 앉아 딸랑이를 내어 주다 말고 말했다. 시간은 늦은 오후였다. 지금 귀빈실을 지켜 주는 이는 시르시안이었다.

아, 그리고 얼마 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인해 이 앞을 지키는 기사의 수가 부쩍 늘기도 했다. 소개를 받긴 했다만 이름이며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하긴 힘들었다.

“그건 좀 그런데… 아니다, 얼른 다녀올게. 황자님도 왠지 적적해 보이시기도 하고.”

차라리 모르기니아 대공이라도 방문했다면 몰라. 하지만 그쪽은 내가 감히 먼저 황자를 보러 오지 않겠냐고 연락을 넣을 만한 부류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프리지어에게 그럴 수 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가로 다가갔다.

“우스테 경.”

“네, 다프네 양.”

그런데 집안에 일이 있다고 하기엔 시르시안의 안색이며 상태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괜히 문을 열었나 싶은 마음을 뒤로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프리지어님이 도통 보이질 않네요.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제 착각이었을까요?”

“음.”

시르시안은 난감한 듯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주위에 있던 기사들을 슬쩍 둘러본 뒤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잠시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아, 네. 그럼요.”

어차피 귀빈실의 방은 넓으니 이렇게 속닥거린다면 젤라에게는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얼른 답하고는 문을 조금 더 열어 주었다.

틈 사이로 들어온 시르시안이 벽에 기대서서 잠시 디트리히를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아기를 따뜻한 눈빛으로 보던 그였으나, 이상하게도 오늘만큼은 그런 느낌이 전해지지 않았다.

“…누님께서는 레티스 공주님을 제외한 그 누구와도 진짜 친구가 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 건 저도 알고 있어요. 두 분이 각별한 사이셨다고.”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만.”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보다 최근에 누님이 입궁하지 않는 건, 그분께서 후작위 계승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디트리히를 보러 오지 않는 줄로만 알았지, 아예 황성에 오지도 않는다는 건 지금 처음 알았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시르시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버지께서 아직 건재하신데 무슨 소린가 싶겠지요.”

“어… 네.”

거기까진 생각이 닿지 않았지만, 나는 우선 맞장구를 쳤다. 시르시안은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누님을 황후로 만들어 줄 기미를 전혀 보이시질 않으니, 아무래도 노선을 튼 것 같습니다. 이대로 기다리기만 했다간 나이만 먹게 될 뿐이니까.”

“그 부분에 대해선… 할 말이 없네요. 아무래도 저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겠죠.”

전에도 시르시안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프리지어가 황후가 되면 다음 대 후작위는 그가 이어받는 것이냐고.

그때 시르시안은 두루뭉술하게 대답을 피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한 귀족 가문의 수장이 되는 일에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군요. 그렇다고 다프네 양의 탓인 건 아닙니다만.”

디트리히를 향했던 시선이 내게 달라붙었다. 금빛 눈동자는 웃는 듯 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서늘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이 또한 착각일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시르시안이 후작위를 영영 물려받지 못하게 된 것을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 하지만 후작은 굉장히 높은 위치잖아요. 이 나라에는 공작이 아예 없으니….”

“황족과 대공가를 제외하면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요. 심지어 우스테 가문은 현 황제 폐하의 재위를 돕기까지 했고요.”

그렇게 대단한 자리를, 결국에는 프리지어가 물려받게 되는 모양이었다. 레르베 라예트에서는 여자가 가문의 수장이 되는 경우가 아직 많이 없었다.

프리지어가 후작이 된다면 분명 세간의 이목을 크게 살 것이다. 어쩌면 파티를 열지도 모른다.

“…아쉽지 않으세요?”

그러나 한편으로, 후작위는 어쩌면 시르시안의 자리일 수도 있었다. 반발이 거셀 테지만, 출신 성분을 보지 않는다면 그 또한 훌륭한 후계자였다.

시르시안은 황제를 지키는 기사단 소속으로, 아셰라드렌의 측근 중 하나라고 볼 수도 있었다. 나를 데리러 왔을 때도 줄곧 함께였으니까.

“아쉽습니다. 실제로 후계자로서 거론된 적이 있기도 해서.”

시르시안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진심인지 아닌지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어쩌면 일부러 그런 느낌을 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평민으로 태어나 타인에 의해 귀족이 되어 버린 우리들.

나는 시르시안이 과거, 내게 친근함을 느낀다 말했던 걸 아직 기억한다. 나 역시도 공녀가 된 이 시점에서, 언제부턴가 설명하기 힘든 유대감 같은 것을 이따금씩 그에게 품게 되었으니….

내색한 적은 따로 없었으나, 본능적으로 나는 전보다 더 그를 가깝게 여겼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자꾸만 시르시안의 속내가 신경 쓰였다.

“하지만 애초부터 제게 주어진 자리는 아니었으니까요. 다프네 양은 기회가 올 때 망설이지 마십시오. 황후가 된다면, 우리 누님의 콧대 정도는 간단히 눌러 줄 수 있습니다.”

“네? 전 딱히 프리지어님을 누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에이, 거짓말. 적어도 한 번은 그렇게 생각했을걸요.”

시르시안은 내게 농담 몇 마디를 건네다 다시 제 위치로 돌아갔다. 덕분에 내 기분은 상당히 좋아져 있었다.

오늘 저녁은 같이 먹지 않겠냐고 아셰라드렌에게 말해 볼까. 그동안은 젤라가 흔쾌히 디트리히를 돌봐 줄 것이다.

“어우, 다프네! 얘기 다 끝났으면 얼른 좀 와. 나 혼자 황자님 감당 못 해.”

…어쩌면 그건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아셰라드렌과 냉전을 이어 갈 수는 없는데.

“왜 그래? 둘이 잘 노는 것 같더니.”

“아니, 공을 던졌더니 자꾸만 몸을 들썩들썩하시잖아. 아직 제대로 걸으실 수도 없는데!”

“신이 나서 그런가 보지. 네가 잘 놀아 줘 놓고 왜 이제 와서….”

나는 젤라와 디트리히에게 돌아가 무릎을 굽혀 앉았다. 디트리히는 나를 보자마자 ‘꺄아!’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두 팔을 벌렸다.

젤라는 그 모습을 확인한 뒤 재빨리 일어나 종을 울렸다.

“왜? 뭐 하려고.”

“뜨거운 물수건 좀 가져다 달라고 하게. 앗, 종 쓰는 건 네 허락을 맡고 해야 하는 건가?”

“아니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어.”

잠시 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고 답하자 나타난 것은 메이드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잔느였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잔느한테 드레스를 선물했었지. 하지만 고작 그런 것으로 그녀의 속상함을 모두 풀진 못했을 것이다.

육아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힘들고 정신없는 일이라서, 그동안 잔느며 내가 황성에 왔던 목적마저 잊어버리고 살았다.

시간은 사람을 둔하게 만든다. 레티스와 실비아의 억울한 죽음을 조사하겠다고 다짐했던 주제에.

‘자꾸만 여기저기 정신이 팔려선.’

머리로는 알고 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좀 더 자세히 그들의 흔적을 찾아내야 한다고.

그러나 실상은, 황성의 그 누구도 그들이 타인에 의해 죽었다고 믿지 않는데, 나 홀로 의심하고 집착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뭐 해, 다프네. 넌 물수건 필요 없어?”

디트리히를 끌어안고 생각에 잠겨 있다 고개를 들었다. 젤라와 잔느가 이상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어, 필요해. 황자님 얼굴이 침 범벅이시더라.”

정신을 차린 나는 황급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다 역시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되겠다 싶어 물수건 대신 잔느의 손목을 붙잡았다.

“저기, 잔느. 혹시… 젤라랑 같이 황자님을 좀 봐줄 수 있어?”

“나? 나 말이야? 내가?”

그러자 잔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황자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그만큼 흔치 않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아셰라드렌에게 부탁해 잔느도 내 시녀로 만들어 달라고 해 볼까. 일순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나는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평민 출신 공녀가 평민 출신 시녀를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데리고 다녔다가는, 내가 아니라 아셰라드렌의 위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게 틀림없었다.

【계속 S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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