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다프네.”
“아셰!”
아셰라드렌을 보자마자 나는 벌떡 일어났다. 당장에 그에게 달려가고 싶어 디트리히를 잠시 젤라에게 맡길까 했지만, 아기는 마치 다음 내 행동을 예상했다는 듯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을 달았다.
“으먀아!”
“알겠어요, 알겠어요. 계속 안고 있을게요.”
나는 허둥지둥 디트리히를 고쳐 안으며 속삭였다. 그러고는 눈썹을 모으고 아셰라드렌을 쳐다봤다.
문가에 서 있던 그는 이미 내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는 디트리히를 채 보지 못한 듯 나를 힘껏 끌어안았다.
“…얘기는 들었어. 어디 다친 데는?”
“으, 숨 막혀. 없어요. 다행히도. 그렇지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이런 건 소설에서나 읽었지 현실에선….”
“흐꺄아! 먀!”
얼떨결에 나와 아셰라드렌의 사이에 갇힌 디트리히가 괴로운 듯 끙끙거렸다. 나는 아셰라드렌과의 거리를 약간 벌릴까 싶어 뒤로 걸음을 물렸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으려고 했다. 오히려 아기가 짜증 내는 소리를 듣고 더 열렬히 나를 껴안는 것 같기도 했다.
“냐아!”
“응? 세나도 있었어?”
나는 아셰라드렌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안심했다. 그러다 발치에서 조그맣게 우는 고양이를 깨닫고 몸을 살짝 비틀었다.
세나가 발톱을 내밀어 내 치맛자락을 죽죽 잡아당기고 있었다. 나는 반가워하는 고양이를 꼭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오는 길에 보이길래.”
“그래요? 아셰가 데려온 거예요?”
“…응. 그보다 어떻게 이런…. 하, 다프네. 너 꼭 그걸 데리고 있어야겠어?”
아셰라드렌이 내 품에 안긴 아기를 손가락질했다. 나를 놓아준 그가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짚었다.
“여태까지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잖아. 그런데 저놈이 오자마자….”
“이미 허락해 줬으면서 왜 그래요. 어쨌거나 우린 둘 다 살아남았고….”
“하마터면 죽을 뻔했잖아. 그런데 지금, 어떻게 그걸 옹호할 생각을 하지?”
디트리히를 내려다보는 아셰라드렌의 눈빛이 싸늘했다. 황자로 인정한다는 게 그가 아기를 반겨 주겠다는 뜻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나는 속상했다. 어째서 아셰라드렌은 대뜸 디트리히 탓부터 할 수 있는 거지? 그렇게까지 이 아기가 미운 건가?
“왜 그래요, 진짜. 황자님이 뭘 어떻게 했다고.”
“정신 차려, 다프네. 너 지금 그거 때문에 죽을 뻔했다고!”
“하지만 죽지 않았잖아요! 시르시안 님이 지켜 줬다고요.”
“…시르시안 님? 나 말고 다른 남자를 이름으로 부르지 마.”
유치해서 못 들어 주겠다. 애초에 난 평소에 시르시안을 우스테 경이라고 제대로 부르고 있었다.
방금은 마음이 급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어쩌다 보니 예전에 그를 부르던 호칭이 튀어나온 것뿐이었는데. 이 순간에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꼬투리를 잡는 아셰라드렌이 그저 어리게만 느껴졌다.
“그만해요. 그런 걸 문제 삼을 때가 아니라는 거, 알잖아요.”
“…그거, 당장 네 친구한테 넘겨주고 와. 우린 따로 얘기 좀 하지.”
“…싫어요.”
“다프네!”
“지금 우리가 왜 이렇게 열을 올려야 하죠? 난 이해가 안 가요. 그냥 무섭지 않았냐고, 고생했다고 따뜻하게 안아 주기만 하면 안 되는 건가요?”
그렇게 평화롭게 넘어갈 수 있는 일을, 어째서 이렇게까지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해야 한단 말인가. 오고 가는 큰 소리에 디트리히는 울먹거리며 내 팔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는 그저 이 상황이 괴로울 뿐이었다. 그래. 아기는 아무것도 모르는데.
“물론 그렇게 할 수야 있지. 네가 그걸 계속 싸고돌지 않는다면야.”
“…황자님을 어디 다른 데 보내기라도 할 건 아니죠?”
“하, 모르겠군. 꼴도 보기 싫은 그걸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아셰!”
갈등이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나도 아셰라드렌도, 서로에게 굽힐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디트리히는 아셰라드렌을 제외하면 하나밖에 없는 황족이었다.
그런 아기를 잘 알지도 못하는 유모의 손에 넘긴다는 건….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디트리히를 돌보게 될 이들에게 닿을 귀족들의 입김이라든가, 어쩌면 또다시 오늘과 같은 암살 시도가 생겨날지도 모르는데.
디트리히와 얼굴을 마주한 사이가 아니었다면 몰라, 이미 이 손으로 이름 없는 성으로부터 이 아기를 데려왔는데.
내가 어떻게 이 작고 연약한 생명체를 떠넘길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심지어 디트리히는 내 품이 아니면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도 않았다.
누구든 이 사랑스러운 아기와 눈을 마주친 순간이 있었다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이미 디트리히에게 충만한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아셰라드렌을 꼭 닮은, 불쌍하게도 어미마저 잃고 나만을 따르는 아기 황자.
“작작 좀 하지. …후, 당분간 경비를 강화할 테니, 다프네 넌 여기서 나올 생각도 하지 마라. 암살자는커녕 쥐 새끼 한 마리도 들어가지 못하게 해 줄 테니까.”
“…나를 또 가둬 놓겠다고요?”
“안전을 위해서야. 아니면 그걸 내게 넘기든가.”
성의도 없이 손을 벌리는 아셰라드렌을 보고 나는 코웃음을 쳤다. 이 남자는 틀림없이 내면에 병을 앓고 있다.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숨 막히는 집착이 다시금 시작되려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디트리히를 건네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게다가 난 이름 없는 성에서 누구보다 더 길게 근무해 왔던 메이드였다.
위층의 침실만큼은 아니지만 이 귀빈실도 충분히 넓다. 나는 디트리히를 살벌하게 노려보는 아셰라드렌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나와 아셰라드렌의 신경전에 젤라와 예니체 경은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짜증 나, 진짜.”
“벌써 가셨습니다.”
잠시 후, 참다못한 내가 한마디를 내뱉자 예니체 경이 슬쩍 끼어들었다.
“저도 알아요. 문이 닫히는 소릴 들었으니까.”
아셰라드렌은 결국 이 공간에서 나가 버렸다. 저런 식이면 당분간 먼저 나를 찾아올 일은 없다는 걸, 나는 이제 경험으로 알고 있다.
덩치는 산 만하게 커서는 대체 왜 저렇게 속이 좁을까? 이름 없는 성에서 살 때는 착하고 순하기만 했던 남자가.
“연애 한번 뜨겁게 한다. 보는 내가 다 땀이 나네?”
젤라는 이제 예니체 경의 앞에서도 예의를 차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나도 그게 편했다. 마음 편히 속을 털어놓을 친구 하나쯤은 나도 있어야지.
“아니, 이해가 안 되잖아. 황자님이 뭘 어쨌다고.”
“난 폐하의 입장을 알겠는데? 널 끔찍하게 아끼시잖아. 거기에다 그분은 가족을 싫어하시니까….”
“뭐 그건… 나도 알지만.”
사실 아셰라드렌의 기분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나도 내가 너무 심했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디트리히를 포기하진 못하겠다. 지금도 아기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나만 빤히 쳐다보고 있다.
“그런데 정말로 누가 암살자를 보냈을까요. 황자님과 다프네 양이 사라지면 이득을 볼 사람은….”
“너무나 많죠. 다들 폐하를 꺼리긴 한다지만, 황후 자리를 넘보는 귀족들만 해도 이 황성의 절반 이상일걸요.”
나는 디트리히와 함께 소파로 돌아가 예니체 경과 젤라의 대화를 들었다. 그들은 꼭 맞추기라도 한 듯 팔짱을 끼거나 턱을 괸 채 암살자의 배후를 찾아내는 데 혈안이었다.
“나를 노리는 게 아니야. 그 남자, 황자님을 향해 칼을 휘둘렀는걸.”
“그러면 다프네는 빼놓고 생각해 보자. 황자님이 없어지면 가장 반가울 사람은….”
왜 하필이면 이럴 때 아셰라드렌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내가 위험에 처하는 걸 무릅쓰면서까지 디트리히를 해칠 성격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그는 그랬다. 비록 몇 주 전만 해도 나를 완벽하게 속인 전적이 있긴 하지만….
“…….”
에이, 설마. 그렇다고 아기를 죽이려고 할까.
“황자님이 죽게 되면, 폐하께서는 유일하게 살아 있는 황족이 되겠지요.”
“엥, 예니체 경. 지금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세요?”
“아니요. 저도 방금 말하자마자 이건 너무 간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에이, 뭐야. 놀랐잖아요.”
젤라가 장난스럽게 예니체 경의 어깨를 때렸다. 저 두 사람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거지. 암살자가 나타났다는 특수한 상황 탓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소파의 등받이에 늘어지듯 기대어 디트리히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기는 내 머리카락을 오물오물 씹어 대고 있었다.
“으으! 모르겠어요! 바로 떠오르는 사람이 없어.”
그래, 나도 그렇다. 나는 울적한 눈으로 젤라를 바라보았다. 애초에 황성에서 가장 안전한 공간들 중 하나였을 내 침실에 암살자가 등장한 것부터가….
거기까지 생각하다 나는 너무 답답해져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어째 황궁으로 온 후로 한시도 마음 편히 지내는 날이 없는 것 같았다.